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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현재 역사게시판에 lemonade만큼의 헤비업로더는 없습니다. 그것만이라면 문제될게 없죠.
그렇지만 lemonade가 여기 있으면 대단히 해로운 점이 두가지 있습니다.
첫째는 realgura님도 어느 정도는 스스로 겪어보셨다시피 lemonade는 독선적이고 오만하며, 자신보다 더 뛰어난 사람의 의견을 시기하고 온갖 정신승리 수단을 통해 깎아내립니다. 초코틴틴님과의 논쟁에서 보여준 추태는 일시적인 치졸함이 아니라 lemonade의 본색을 잘 보여주는 한 예일 뿐이라서 기대할 것이 없다고 봅니다. 바가바드님 글에서는 lemonade는 밑천이 없으니 요점을 두리뭉실하게 이야기만 하면서 얼렁뚱땅 넘어갔는데 만일 당시에 바가바드님과 논쟁이라도 벌어졌다면 같은 추태를 보여주었을 것이라고 장담할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 lemonade가 여기서 버티고 있음으로 인해서 lemonade보다 부분적으로, 또는 전체적으로 더 뛰어난 분들의 활동 여지가 줄어든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lemonade, 별거 없습니다. 고명한 학자 어쩌구 저쩌구 하는데 자신의 무지와 비논리를 감추기 위한 방편일 뿐입니다.
둘째로는 lemonade의 병크(비꼬기, 거짓말, 말 같다붙이기, 논점 일탈 등)은 지속적이며 이런 행동을 좋은 업로더만이라는 이유로 두둔해야 하는 역게의 특성상 역게 전체를 끌어내리는 속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 인간이 1년에 병크를 적어도 서너번, 많으면 지속적으로 터뜨릴텐데 그렇게 되면 역사게시판이 물론 혼란스러워집니다. 그렇다고 병크를 눈가리고 아웅하는 식으로 넘어가는 것도 해답이 될수는 없죠. 얼마나 역게에서 둘째 가라면 서러울 정도로 저열한 인간성으로 선비개념인 코스프레하는게 역겹고, 논리와 자료는 허술하면서도 왜곡되어 점철되어 있는데.
설령 위문후같이 완전히 눈먼 일빠는 아니더라도 그 친일적인 성향이(친일파 이야기에는 함구, 일본 까는 글은 물론이고 일본이 조선보다 우월하지 않았다는 글조차도 논파하려고 애씀, 일본이 조선보다 우월했다, 일본적인 역사에 대한 미화, 개인적인 친일본 기호 등등) 그 특유의 오만, 독선, 아집, 비열함과 맞물려서 역사게시판을 lemonade의도대로 끌고나가게 하는 것도 시야에 따라 다르지만 문제가 있습니다.
악진님, 레온티에프님, 사일런트힐님, 전부 역사를 보통 이상으로 잘 아시는 분들이시고, 그 학구적인 냉정함을 유지하자는 말 동감입니다. 역사관이 국수주의로 물들어 있으면 소용이 없고 일본은 무작정 까기보단 알아두는게 곧 경쟁력이고 도움이 되는 것이라는 말도 맞습니다. 그러나, lemonade는 아닙니다. 부적합합니다. 사료는 비판적인 자세로 대해야 하는데 유독 일본쪽, 또는 일본에 호의적인 사료는 lemonade가 지금까지 무비판적으로 수용하고 있었습니다. 일본을 알고자 하는 것은 좋지만 여러분과는 달리 그 바뀌어지지 않는 성격적 결함에 의해 아전인수식 해석과 lemonade는 떼놓을 수 없죠. 아전인수식 해석과 논쟁에서의 정신승리는 중립성에 위배되며, 이는 lemonade의 존재가 득보다는 실이 큰 요인이 됩니다.
초코틴틴님께 드리는 간단한 반론 (3)에서 멍청한 말 비꼬기와 말 같다붙이기는 놔두고서라도 일단
1. 캠페스님 말씀대로 논쟁의 무대가 임란 전의 조선과 일본 비교에서 시작했는데 lemonade가 고의로 초점이 되는 시기를 임란과 임란 후로 옮긴것에서부터
2. 그리고 첫번째 글에서 상업 경제 화폐 체제를 이미 확립하였다는 것이나 소농 경제에 따른 직영제의 쇠퇴와 그에 따른 지주제의 확립등 말씀하신 양란 이전에 경제력이 미흡하였다 라고 보기 힘든 사실에 대하여 설명드렸고 말이지요, - 여기서 보이듯 제대로 설명한 것도 없으면서 설명했다고 하고 지주제의 확립= 임란 전부터 이미 경제력이 조선과 대등해짐 식으로 궤변을 늘어놓고
3. 다음으로 단천의 연은 분리법이 일본의 은광을 폭팔적으로 성장시켰던것은 사실입니다, 그런데 그것이 전국의 동란을 넘어 일본 전체의 정치 경제적 구조를 바꾸고 독자적 경제 시스템으로 이끌었을뿐 아니라 마침 동진해온 포르투칼로 하여금 중국과의 무역 네트워크의 한 축을 담당할 기회까지 주었던 경제학적으로 큰 영향을 미친 사실을 간과해서는 안되는 부분이라 생각합니다.
15~16세기에 일본 은이 약세일 때에도 쓰시마와 조선의 구리거래는 한 건에 11만근의 동괴가 거래될 정도로 큰 규모였습니다.
학자들에 따라서는 삼포의 왜관에서는 이러한 일본 은에 대한 비가를 어떻게 책정하느냐의 논쟁이 중종시기 삼포왜란의 발발 요인 중 하나로 지적되기도 하며 일본은 16~17세기 세계 은 생산량의 1/3을 담당하는, 주요한 은 수출국가로 보는 연구도 있습니다.
만력연간 당시 한 관리가 각 지방의 특산물을 정의하기를 일본의 경우 백은과 금속을 들고 있습니다, 동남아가 후추, 향료 등을 언급된데 반하여 지리적으로 인접한 조선은 언급도 안되있지요,
조선의 경우 연은분리법 개발 이후에도 개발자가 천민이라는 탓에 이름조차 알려지지 않을뻔 했고 기술의 활용 역시 중국의 코크스 식 용광로의 경우 처럼 사장되었습니다, 도리어 경제적인 가치의 인정은 일본에서 받았지요, - 연은분리법은 조선보다는 일본으로 전수된 뒤에 오히려 빛을 발했고, 일본과는 달리 조선은 명나라에 대해 비교우위를 가진 특산품이 없었다. 하지만 따라서 일본 경제력>조선 경제력은 아니죠. 일본의 위상을 미화하는 문장도 슬슬 눈에 띄기 시작하는군요.
4. 곡물 생산량이 지표중 하나는 맞습니다만 그것이 전부는 아니라고 봅니다. 간략하게 몇가지 물론 아시겠지만 또 앞서 설명드린바도 있고 단 시간에 급증되는 문제가 아닌것은 아시니 이전의 이야기는 넘어가고 17세기 일본의 상황을 설명드리자면 17세기 말의 오사카는 36만 5천명의 상인과 장인들로 도시가 활기에 넘쳤습니다.
1700년 오사카의 장인들은 평지씨에서 램프 기름을 추출하거나 원면을 옷으로 만드는 일에 종사하고, 중고품을 손질해서 다시 판매하는 일에 종사했는데 스기모토 일가를 비롯한 동 제련업자들은 당시 오사카에서 가장 큰 규모의 노동력 시장을 형성 했으며 17개의 제련소를 통해, 대략 만 가구 이상이 생계를 꾸려갔습니다.
1710년대에는 2천여명이 넘는 직업 목수들이 오사카에서 살면서 배를 만들었고 도매상을 비롯한 유통업자, 삯꾼, 운송업자들은 그 수를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았습니다.
17세기에 일본인들은 필리핀, 샴, 캄보디아에도 진출했고 1673년엔 에치고야가 세운 포목점에선 "현금만 취급, 가격 정찰제"라는 유명한 문구를 표어로 세웠고 오사카와 교토에 분점을 세우기도 했죠, - 곡물 생산량은 아무래도 안되니 무시하고 상업 활동 쪽으로 갈아탑니다. 오사카가 활기에 넘치는 모습이 보기 좋네요. 헤아릴 수가 없을 만큼 많을 정도로 번영하는 상업이 눈에 확 들어옵니다. 이건 초코틴틴님께서도 지적하신 부분이니 패스하고, 그래서 이것 덕에 일본이 조선보다 우월합니까?
5. 결과적으로는 여러 지역들의 특산화를 유발시켰습니다. 특히 남큐슈산 장뇌와 시이케산 버섯, 도사산 재목과 숯, 도야마산 약품, 고후산 포도는 대도시에서 상당한 가격에 판매된 품목들이었습니다.
또한 전국시대를 거치며 다이묘의 정책들은 물물교역을 전국적으로 확대했습니다. 그들의 사업에는 막대한 현금이 필요했고 그들의 수입은 농민들로 부터 받는 미곡이었는데, 이를 현금으로 바꾸기 위해 오사카에 보내야 했습니다.
이에 대한 결과로 해마다 100만석의 쌀이 오사카의 도매상을 통해 유통되었으며 그 양은 1720년대에 4배가 증가했습니다.
이런 활동에는 이에 합당한 교역로가 필수적인데, 일본은 그것도 게을리 하지 않았습니다. 막부의 지령으로 에도의 거상 가와무라 즈이켄은 위험한 수로와 해로를 분류하고, 등대와 수로표지판을 설비하고 구조 시설까지 정비했습니다.
그 리고 육로로는 에도를 중심으로 5개의 주요 대로들이 펼쳐져 있었습니다. 그 중 도카이도는 500km가 꾸준히 이어져있었고, 모래와 자갈로 땅을 평평하게 하고 평균 폭이 6m이상으로 해놓았습니다. 그리고 출발지와 도착지까지의 거리를 표시한 이정표와 표지판이 즐비해 있었고 도카이도를 따라 53개의 역참이 존재했습니다.
이런 도로망의 효율성은 에도에서 오사카까지 가는데 이틀이면 충분한것을 통해 알 수 있습니다 (19세기 초반 기준).이러한 이점 때문에 금융업도 발달할 수 있었고 산업의 효율성을 위한 다양한 연구를 가능케 했습니다.
1860년에 출간된 백과사전에는 200여종의 누에 종류를 다루고 있었습니다. 이것은 일본인들이 더 싸고 좋은 실을 생산하기 위해 얼마나 치열하게 연구했는지를 보여주는 것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뿐 만 아니라 18세기 중반에 비록 보편화 되지는 않았지만, 수력이나 톱니장치로 돌아가는 자동화 기계를 사용하기도 했습니다. 이런 것을 생략하고, 일본은 면직 산업에 대단히 집중했고 결과적으로 매우 다양한 색깔과 모양의 의류를 만들어 냈습니다. - 일본이 대단히 번영하네요. 정체되고 일본에 비해 낙후된 조선과는 달리 "산업의 효율성" 같은 개념을 당시부터 이미 도입해서 얼마나 치열한지도 모르게 연구도 하고, 조선보다 우월하고 찬탄과 미화의 대상이 되는 아시아의 선진국이 바로 누굽니까. 19세기까지도 이젠 논하고 있습니다.
잠깐, 어디서 논쟁이 시작되었더라? 18세기? 19세기? 임란 전에 일본이 조선보다 우월했다는 소리는 성립이 도저히 되지 않으니 lemonade는 그냥 논점 일탈하여 전국시대 어쩌고 하다가(1530년은 전국시대는 맞습니다) 슬쩍 임란, 호란을 하나로 묶고 거기서 18세기로 넘어갑니다. 이것이 유익합니까? 진심이십니까? 논쟁 자체를 조작, 왜곡하는 짓이 아닙니까?
lemonade에 의해 몰랐던 것을 배운다는 것이 절대적인 기준이 될수는 없습니다. 무엇보다도 lemonade는 더 뛰어난 분들이 역게에 오셔서 활동하시는 것을 가로막고 있기 때문이죠. 역게에 많이 배우고 자주 쓰는 역사학도 거의 없습니다. 인정합니다. 그러나 lemonade의 작태는 공부 덜한 역사학도이며, 인간성은 제로에 수렴하고 프로는 커녕 위의 논쟁에서도 보이듯이 준프로라고 부르기도 뭣합니다. 무엇이 두려우신가요? lemonade 가고 나면 대안이 없을것 같습니까? 오유는 오픈 커뮤니티이고 lemonade가 사라짐으로 인해 오히려 역게는 더 뛰어나신 분들에 의해 활성화 될것입니다. 업로더 하나가 사라졌으니 게시물 수는 뒷걸음질칠수도 있지만 장기적으로는 잘 알지도 못하는 성격 파탄 멤버는 없는 편이 훨씬 더 유익합니다. 그리고 lemonade의 허구를 논파하고 역게의 수준을 끌어올려주신 초코틴틴님께 감사의 말씀을 올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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