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화에서는 공소시효도 끝나고, 범인도 못잡았다고 하네요.
실화가 더 소름돋음 ㅠ 각색의 실패일까...
1981년 9월 18일 여대생 박상은양 살해
어린 시절의 나는 신문 사회면에 관심이 많았다. 각종 범죄가 터지면 어머니가 애 보기에 해롭다고 신문을 뺏을 만큼 탐독을 했었다. 어렸을 적 부산은 '토막살인의 도시'로 유명했다. 끝내 미제로 남은 송도 50대 여인 토막 살인사건을 비롯 수 차례의 토막 사건이 부산에서 일어났었고, 한 번은 다대포인가 송도인가 놀러 갔던 중에 먼발치에서 사람의 머리 비슷한 ... 걸 건져 올리는 걸 본 적이 있다. 친구들 다 눈 가리는데 나는 그 머리카락인지 수초인지 모를 것에서 떨어지는 물방울을 세고 있었다. 이렇게 말하면 내가 간이 큰 것 같지만 5학년씩이나 되어서 어느 시장에서 길을 잃고 무서워서 찔찔 짠 적이 있으니 꼭 그렇지는 않을 것이고, 두려움의 결이 다르다고 표현하는게 좋을 것 같다.
종종 오늘을 회고하다 보면 옛날의 사건들을 되짚을 때가 있는데 1981년 9월 18일 일어난 여대생 박상은양 살해 사건은 어린 내가 무척이나 관심을 가지고 들여다 봤던 사건 중의 하나다. 그녀는 부산산업대생이었고 꽤 부유한 집안의 딸이었던 걸로 기억한다. 그녀는 역시 다복한 집안의 자녀들과 함께 그 시절에는 은하수 뱃놀이와도 맞먹을 '미국 연수'를 스스럼없이 가고, 가지고 갔던 돈을 다 써 버린 후 1천불을 더 송금받아 쓸 정도로 통이 큰 처자였다. 성품도 자유분방하여 갈때와 올 때 어울리는 파트너를 바꿀 정도로 활달했다. 그녀는 미술학도였는데 어느 출품작에서 입상하여 그를 받으러 서울로 올라온 처지였다. 그러던 그녀가 목을 졸린 시체로 발견된 것이다.
용의자는 네 명이나 됐다. 세 명은 연수동기생이었고 한 명은 돈 많은 사업가였다. 경찰은 박양의 오빠로부터 경상도 말씨가 섞인 여자로부터 전화를 받고 박양이 나갔다는 얘기를 듣고 있었는데 이 증인이 제발로 나타났다. 포장마차 주인이었다. 그녀는 용의자 가운데 장모군을 지목했고 경찰은 제꺽 장군을 연행하여 심문한다. 거기다가 박상은 양의 귀에 난 치흔이 장경수의 것과 일치한다는 결과가 나왔다. 어렸을 적에는 둘이 싸움이라도 했나 했는데 싸운 게 아니라 '애교흔'이었다. 즉 애무하다가 난 상처였다. 그 치흔은 결정적인 증거가 되어 경찰은 장군을 몰아쳤고 장군은 결국 혐의를 인정한다. 하지만 장군이 곧 자신의 무죄를 주장하면서, 또 부끄러운 혐의를 스스로 인정한 것을 자책하며 자살 소동을 벌이면서 문제는 복잡해진다. 여기서 검찰이 나섰다.
검찰은 경찰의 장군에 대한 수사를 못마땅해했던 것 같고, 그래서 구속영장도 신청하지 않았으며 장군은 무혐의로 풀려난다. 경찰들이 "기자들이 장군을 풀어 준 거다."라고 툴툴거리면서 돌멩이를 차는 와중에 검찰은 또 하나의 용의자를 지목하고 있었다. 부산의 한 여학생으로부터 박양의 오빠에게 전화가 왔다. "장군하고 사귀기 전에예, 상은이가 정군하고도 깊은 관계였거든예. 그래서 상은이가 디게 정군한테 미안해했어예." 오호라 삼각관계. 검찰은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정군을 불러 거짓말탐지기를 해 보니 검찰이 생각하는 것과 비슷한 결과가 나왔다. 검찰은 또 정군을 다그쳤고 자백을 받아낸다. 정군은 검찰의 심문 앞에서 꽤 '임의성있게' 자백했고 검찰은 의기양양했다. 증거라면 정군이 몰던 승용차에서 발견된 혈흔이었다. 혈액형은 O형으로 고인의 것과 같았다. 대한민국 국민 1/4가 그 혈액형이니 직접적인 증거는 못되었지만 박상은양의 옷의 혈흔과 승용차의 혈흔이 비슷한 시기에 생겼다는 국과수의 분석도 뒤따랐다. (이 시기에는 유감스럽게도 DNA 조사법이 없었다.) 경찰은 자신들의 가슴을 치며 "생각의 폭이 바뀌었다."며 머리를 조아렸고 검찰은 "나무가 아니라 숲을 본" (당시 신문 기사) 현명한 율사로 찬사를 받는다.
하지만 법정에서 정군은 또 다시 증언을 뒤집는다. 그리고 병이 있어 각혈도 종종 하는 정군의 친척이 그 차를 종종 탔고 그 혈액형 역시 O형이었다. 결국 남은 것은 '자백' 뿐이었다. 이때 수사를 지휘한 검사 중의 하나가 삼성 보위 검사로 우리에게도 잘 알려진 이종왕 검사였는데 검찰은 자신만만했다. 범인만이 알 수 있는 자백을 다 받아냈고 자백 녹음테이프를 들으며 가족까지 한때 수긍할만큼 완벽한데 무엇이 문제인가. "자백은 증거의 왕"인데. 하지만 재판은 묘하게 전개된다. 물론 대기업 간부 아버지에 유력한 언론사 간부를 친척으로 둔 부유한 집안의 미국 연수생 정재파가 난다긴다하는 변호사들의 도움을 받은 것도 사실이지만 이 재판에서 그 이후로도 하나의 전범이 될 판결을 내리는 것이다.
" ...... 진술의 자유를 침해하는 위법사유가 없어 자백의 임의성이 인정된다고 하더라도 이것은 그 자백이 엄격한 증명의 자료로서 사용될 자격 즉 증거능력이 있다는 것에 지나지 아니하고 그 자백의 진실성과 신빙성 즉 증명력까지도 당연히 인정되어야 하는 것은 아니다. 대저 임의로운 진술은 진실을 반영하는 개연성이 큰 것이 사실이지만, 범죄혐의를 받은 피의자는 임의로운 상태에서도 진실에 반하는 자백을 하는 경우가 있으며 특히 피의자가 외부와 격리된 상황에서 자기를 진범이라고 확신하는 수사관들로부터 집중적인 조사를 받는 경우에는 비록 그 수사의 방법이 피의자의 진술의 자유를 침해하는 정도의 위법성을 띤 것이 아니라고 하여도 스스로 방어의 의사를 포기하고 수사기관의 의도에 영합하는 허위자백을 하게 되는 경우가 있을 수 있으므로, 이 사건과 같이 피고인의 자백이 주된 증거가 되어 있는 사건에 있어서는 자백의 임의성은 물론 나아가 그 신빙성의측면을 신중하고 면밀하게 검토하여 보아야 할 것이다."
즉 줄여 말하면 아무리 자백할 때 고문이나 기타 불법적 상황이 없었다고 하더라도 수사 자체의 위압적 분위기나 공포 때문에 사실과 다른 소리를 할 수도 있으니 그 신빙성을 인정할 수 없다는 것이다. 대한민국이 "바른 말할 때까지 쳐라!"의 자백 제일주의 분위기에서 벗어나는 순간이었다. 당연히 검찰은 쌍심지를 돋웠다. "수사 최상급 기관인 검사 앞의 임의자백이 가장 중요한 증거로 채택되지 않는 이 마당에 전 수사기관은 문을 닫아버려야 하는 상태까지 이른 게 아니냐."며 발을 구르기도 했다고 전한다. 우리는 이 멘트에서 당시 대한민국이 얼마나 야만적인 사회였는지를 목도한다. 한 사람의 인생을 좌우할 수 있는 범죄 수사에서 "최상급 기관"이 동원되고 그 앞의 자백이라면 '가장 중요한 증거'가 되는 것이 상식인 나라는 이른바 '친국'을 감행하던 조선 시대와 그다지 다르지 않았던 것이다.
정군은 300여일만에 석방됐고 그를 기다리는 부모에게로 돌아갔고 흘러들은 얘기로는 그대로 해외 유학을 떠났다고 들었다. 결국 한 여학생을 죽인 범인이 누구인지는 (범인이 고백하지만 않는다면) 영원히 모르게 됐고, 공소시효가 끝난 지도 이미 20년이 되어 간다. 살아 있는 정군과 장군 사진을 피하며 이미지 검색을 하다보니 찾게 된 이 신문 기사 속에서 어떤 형사는 어떻게든 그 범인을 잡겠다며 의지를 불태우고 있었지만 끝내 실패하고 말았다. 공소시효도 끝난지도 16년이다. 단순한 강도살인을 당한 것인지, 용의자로 지목된 둘 중 하나의 범죄인지는 아무도 모른다. 피해자와 피해자 가족들에게 이는 죽어도 잊지 못할 한으로 남아 있을 것이다. 고인의 명복을 빈다. 그런데 그 사건은 대한민국에서 '자백'이 증거들의 나라의 왕위에서 물러나게 만든 사건이었다. 물론 한홍구 교수의 지적대로 그 합리적인 법정신이 시국 사범들이나 간첩단 조작 사건에서 적용되기에는 수십년을 더 기다려야 했고 지금도 비슷하긴 하지만, 최소한 자백에 더하여 집안을 뒤져설랑 태백산맥 소설이나 운동권 노래책 같은 거라도 판사 앞에 증거랍시고 들이밀어야 되는 판의 초석이 된 판결을 낳은 사건이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