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새 전역이 20일 앞으로 다가왔다. 말년 휴가도 일찍 갔다온지라 전역할 때 까지 할 일 없이 내무실에서 기다리는 것도 이제는 지겹다. 밑의 애들을 시켜서 상감 놀이 하는 것도 지겹고, 근무 시간 때 짱박혀서 낮잠자는 것은 더 지겹다. 그렇다고 해서 일과를 하는 것은 더 싫지만 말이다.
오늘은 토요일, 이등병 애들에게 짱박아둔 라면 몇 개를 던져주니 알아서 내 뽀글이도 만들어 온다. 그렇게 뽀글이를 한 입 먹으려는 찰나 행정병 귀염둥이 이상병이 날 찾는다.
"김 만수 병장님! 김 만수 병장님!"
날씨가 추워 빨갛게 상기된 호종이가 다급하게 날 부른다. 왜 저러지?
"왜, 시꺄"
"면회 왔답니다!"
"뭐? 나? 누가?"
날 면회 올 사람이 누가 있지? 면회는 부모님도 온 적이 없다. 부모님이 '남자 새1끼가 뭐가 힘들다고 면회야!'라고 외친 후 나라 사랑카드에 100만원을 넣어 주신 이후로 난 면회를 요청한 적이 없고, 또 따로 면회올 사람이 있을 만큼 인간관계가 좋은 것도 아니니까 말이다.
"모르겠습니다! 근데 이쁜 여자랍니다!"
-이요오오올~!
순간 내무실에 있던 다른 애들이 전부 소리를 지른다.
-김 만수 병장님 저번에 휴가 나가서 여친 만든거 아닙니까?
-가장 여자에 관심 없는 척 하더니 몰래 만든 겁니까!
-이런 배신자!
"흠흠, 이거 원, 귀찮어 죽겠어. 날 가만히 두질 않으니."
이등병 때로 돌아간 것처럼 1분 안에 A급 전투복으로 갈아입은 나는 한 달음에 면회실로 뛰어갔다.
누구지? 누가 면회를 온 걸까?
면회소에는 병사와 면회객이 다들 짝지어 있었고, 내 눈에는 아직 병사가 없는 테이블 하나가 눈에 보였다.
우옷, 엄청난 미인!! 설마? 설마? 설마!
나는 앉아 있는 여자와 눈이 마주쳤고, 그녀가 날 보더니 배시시 웃었다.
심-봤-다-!
나는 속으로 환호성을 외치며 가까이 다가갔다.
"김 만수 병장님 맞으시죠?"
속으로는 신이 나서 기절할 지경이지만 난 겉으로 태연한 척 했다.
"예, 맞아요. 그런데 어떻게 절 찾아오셨죠?"
그녀가 생긋 웃으며 대답한다.
"이진형 이병 기억하세요? 제 오빠에요."
이진형이라면 내가 일병때 왔었던 애다. 3개월 동안 관심병사로 있다가 결국 현역복무부적합으로 전역했는 데, 3개월 동안 내가 아주 잘 챙겨줬었지.
집으로 갈 때 울면서 나한테 '꼭 이쁜 여자 소개시켜줄게요.'라고 하더니만 1년 넘게 소식이 없다가 이번에 여동생이 불쑥 나타난 것이다.
"이야, 진짜 오랜만에 듣는 이름이네요. 진형이 잘 지내요?"
반갑게 근황을 묻자 그녀의 얼굴이 다소 어두워진다.
"아뇨... 실은..."
"...?"
"얼마전에 죽었어요."
순간 나도 얼굴이 굳었다. 잘 지내고 있을 거라 생각했는 데 죽었다니, 가슴 한켠이 찌르르 해진다.
"오빠가 꼭 한 번 면회가라고 했었거든요. 좋으신 분이라고. 그래서 이렇게 온 거에요. 그런데 직접 보니까 인상도 좋으시고, 오빠 말처럼 되게 착하신 분 같아요."
"하하하, 그런가요?"
면회 분위기는 아주 좋았다. 나와 그녀는 몇 시간 동안 즐겁게 이야기하다가 헤어졌고, 그녀는 다음 주에도 또 오겠노라 하고는 돌아갔다.
"만수 형, 그 여자 누구야. 면회소 후임한테 물어보니까 끝내주는 미인이라며?"
"으하하하, 전역할 때가 되니 운이 풀리는 거지!!"
나는 내 맏후임인 신주원 병장을 끌어안으며 외쳤다. 그래, 전역과 동시에 내 인생도 풀리는거야!
라고 생각했지만 행보관의 꼬임에 빠진 나는 6개월 동안 전문하사를 하게 되었다.
"미안해요, 어쩌다보니..."
"괜찮아요. 그래도 계속 오면 되죠!"
미연이(그녀의 이름)가 만든 도시락을 면회소에서 나눠 먹으며 이야기를 꺼내자, 그녀는 오히려 배시싯 웃으며 나를 안심시켰다. 그리고 그녀는 정말로 매주 면회를 왔다. 내가 전역하기 직전에도, 교육 이후 다시 자대에 돌아왔을 때에도 그녀는 매주 면회를 왔다.
그 기간 동안 나는 부대원들의 부러움을 한 몸에 받으며, 심지어 간부들의 부러움까지 받으며 6개월 간 꿈같은 군생활을 하다가 전역을 하게 되었다. 전역하는 날은 우연히도 크리스마스. 남들은 크리스마스에 선물을 받는 다는 데, 나는 신에게 전역을 선물 받는 가 보다.
크리스마스날 나는 미연이와 부대 앞 기차역에서 만나기로 했다. 전역하는 사람이 나 하나뿐이라 기차역은 한산했다.
함박눈이 가득히 내리는 크리스마스날 미연이는 서울행 기차가 떠나는 곳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나를 발견한 미연이는 한달음에 다가왔다.
"전역 축하해요!"
생긋 웃으며 몸을 살짝 숙이며 나를 축하하는 미연이의 모습. 나는 그 모습을 바라보며, 웃으며 말했다.
"고마워, 진형아."
순간 미연이, 아니 진형이의 얼굴이 굳는다. 파래진 얼굴에 몸이 부르르 떨린다.
"알...고...있었어...요?"
"내가 널 잊을리 없지. 군 생활에서 너와 있었 던 3개월이 가장 즐거웠으니까."
주르륵
진형이의 눈에서 눈물이 흐른다.
"미안해요. 속이려고 속인 건 아닌데...흐흐흐흑"
진형이가 오열한다. 긴 생머리가 겨울 바람에 나부끼고, 우산을 떨어뜨린 덕에 머리에 함박눈에 바스라이 쌓인다. 내 전투모에도, 진형이의 머리에도.
턱
나는 진형이의 어깨를 양손으로 잡았다. 순간 진형이가 울음을 멈추고 날 올려다 본다.
검은색 긴 생머리, 오똑한 콧날, 붉은 입술, 눈물이 그렁그렁한 초롱초롱한 눈.
진형이의 몸에서 갓 딴 사과와 같이 싱그러운 냄새가 난다.
진형이의 눈동자가 점점 가까워진다. 어느새 미연이는 내 의도를 깨달은 듯 눈을 감는다.
입맞춤. 짭짤한 미연이의 눈물이 느껴진다.
짧은 입맞춤이 끝나고 그녀는 약간 놀란 듯 눈을 크게 떴다. 그리고 이어지는 의문.
"어...째서?"
"미연아, 난 널 사랑해. 네가 누구여도, 누구였든."
주르륵
짧은 내 말에 미연이의 눈에서 다시 눈물이 흐른다.
하지만 환하게 웃는 그녀의 얼굴. 나는 다시 그녀에게 입을 맞추었다.
201X년, 12월 25일, 크리스마스의 이야기...
지금은 어떻게 됐냐구?
지금은 누구보다도 사랑스러운, 지금 내 옆에서 곤히 잠들어 있는 크리스마스의 천사가 바로 그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