많은 분들이 아래의 스샷에 담긴 사연을 알고 계실겁니다. 유모차공수작전과 관련된 EBS 지식채널의 방송장면을 찍은 스샷이죠.
찾아보니 인터넷은 물론 오유에서도 같은 주제의 글(
http://www.todayhumor.co.kr/board/view.php?table=lovestory&no=6294)이 있을 정도로
유명한 작전입니다. 하지만 그 자세한 내용은 잘 알려져 있지 않은것 같더군요.
그래서 검색질을 시작하면서 KBS 다큐를 보게되었고 그게 이 글을 쓰게 된 계기입니다.
1950년 6월 25일 북한은 한국에 대한 전면적인 침공을 시작합니다. 대한민국 국민이라면 누구나 알고 있는 6.25의 시작이죠.
그리고 이 전쟁의 가장 큰 피해자는 어린아이들이었습니다.
<사진속의 아이들은 촬영 직후 영국군에 의해 구조되었다고 한다.>
"내 성 역시 부모에 대한 인적 자료가 전혀 없어서 원장 어머니의 성을 따랐다...출생일도 대충 1952년 1월 1일로 대충 정해져 사람들이 애깃거리...
그게 싫어서 5월 20일로 바꿨다 내가 학교에서 상을 받은 날이다."
"초등학교 한 학급에만 40~50명의 고아가 있었다..내가 인애원에 왔을 때는 이미 숨이 넘어간줄 알고 버리려던 참에 숨소리가 느껴져 키웠다.."
- 전쟁고아의 불행을 겪은 조성철 씨-
"부모님을 잃고 물만 먹다가...길거리에서 과일껍질을 줏어 먹었다."
- 당시 9세 곽해호 씨 -
"피난 도중에 포소리가 나서 다 흩어지고 누나와 나만 남았다."
- 당시 4세 이요셉 씨 -
이런 참혹한 지옥 속에서 인천상륙작전에 성공한 유엔군은 서울을 탈환하는데 성공하고 공군사령부를 설치합니다.
공군의 군목으로 복무중이던 러셀 블레이즈델 중령도 서울에 주둔했죠.
탈환 직후의 서울은 처참했습니다. 건물은 무너지고 행정은 마비됬으며 고아들이 말 그대로 굴러다녔죠.
이 과정에서 러셀 중령은 고아들을 만납니다.
"당시 전쟁 고아들은 매우 말랐습니다. 눈도 움푹 들어가서 생기를 잃었고요. 아사 직전의 아이들처럼 배는 부풀어 올랐고
옷도 못 입고 간혹 작은 윗도리 하나만 걸치고 신발도 거의 신지 못했죠."
"나는 이 아이들을 돕고 싶었습니다."누구의 관심도 받지 못하고 누구도 듣지 못하는 작은 신음소리만 내며 죽어가던 고아들을 구하기 위해
미 공군 군목 러셀 블레이즈델 중령은 차를 타고 서울의 길거리로 나갑니다.
트럭을 타고 먹을 것을 나눠주며 매일 25명 ~ 60명의 고아들을 데리고 자신이 만든 고아원으로 갔습니다.
그렇게 고아들을 거두기 시작하자 미군트럭을 따라가면 죽지 않는다는 소문이 나기 시작했고
고아원은 2달만에 1000여명에 달하는 고아들이 생활하게 됩니다.
하지만 한꺼번에 많은 고아들로 인해 물자가 넉넉하지 않게 된 러셀 중령은 고민에 빠지게 되고
이에 같은 미군에게 도움을 요청하게 됩니다. 다행히 여기에 호응하여 수많은 미 공군, 미 육군의 장병들이
도움의 손길을 줬고 조금씩 규모가 커지면서 조직이 잡히기 시작했습니다.
< 미 공군 군목 러셀 블레이즈벨 중령>
하지만 마치 달리기 경주 같은 전쟁의 양상은 상황을 바꿔놓습니다.
중공군의 참전으로 서울이 위험하게 된 것입니다.
이에 러셀 중령은 고아들과 한국인 봉사자들을 걱정합니다.
적들이 미군과 관계가 있다는 것을 알고 보복을 할 지도 모른다고 생각한거죠.
그래서 고아들과 한국인 봉사자의 일본망명을 계획하지만 실패하고
중령은 아이들을 대피시킬 생각을 합니다.
아직 퇴각하지 않은 군 트럭 몇 대를 빌려 서울에서 인천까지 몇 번을 왕복하게 한 것이죠.
그리고 인천항의 상황을 예의주시합니다.
<인천항>
제주도로 가는 상선이 있다는 정보를 들었기 때문이지요. 하지만 3일이 지나도록 그 배는 오지 않았습니다.
오지 않을 배를 기다리며 3일을 기다리는 동안 아이들 사이에서 급성 기도 감염증과 풍진이 생기고 맙니다.
이대로라면 전염병이 확산될 것은 자명한 사실..러셀 중령은 급히 서울로 되돌아갑니다.
사령부가 아직 철수하지 않았다면 분명 도움을 청할 사람이 있을거라 판단한겁니다.
그리고 거기서 기적이 일어납니다.
미 제 5공군 작전참모 터너 로저스 대령이 아직 사령부에 남아있었던겁니다.
중령은 로저스 대령에게 사정을 설명하고 로저스 대령은 한가지 방책을 내놓습니다.
"아직 일본에 임무가 없는 C-54 수송기가 있다. 만약 고아들이 수송기의 도착시간에 맞춰 공항에 올 수 있으면
모두 제주도로 수송할 수 있다. 내일 아침까지 김포공항으로 아이들을 데리고 와라."
이에 급히 중령은 인천으로 돌아와 아이들을 수송하려고 했으나..수중에 있는 트럭은 2대가 전부였습니다.
천여명에 달하는 아이들을 내일아침까지 김포공항으로 데리고 가기에는 턱없이 부족한 숫자죠.
이제 아이들을 살릴 수 있는데..또다시 포기해야하나 싶은 순간 또 기적이 일어납니다.
미 해병대 소속의 트럭들이 시멘트를 배에 싣고 있었던겁니다.
해병들이 시멘트를 다 싣고 트럭이 비기를 기다린 중령은 운전병에게 묻습니다.
"저기 하사가 있는곳이 보이나? 저곳으로 가야하네"
"안됩니다."
이에 러셀 중령은 공군 중령 계급을 앞세워 운전병을 윽박지릅니다.
"이건 명령이야. 운전병"
소란이 커지자 다가온 해병대 대령이 러셀 중령에게 총을 뽑습니다.
전시물자를 반강제적으로 징발하려는것은 강탈이며 이적행위라는 겁니다.
하지만 러셀 중령의 간곡한 설득은 대령의 마음을 움직였고
대령은 해병대 트럭 12대 전부를 내줍니다.
중령은 급히 12대의 트럭을 인솔하여 아이들에게 갔으나 문제가 발생했습니다.
김포공항에서 아침 8시에 만나기로 했는데 아이들을 싣고 출발한 시각이 아침 9시였던 것입니다.
이미 약속시간에서 1시간이나 늦어버린 상황. 5공군 작전참모는 분명 늦으면 안된다고 했고
아마 이때 중령은 마음속은 아마 타들어갔을겁니다. 하지만 여기서 또 한번의 기적이 일어납니다.
약속시간에서 2시간이 넘어가고 있었지만 공군 수송기가 계속 공항에서 대기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왜 늦는지 어디까지 왔는지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지도 모르는 상황 속에서 수송기들은 중령과 아이들을 기다린것입니다.
만약 이들이 고아들을 포기하고 일본으로 되돌아 갔으면 이후 사태가 어떻게 되었을지 생각만 해도 아찔한 상황이었습니다.
하지만 수송기들은 고아들을 포기하지 않았고 아이들은 무사히 전쟁터를 떠나 제주도로 향합니다.
그리고 비행기안에서..기장은 중령을 부릅니다.
"목사님 우리가 가는곳이 어디입니까?"
"제주도입니다."
"위치가 어딥니까?"
"한국에서 남쪽으로 약 100 ~ 120Km 밑에 있습니다."
"거기 활주로가 있습니까?"
"모르겠습니다."
기장이 다시 묻습니다.
"그럼 제주도에 통신 시스템이 있습니까?"
러셀 중령이 대답합니다.
"모르겠습니다."
"...그럼 제주도에서 누가 마중 나오나요?"
"모르겠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참 무모하고 어이없는 일이지만 다행이 수송기는 제주도에 무사히 착륙합니다.
그렇게 천여명에 가까운 아이들이 목숨을 건진겁니다.
하지만 러셀 중령은 미군의 군목임에도 불구하고 후퇴명령을 어기고 고아들을 구한것과 관련하여 미 극동사령부 공군본부로 소환됩니다.
군목으로서의 의무를 소홀히 했다는것이 이유였습니다. 이에 러셀 중령은 다음과 같이 항변합니다.
"군목의 의무가 전쟁고아들을 무시하고 그들을 적지에 남겨 둬 죽게 하는 것이라면 저는 당장 전역했을 것입니다."그리고 이 작전이 AP 통신을 통해 미국 내 알려지기 시작하면서 미국민의 여론이 러셀 중령을 지지하고 관련 운동이 벌어지기 시작하면서
러셀 중령에 대한 군의 문제제기는 사라집니다.
이후 대령으로 미 공군을 전역한 러셀 블레이즈델은 전역 후에도 자신이 천여명에 달하는 고아들을 구했다는 사실을 알리지 않고 조용히 여생을 보냅니다.
그렇게 몇십년이 흘러 이 일이 모두에게 잊혀지나 싶던 순간 미 공군잡지 에어맨이 한국전쟁 50주년을 맞아 이 사건을 재조명합니다.
본인은 전혀 이야기하지 않고 살아가던 블레이즈델 목사는 재조명 된 이후 2001년 한국 정부의 초청으로 그의 손자 손녀들과 함께 한국에 옵니다.
한국에서 영부인 이희호 여사와 이한동 국무총리의 환대를 받고 경희대에서는 그에게 명예 박사학위를 수여했으며 2008년에 한국에 동상이 세워집니다.
또한 미 공군 군종감은 블레이즈델 군목에게 4Chaplains Awards를 수여합니다.
4명의 군목 대상은 대전 중 해군 병사들을 위해 자기 목숨을 버린 4명의 군목을 기리는 상으로 군목에게는 최고의 영예입니다.
말년에 많은 감사와 환대를 받은 그는 2007년 라스베거스에서 임종합니다.
미 공군은 공군 의장대를 파견하고 최고의 예를 갖춰 그의 장례를 치릅니다.
전쟁의 최대 피해자는 여성과 어린이라고 합니다. 그 만큼 전쟁은 가장 약한 자에게 가장 잔인한 법이라는 이야기죠.
개인적으로 이런 분들이 많이 알려졌으면 좋겠습니다.
(처음에는 간단하게 전쟁 중에 일어난 일이고 주인공이 군인이니 밀게에 올려야지 라고 생각하였으나 다 쓰고 보니 좋은글 게시판이 맞는것 같기도
하고 애매하네요.-_-;; 게시판 성격에 안 맞다 싶으면 옮기도록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