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초등학교 2학년때 쯤
우리 가족이 시내에서 외식을 했다. 그게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내가 가정을 가지면 우리집은 무조건 공휴일마다 외식이다)
2.초등학교 5학년때 쯤
첫 사랑이었던 우리반 여자얘가 크리스마스카드를 미술시간에 만
들다가 내가 가져온 사인펜을 빌리려고 하자 괜히 튕겨보려고 사인
펜을 숨기자 그얘가 뺏으려하다 내 손을 잡았다 한 10초 쯤 그앤 손
을 놓지 않았다. 내 얼굴이 빨개졌는데도 그 앤 계속 내 모습이 재미
있는지 내 손을 놓지 않았다. 내 진실로 고백하건데 내 나이 30에 많
은 경험을 했지만 그 때 만큼 에로틱한 순간은 없었다
3.고등학교 3학년때
뭔 고등학교가 12월 25일날 기숙사에 입소하라고 한다냐?
열받아서 친구들이랑 술마시고 놀다가 친구의 여자친구들이랑 어울리게
되어서 남자 6명, 여자 4명이 혼숙(?)을 했다. 물론 자지않고 모두 한
방에서 포커치고 놀고 있었는데 갑자기 경찰들이 들이닥쳤다. 옆방에서
열심히 크리스마스 베이비를 만드는 커플이 시끄러워서 방해가 되었는지
신고를 했다. 어벤저, 훈학이, 눈썹, 제비 잘 지내는지 모르겠다. 어벤져
는 참 특이한 놈이었다. 부모님 슬하를 지가 중 3때 떠나고 산에서 지내며학교를 3년동안 개근한놈은 대한민국 역사에 없었을것 같다. 3학년때 학교
수업안 빠지려고 권격도 한국챔피언 도전권을 포기해버린 무서운놈...91년에 대학교 다닐때 양복에 고무신 신고 학교를 다닌 두껍고 엽기적이었던놈...빨간불은 조심해서 건너라는 표시라는걸 가르쳐 주었던 고마운 넘...모두 그립다.
그날 경찰서에 오신 우리아버지에게 밖으로 끌려나가 손들고 기합받았던 네 명의 여자얘들도 시집가서 잘 지내는지...
참 그 다음날 나 매스컴 탔다. 친구들이 나 T.V아침 뉴스에에 이니셜로 나왔다고 전해줬다.
"I 고등학교 2학년 윤모군외 5명은 어제 크리스마스의 연말연시의 들뜬 분위기에 편승하여 광주 모여관에서 모 여고 네 명과 투숙하여...사회적인 성적인 어쩌고 저쩌고..."
참 매스컴 우스웠다. 뉘앙스가 우리가 마치 집단성교를 맺은것 비스므리하게 보도를 했단다. 하긴 아직도 T.V가 소설을 쓰는건 마찬가지인것 같다.
4.스물 두 살 때
빠찡꼬 아르바이트를 이브날부터 시작했다. 면접보러 갔는데 설마 당일부터
시작하라고 할 줄은 몰랐다. 뭐 어차피 만날 여자도 없고 받아 들였다. 참
빠찡꼬 아르바이트(정확히 호텔 슬롯머신)를 하게 된건 좋은 경험이었던것 같다. 종업원들부터 사장님까지(실제 사장이 누구였는지 아직도 모른다)는 물론이고 오는 손님들까지 너무나 엽기적인 개성을 가지신 분들이 많았다.
잊지 못할 랜드로바 아저씨.
누가 봐도 밖에서는 김씨, 이씨로 통할것 같은 그분은 우리가계에 들어오는 이상 본인이 원하건 원치 않건 호칭은 '사장님'이다. 노가다 경력 30년.
다른 사람은 적어도 소형승용차라도 타고오는데 그분은 항상 뒤에 흙묻은 삽자루가 실려진 1.5톤 트럭을 타고 오셨다. 그분은 면도는 물론 세수도 안하시는 분 같았다. 항상 곁에서 나는 퀴퀴한 냄새에 무려 2년을 한번도 안 갈아 신었다는 랜드로바신발. 그분은 랜드로바로 항상 통했다. 수표에 이서할때 우리는 항상 랜드로바라고 적었다.
그.분.이.
어느 일요일 아침 11시에 가게에 들어왔다. 우리 찍돌이(은어)들이 청소를
마치자 마자 조용히 들어섰다. 아아, 우리는 경악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검정 양복에 검정 구두, 올빽으로 넘긴 머리, 깔끔하게 면도된 턱, 아아 나비넥타이까지...엤날에 라스베가스에서 공부를 하셨다는게 거짓이 아니었단말인가? 드디어 라스베가스로 가실 날이 왔단 말인가? 그분은 새색시처럼 부끄러운듯 한 말씀을 하셨다
"오늘 낮에 내 딸 결혼식인게, 빨리 한 번 땡기고 갈께"
그 후 얼마후 빠찡꼬계의 대부시라는 형제분들이 잡혀가셨다. 그 때는 내가아예 전국적으로 메스컴을 탔다. 인용화면에 감색 조끼(유니폼)을 입은 내 뒷모습이 계속적으로 관련 뉴스가 나올때 마다 나왔다. 웃어야할지, 울어야할지...
5. 초등학교 6학년때
1번에서 눈치를 채신분이 있을지 모르겠지만 우리부모님은 내가 스무살때 이혼 하셨다. 우리 아버지를 다른 사람들은 성인군자라고 한다. 자신의 잇속을 챙기지 않으시고 남을 도와주는걸 아주 좋아하신다. 적어도 대외관계에서는 최고이셨다. 하지만 집안에선 마이너스 아버지였다. 어머니에게 지금 생각해보면 참 어처구니 없는 폭력을 가하셨다. 여자와 북어는 3일에 한 번을 패 주는게 좋다고 생각하셨나부다. 어쨋건 아무리 미워도 우리아버지니까 더 이상 자세한 이야기는 나도 하고 싶지 않다. 그 어린 나이에 나와 우리형은 엄마가 도망갈까봐 항상 걱정했다. 울면서 엄마에게 공부열심히 할테니까 집을 나가지말라고 엉엉울면서 붙잡았다. 엄마랑 아들둘이랑 참 많이 울었다. 그 때 내게 하신말
"둘째 니가 대학가는거 보고 이혼할께 울지마...으흥 엉엉"
하지만 얘들이 달리 얘들인가? 하루 지나면 그런거 다 잊어버린다.크리스마스를 며칠 앞두고 우리들은 교회도 안다니면서 뭐가 그리 신나는지 크리스마스 트리를만들고 예쁜 장식도 하고...특히 압권은 우리방 과 엄마방 천장을 반짝이로 완존히 도배를 했다 뭔 돈으로? 5학년때 반에 꾸며둔 장식을 방학을 틈타 싹 걷어왔었거든.
허름한 방이 동화속의 그림집이 되었다. 며칠 동안은 즐거웠다. 그날 아침 전까지...
뻔한 레파토리로 트집을 잡은 아버지가 어머니를 또 때리기 시작했다. 우리가 아버지 발목을 잡지않았으면 엄마가 죽을지도 모를 정도로 엄마를 팼다. 아버지는 분이 안 가라앉았는지 물건을 집어던지다가 갑자기 천정의 반짝이를 걷어내서 갈기갈기 찢었다. 우린 너무나 감당하기 힘든 충격을 받았다. 그 반짝이를 했던 우리들의 노력도 모두 물거품이 되는 순간이었다.
학교에 갈 맛이 안났다. 형과 나는 가출을 했다. 이런 집에서는 우리는 우리의 인권이 보장되지 않는다는걸 어린 나이에 알게 된 것이다. 그날...무척 지루했다. 하루가 이렇게 길 줄이야. 오전에는 광주공원에서 그네타고 놀다가, 비둘기 공원가서 떨어진 쌀 주워서 비둘기 주고, 다시 그네타고 수돗물 마시고...
뽑기(광주에선 띠기라고 부른다)아저씨 옆에서 장사하는거 구경하고. 그런데 동지를 만났다. 어떤 녀석이 우리와 똑같이 땡땡이(학교를 안 간다는 속어)를치고 그네를 타고 있는 것이다. 정확히 말해서 선배였다(가출의 상습자라는 의미)그 녀석은 우리 앞에서 강호의 무정함이니..이 따위 얘기를 했던것 같다. 오전이 지나자 학교를 먼저 파하고 뽑기를 하는 저학년들이 많아졌다. 그 녀석이 저학년들을 겁을 줘서 몇개를 강탈하더니 맛있게 먹기 시작했다. 우리는 침만 꼴깍꼴깍 삼켰다. 그러더니 우리에게도 하나씩 주었다. 지금도 글 쓸 자신있다 '뽑기 하나를 반나절 동안 맛있게 먹을 수 있는 방법'...절때 씹기는 용납되지 않는다. 그냥 빨 뿐이다.
저녁이 다가오자 추위와 배고품은 우리를 공포에도가니로 몰라넣기 시작했다.
"형아야, 이러다 굶어 죽겠다"
"..."
뭐 쩨깐 놈들이 별수 있나. 집에가야지...
집에 가는 우리는 똑 같은 생각을 했다.
'선생님이 집에 전화를 했을건데...우린 죽었다.'
쫄아서 집에 들어선 우리는 울수밖에 없었다.
무서워서 운게 아니다. 너무 슬프고 행복해서 울었다.
엄만...그 많은 찢어진 반짝이 조각들을 바느질로 일일히 꼬매셔서 다시 천장에 붙이고 계셨다. 눈에 퍼런 멍이 든 채로...
더이상 무슨 말을 덧 붙이겠는가. 내 인생의 최고의 크리스마스였고,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크리스마스트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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