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느님 영접한 기념으로 음슴체.
내가 비록 아직 세상 오래 살진 않았다지만 그래도 살면서 자랑스러운 일과 후회되는 일이 있는데 이건 내가 자랑스러운 일중에서도 거의 톱급으로 꼽는 일임.
내가 가끔 보는 사촌중에 양아치 사촌동생이 한명 있었음(얘를 이제부터 Q라 하겠음). 뭐 얘가 일진이나 그런건 아니였는데 태도가 되게 껄렁하고 손버릇이 나빠서 얘네 부모님이 되게 골치를 썩히던 애였음. 그래도 난 미운 놈 떡하나 더준다고 얘가 학교에서 누굴 쫄게 했다느니 자기한테 시비털던 양아치에게 죽빵을 날렸느니 같은 얘기를 들어주면서 '술담배 안하고 여자랑 선넘는짓만 안하면 되지 뭐'이러고 있었음.
그러던 어느날 내가 내 용돈을 모아서 전자사전을 하나 장만했음. 사실 살 생각 없었는데 부모님이 '너 앞으로 공부할때 있으면 편하다.'라고 계속 말했고 나도 소설같은거 쓸려면 있는게 났겠지하는 생각에(컴퓨터로 쓰면 되지 않나 할텐데 컴퓨터가 거실에 있고 자주 블루스크린이 뜨는 뗀석기 시대 유물이라 불가) 못이기는척 샀음. 그리고 한 세달동안은 정말 잘썼음. 그 이후엔 조금 관심이 뜸했고.
근데 내가 관심이 뜸해진지 한 보름남짓 되었을때 Q가 자기 엄마 아빠하고(나한텐 삼촌, 숙모가 되겠지?) 우리집 와서 우리 부모님하고 이런저런 얘기를 하고 다들 음주가무를 열씸히 즐기고(Q는 안즐겼음) 돌아가고 난뒤 문득 생각나서 전자사전을 찾아보려했는데 없음. 땅굴 타고 토꼈나 미그기 타고 날랐나 아무리 뒤져봐도 없는거임. 혹시나 하는 마음에 학교에 가서 뒤져봐도 없었고 있을만한 곳을 다 찾아봤는데도 흔적하나 못찾아서 나는 심히 낙담했음. 왜냐면 우리 부모님이 자기 물건 간수 못하는거에 대해선 아주 엄격한 분들이라 파워 잔소리를 들을수밖에 없었기 때문임.
한창 절망하던 난 문득 뭔갈 떠올렸음. 사실 Q가 몇번 내 전자사전에 눈독들였고 몇번은 잠깐만 달라고도 말했기에 "혹시나 해서 말하는데 너 그거 나 몰래 가져가면 너나 나 둘중 한명은 내일 뜰 해를 못볼꺼야 ㅇㅋ?"라고 했고 Q도 "필요없성ㅋ"이랬던지라 그냥 그런가보다 했었는데 사라지고 나서 얘가 전자사전에 대해 일언반구 언급도 없는거임. 얘가 용돈같은거 받는 놈도 아니고 성실하게 알바를 할 놈도 아니였던지라 내가 촉이 딱 왔음. '이 새끼 이거 설마...?'
그래서 난 걔가 학교 가고 없을때 사촌집에 버스타고 찾아갔음. 걔 부모님이 왠일이냐고 묻자 "잠깐 궁금해서 들려봤어요."라고 둘러대고 걔 방에 들어가서 조금 뒤져봤는데 없었음. 그래서 '아닌가...?'해서 돌아갈려고 했는데 걔 방에 못보던 상자가 하나 있었음. 그래서 걔 부모님한테 이거 뭐냐고 물어봤더니 학교에서 준 과제물이라고 하면서 못열게 했다고 했음. 설마하는 마음에 난 걔 부모님이 부엌에서 식사준비할때 상자 슬쩍 열어봤는데 예상대로 내 전자사전이 '어서 와요 쮸인님!'하고 날 반겨주고 있었음. 심지어 함께 딸려서 사라진 수납용 주머니까지 덤으로.
내가 그때 든 생각이 '아 이 새끼 이거 안되겠다...'이거 였음. 배신감이나 분노도 물론 느꼈지만 사촌 물건 가져갔다는건 절도죄로 내가 경찰에 넘길수도 있는거고 얘 손버릇이 더 나빠지면 실드 쳐줄 거리도 없는 절도를 할지도 모를 일이였음.
그래서 난 걔 부모님이 밥먹고 가라고 손짓할때 먹고 와서 배부르다고 둘러대고 내 전자사전을 챙겨서 빠져나왔음. 그리고 한 2~3일쯤 지났나? 아니나다를까 얘가 전화를 걸어서 니가 전자사전 가져갔냐고 막 따졌음. 어이없어서 내가 '"이 미친놈아 내걸 내가 돌려받아갔는데 뭔 헛소리냐. 그리고 니? 내가 니 친구냐? 말이 좀 짧다?"라고 하니까 얘가 당장 내 집으로 찾아가겠다고 난리를 치길래 순간 열받아서 "와라 띱때꺄 오늘 아주 끝장을 보자"라고 했음.
걔가 오기 전까지 난 존내 패닉상태였음. 아무리 그래도 사촌인데 얘가 와서 깽판치고 그러면 어떡하지라고 했는데 문 걸어잠궈봤자 소란나면 나만 쫄보되는거고 도망가면 이놈이 문을 따고 올지도 모르는거라 이것도 저것도 못하다가 이렇게 된거 둘중 하나 죽을때까지 붙어보자라고 마음먹었음. 그럴때쯤 또 전화가 와서 얘가 또 뭔 헛소리 하는건가하고 받았는데 얘 아빠가(나에겐 삼촌이) 걸었음.
그리곤 Q가 엄청 화나서 널 후려 팬다느니 뭐니 하며 나갔다는데 뭔소리냐고 묻길래 내가 다 털어놨음. 얘가 내 전자사전을 몰래 훔쳐가서 일주일간 무단으로 사용했길래 내가 그날 찾아갔을때 찾아서 가져갔고 그걸 따지로 온답디다. 나도 더이상 참을 수가 없어서 그놈하고 오늘 끝장을 볼렵니다라고 하니까 삼촌이 자기가 이놈 줘패서라도 사과시킬테니 문 열어주지 말고 기다리라고 했는데 난 그때 이미 마음 굳게먹었던지라 안와도 된다고 하고 대신 올꺼면 10분뒤에 오라고 미리 언지를 주고 끊었음.
그 이후 영겁같은 시간이 지나고나서 마침내 얘가 문을 벌컥 열고 난입했음. 나는 미리 기다리고 있다가 "이 시발놈이 남의 집 방문할때 노크도 안하고오네"하고 비웃었고 얘는 얘대로 빡쳐서 당장이라도 날 반죽여놓고 전자사전을 가져갈 기새였음. 이 다음부턴 대략 이런 대화가 오갔음.
Q:야! 그 전자사전 왜 가져갔냐?!
나:내꺼니까 내가 가져갔지. 내가 빌려준것도 아니고 니가 멋대로 가져가놓곤 나한테 적반하장이냐?
Q:너 시발 그거 쓰지도 않는거잖아! 쓰지도 않을 물건으로 유새떠는거야 뭐야!
나:미친 새낔ㅋㅋㅋㅋ 양아치 새끼라서 논리도 양아치 논리네ㅋㅋ 이 시발놈아 그럼 국회의사당은 정치 안하는 국회의원들 투성이니까 내가 정치한답시고 점거해도 되냐? 지랄도 유분수지ㅋㅋㅋㅋ
이런식으로 대치하다가 얘가 돌려달라고 막 우기길래 깊고 어두운 그분의 자세로 "조까~"라고 했는데 얘가 지딴엔 강하게 나갈려고 했는지 내 죽빵을 갈겼음. 내가 하도 어이가 없어서 멍하니 보니까 기고만장해져서 나이값 못하는 새끼라느니 니 부모님한테 내가 다 까발릴거라느니 이러다가 내가 책상에 올려놓고 있던 전자사전에 손을 뻗길래 내가 무심코 손을 홱 잡아챘음. 그러니까 얘가 "안놔 시발?!" 이러면서 뿌리쳤는데 그거때문에 책상 모서리에 찧었음. 이쯤되니 나도 존내 이성을 서서히 잃어갔고 얘가 마침내 결정타를 날렸음.
Q:봐준줄 알아 시발 덩치만 등신같이 큰 새끼가...
결국 난 얘한테 죽빵을 날렸음. 아무리 양아치라해도 얘는 중딩이고(정확히는 중3) 나는 한창 스트레스 받을 고딩(정확히는 고2)이라 체격차이가 좀 났고 얘는 난데없이 죽빵을 맞은거 때문에 그대로 마루에 쓰러졌고 내가 열불뻗쳐서 코른의 축복을 받은 신도처럼 쌍욕을 퍼부었음.
나:이 쥐좆만한 새끼가 오냐오냐하니까 하늘 높은줄 모르고 기어오르지? 너 오늘 잘만났어 이 새꺄. 넌 오늘 내 손에 뒤진다.
Q:이 띱때끼가 뭐..
나:그 입 닥쳐 이 망고같은 새꺄. 넌 시발 PC방에서 안쓰는 스피커 있으면 허락없이 가져오냐? 응? 마트 창고에 있는 물건들은 아직 안파는거라서 그냥 가져오냐고 이 븅딱새꺄.
Q:븅신새꺄 그건 남의 물건이잖아!
나:아 그럼 난 남도 아니고 그냥 병신새끼라 가져온거고? 이 대운하에 갈아쳐넣을 븅신새꺄 넌 오늘 잘됐어. 그 븅신새끼한테 오늘 제대로 죽어봐 이 씨발놈아.
난 그때 난생 처음으로 '사람이 진심으로 빡치면 어떻게 되나'를 온몸으로 체험했음. 농담이 아니고 사람이 진심으로 빡치면 뒷일 생각이 전혀안나고 머리에 손오공 긴고아가 조이는거처럼 아파옴. 내가 그대로 방으로 들어가서 아빠가 사왔던 등 시원해지라고 두들기는 딱딱이를 들고 나왔고 문답무용으로 얠 두들겨 팼음. 그 두사부일체였나 그거보면 계두식이 양아치 학생 교실에서 줘패는 그것처럼 아주 개패듯 두들겨 팼는데 나중에 얘가 말하길 내가 그때 "과일 죽이는 솜씨가 뛰어나다! 과일 죽이는 솜씨가 뛰어나다고 씨발새꺄!" "이게 부러지거나 니 피가 묻을때까지 존나 쳐맞아봐! 알겠어? 존나 쳐맞아보라고 씨발새꺄!!"이러면서 자길 팼다고 했음.
사실 난 그때 기억이 잘 안남. 정확히 말하자면 내가 그때 걜 팬건 기억이 나는데 뭐라고 하면서 팼는지를 모르겠음. 거의 반쯤 광분한 상태로 팼던거 같음. 아무튼 그렇게 패고 있을때 삼촌이 들어와서(아마 얘가 문을 제대로 안닫았는지 문여는 소리가 안났음. 아니면 내가 못들었던가) 날 말렸는데 내가 그때 눈에 뵈는게 없어서 뭐야 씨발!이러면서 딱딱이를 휘둘렀는데 그게 벽에 부딪혀서 박살이 났음. 그쯤 되니까 내가 그제서야 정신이 들어서 방을 살펴봤는데 걔는 웅크린채로 엉엉 울고 있고 삼촌은 얼굴 하얗게 질려서 이게 어떻게 된거냐고 묻고 있고... 진짜 순간 내 몸에 사람 때려죽인 귀신이 빙의했다 나온거 같았음.
내가 무슨 일 있었는지 다 털어놨고 삼촌한테 날 존나 패든 경찰에 넘기든 마음대로 하라고 했는데 삼촌이 울고 있던 애를 잡아채더니 뺨을 후려갈기면서 이랬음.
"이 자식이 뭘잘했다고 쳐울어! 남의 물건 도둑질한것도 모자라서 부모님까지 속여? 당장 사과안해?!"
이러니까 얘가 그제서야 사태 파악이 됐는지 나한테 미안하다고 살려달라고 굽실거렸음. 삼촌은 계속 똑바로 사과하라고 윽박지르고 걔는 또 나한테 쳐맞을까봐 눈물콧물 범벅되어서 빌고 아주 가관이였음.
내가 얘 얼굴 살펴보니까 입술 좀 찢어져 있었는데 그런 모습 보니까 내가 얠 딱딱이로 존나 두들겨 팼는데 내가 선을 넘었구나... 이 생각에 부서진 딱딱이를 들고 자리에 앉아서(사실 거의 힘빠져서 주저앉는 수준이였음.) 얘한테 말했음
나:나한테 사실대로 말을 하던가 아니면 최소한 빌려달라고 말했으면 내가 "안줘 꺼져!"이랬을꺼 같냐? 왜 말도 없이 가져가 쫌생이 새끼처럼. 니가 거지야? 물건 훔쳐가고 자위질하게?
Q:(고개 숙이고 훌쩍거리면서 듣고만 있었음)
나:...에이 시발 존나 머리 아프네. 그럼 이렇게 하자. 너 그거 가져.
Q:(이때 얘가 놀랬는지 날 똑바로 쳐다봤고 삼촌도 마찬가지였음)
나:대신에... 너 이번에 기말고사라 했지? 중학교 마지막 기말고사. 너 거기서 반 3등내로 들거나 아니면 전교 33등안에 들어. 그러면 내가 너에게 그걸 진짜로 줄께. 그러니까 이건 빌려주는 셈이지. 대신에 만약 둘중 하나라도 만족못시키면 그땐 오늘 쳐맞은게 애교로 보일 정도로 줘패버리고 경찰에 넘겨버릴꺼야. 알았어?
사실 맘같아선 삼촌 앞에서도 두드려 패고 싶긴 했는데 전의를 상실한 애를 패는것도 그렇고 내가 더이상 팰 힘도 없었음. 힘이 쭉 빠져나가니까 아무것도 하기 싫었을정도로. 결국 삼촌을 증인으로 해서 그렇게 마무리짓고 돌려보냈음. 그 이후엔 그냥 침대로 가서 죽은듯이 잤음. 아무것도 하기 싫고 이후에 어떻게 했는지 생각도 안남. 한 몇번은 헛구역질 했던거 같은데 잘 모르겠고.
이후 어떻게 됐냐면 걔는 전교 39등인가 했지만 반 3등을 해서 나에게 정식으로 전자사전을 인도받았고 양아치였던 녀석이 그 이후엔 점점 행실을 개선해 나갔음. 뭐 지금도 아직 조금 삐딱하긴 하지만 그때에 비하면 많이 나아졌고 무엇보다 성적이 나아지니까 주변 사람이 얠 대접해주는게 달라졌고 얘도 거기에 맛들렸는지 고등학교땐 꾸준히 반에서 7~8등은 했다고 함. 삼촌이랑 숙모가 나에게 엄청 고마워해준건 덤이였고.
어... 어떻게 끝내야하나... 아무튼 나중에 걔가 나한테 자기 인간 만들어줘서 고맙다고 치킨 사왔길래 맛있게 뜯어먹었음.
그럼 200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