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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상주의라는 것은 재정의 목적은 최대한 아끼는데 있으며 남는 재화와 자원은 오로지 자국에 없는 희소자원의 획득만을 목적으로 한다는 경제이념입니다.
여기서 최대한 아끼는데 있다는 것은 국가재정의 절약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소비의 억제를 얘기하는 것입니다. 즉 쥐어짜내서 사람들의 소비를 억제하고 쥐어짜낸것으로 없는 희소자원을 얻는다는 것이죠.
다시 말하면 중상주의경제의 시대, 학자들은 식량이 부족한 어떤 국가가 식량을 사서 신민들에게 배급하면 그 돈으로 대포나 말, 아니면 선박을 만들 목재를 살 기회비용을 잃는 것이라 보았습니다.
마찬가지 이유로 피복과 같은 소비재를 위해 재정을 쓰는 것을 낭비라고 보았죠. 이러한 개념에 의해 재화와 용역의 이동에 막대한 관세를 부과하는 것이 정당한 것으로 인정되었으며 또한 많은 국가들이 일종의 상인허가권같은 것을 만들어 다시금 부가 제멋대로 들락날락하는 것에 비용을 물렸습니다.
조선의 경제정책 역시 기본은 이와 같은 이념에 기인합니다.
모든 국가 들은 제각기 목적이 존재합니다, 가치관, 건국 이념등 말이죠,
왕정체제의 국가에서는 대개는 군주의 성향에 따라 좌우되기 마련입니다만 신권과의 균형에 따라 다소 변동되는 모습을 가지기도 합니다.
그러나 조선은 건국 이념이자 국가의 가치관이기도 하며, 사회의 근간이라고 할수 있는 것이 동일하여 신권과 왕권의 균형을 떠나 이상적인 국가관은 달라지지 않았습니다.
그 건국이념이자 국가의 가치관, 사회의 근간이 바로 유교입니다.
성리학이 아니냐고 하시는 분들도 있으시겠지만 네 성리학도 맞습니다, 그렇지만 성리학의 뿌리가 닿아있는 것이 유교이며, 쉽고 간단하게 풀어보자면 성리학은 기존의 유교에서 ~~을 해야 한다라는 추상적인 물음에 왜? 라는 구체적인 물음을 더한것이라고 보시면 되기 때문입니다.
유교에서 바라는 이상적인 국가관이란 간단하게 보자면 수신 제가 치국 평천하와 천인상관론에 따라 현실적인 형태로 등장하는 기근, 역병, 이상기후, 전쟁 등의 천명을 막기 위해 스스로 수신을 하는 왕과 그를 보필하여 이상적인 사회를 유지시키는 책임이 있는 지식 계층에서 발현한 신하들 아래 계층 질서에 맞게 각자의 역할을 다하며 자급 자족을 원칙으로 하는 농업 사회입니다.
즉 질서를 흐리는 계층간 계급 이동은 존재할수 없는 노릇이며 지식 계층과 농업외의 계층은 천한것이며, 상업이나 공업은 농업에 종속된 하부 개념일 뿐입니다.
자 이렇게 이상주의 아래 자급자족하는 폐쇄적인 경제 상황이 결국 어떠한 결과를 가져왔나요?
조선 전기를 통틀어 물물교환의 원시적 경제형태에서 탈피하지 못해 제대로 된 갑옷 하나 수도의 소수의 용병제를 따르는 군대를 제하면 지급조차 하지 못했고 총통 하나 만들기도 버거워 했습니다.
군대를 유지한다는 자체가 심각하게 재정에 부담으로 아니 국가를 유지하는 그 자체에 큰 부담을 가져와 임란, 호란등 조선 전체를 통틀어 전란에 제대로 대응치 못하는 결과는 물론이거니와 각종 재난이 있을 때 마다 국가가 흔들리는 가져왔습니다.1)
조선 후기에 들어 근대화에 접어드는 과정에서도 이와 같은 장기간의 병폐 결과 쇄국을 택할 수밖에 없었으며, 초코틴틴님이 말씀하시는 경제적 침탈 또한 막아내지 못했습니다.
조선을 마냥 부정할 생각도 일본을 좋아할 생각도 없습니다만 확실히 아닌건 아니죠,
일본과 저희의 우열 관계는 삼국 시대처럼 우리가 우세하다. 볼수는 없습니다.
우리가 이상에 얽매여 스스로 국가의 문을 닫고 자급 자족에 만족하는 그때 일본은 끊임없이 발전을 꽤하였고 그 결과가 서양 열강들이 몰려들던 그 시기에 극명하게 들어나는것입니다.
1) 조선 초기 500만 명을 넘지 못했던 조선시대의 인구는 조선 중기 현종 때인 1669년에 겨우 500만을 넘었습니다. 그러나 돌림병과 역질이 돌 때마다 인구가 크게 줄어 30년 전의 인구로 되돌아가는 모습이 발견됩니다.
영조 중반기에 인구 700만을 돌파한 조선의 인구는 순조 17년(1817)에서야 800만 돌파를 목전에 두게 됩니다.
조선 초기인 태종 4년(1404) 4월 25일 호조에서 각 도의 전답과 호구 수를 보고한 내용이 발견되었는데 이 시절에 충청도는 1만 9,561호에 인구는 4만 4,476명, 전라도는 1만 5,703호에 인구가 3만 9,151명, 경상도는 4만 8,992호에 인구는 9만8,915명, 풍해도(황해도)는 1만 4,170호에 인구는 2만 9,441명, 강원도는 1만 5,879호에 인구가 2만 9,238명, 동북면은 1만 1,311호에 인구가 2만 8,693명, 서북면은 2만 7,788호에 인구가 5만 2,872명으로 조사되었습니다.
연산군 9년(1503) 2월 9일에는 한성부에서 "정월부터 2월 5일까지 도성(서울) 안팎의 출생자는 120명, 사망 470명이라는 보고 자료가 있습니다.
중종14년(1519)에는 가구수 754,146호 인구 3,745,481명으로 조사되었지요,
인조 17년(1639)에는 44만 1,827호에 152만 1,165명과 효종 5년(1654) 가구수 62만 8,603호 인구 204만 7,261명으로 이는 1627년 정묘호란과 1636년 병자호란의 영향 때문입니다.
조선 중기에 해당하는 현종개수실록 10년(1669) 12월 29일의 기록에 의하면 한양과 지방의 호수는 134만 2,074호이고, 인구는 516만 4,524명으로 집계되었습니다,
현종 13년(1672) 10월 30일 실록에 의하면 호수는 117만 6,917호이고 인구는 469만 5,611명. 이 중 남자가 254만 1,552명, 여자가 215만 4,059명이었는데, 3년 전에 비해 인구는 무려 46만 8,913명, 호수는 16만 5,157호나 줄어든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 비밀은 다름이 아니라 신해년(1671)의 기근과 전염병에 죽은 백성이 즐비하고 떠돌아다니는 자가 많았기 때문이었습니다.
과연 조선시대에 전염병이 어느 정도로 맹위를 떨쳤기에 '죽은 백성이 즐비하다'는 표현을 썼을까요,
조선시대에는 종기도 목숨을 거두어가는 시절이었으니, 전염병이라면 그야말로 공포의 대상이 아닐수가 없겠습니다.
숙종 44년(1718) 1월 15일 충청도 각 고을 백성들 가운데 전염병을 앓는 자가 2,140명, 사망자 642명, 함경도 각 고을에 염병(장티푸스)을 앓는 자가 4,570명, 사망자 1,243명. 숙종 45년(1719) 1월 2일 충청도에서 각 고을마다 염병을 앓는 자가 1,643명, 사망 240명(온 집안이 몰사한 경우가 4호). 평안도에서 염병을 앓는 자가 8,348명, 사망 1,380명이었는데 이런 기록으로 미루어 짐작할 때 당시엔 계절을 가리지 않고 전염병이 기승을 부려 피해가 더욱 컸음을 알 수 있습니다.
1821년(순조 21)에서 1822년 사이에 유행했던 콜레라로 인한 사망자는 평양에 수만 명, 서울에 13만 명으로 전국으로 따지면 수십만의 사망자가 발생했다고 합니다.
정조가 사망하기 1년 전인 1823년에 전염병이 돌았던 적이 있는데 이해 전국의 사망자는 모두 12만 8천여 명이었다습니다.('정조실록' 23년 1월 13일). 정말 엄청난 숫자가 아닐 수 없습니다.
조선시대 천연두·장티푸스·콜레라는 3대 전염병으로 이 세 전염병은 번갈아 등장하여 대학살을 자행했습니다.1859년(철종 10)에서 1860년에도 콜레라가 크게 유행했는데, 이때의 사망자는 40만 명으로 서양 중세의 흑사병(페스트)만 무서웠던 것이 아닙니다.
특히 정조 23년 유행한 전염병에는 정치인들의 죽음이 눈에 띕니다.
1월 7일에 김종수(좌의정)가, 18일에 채제공(영의정)과 서호수(판서)가 죽었다. 김종수는 노론의 영수, 채제공은 남인의 영수였고 서호수는 이 시기 권력의 중심에 있던 소론 서명응(徐命膺)의 아들이었습니다.전염병으로 인해 각 당파의 거두들이 죽고, 그로부터 7개월 뒤에는 정조가 종기 때문에 죽게됩니다.
당쟁의 지도가 일순 바뀐 것은 두말할 나위가 없습니다. 질병에 의해 역사가 바뀐 것입니다.
어쨌거나 전염병은 조선 후기 민간인 사망의 가장 큰 원인이었는데 이처럼 돌림병이 시도 때도 없이 돌았으니 인구증가율이 옆으로 게걸음을 한 것도 이해가 쉬운 부분입니다.
숙종 1년(1675) 10월 27일 실록에 의하면 '서울과 8도를 합하여 호수가 123만 4,512호이고 인구가 470만 355명'으로 기록되어 있었습니다.
42년 후인 숙종 43년(1717) 11월 14일 실록에 의하면 전국의 호수 총계는 155만 7,709호, 인구는 683만 9,771명으로 나타나 있는데 질병과 기근, 괴질과 역질이 차례로 돌았음에도 불구하고 42년 만에 호수는 32만여 호, 인구는 213만여 명이 늘었습니다.
영조 8년(1732)에는 가구수 171만 3,849호에 인구 7,273,446명이었고, 영조 23년(1747) 12월 28일의 인구조사에 의하면 서울의 호수는 3만 4153호, 인구는 18만 2,584명이며 8도의 호수는 172만 5,538호, 인구는 734만 318명(남 353만 9,107명, 여 380만 1,211명)이었는데. 이때 비로소 인구가 700만을 넘게 됩니다.
그러나 정조 1년(1777) 실록을 보면 호수가 117만 5,371호, 인구는 723만 8,523명으로 오히려 영조 시절보다 호수는 55만, 인구는 11만 명 정도가 줄어든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이는 각종 전염병이나 기근으로 인한 떼죽음의 결과가 아닌가 추측되고 있습니다.
정조 시절에도 인구증가율이 옆으로 게걸음을 계속했는데, 이때도 질병과 기근이 반복되었기 때문으로 분석됩니다.
순조 17년(1817) 12월 29일엔 전국의 호수가 163만 718호, 인구가 790만 3,167명으로 800만 돌파를 목전에 두게 되지만. 그러나 순조 28년(1828) 섣달 그믐날 기준 인구조사가 있었는데 가구 152만 7,608호 인구664만 4,408명(남:332만 5,221명. 여:331만 9,261명)으로 다시 가구와 인구가 줄었습니다.
이는 순조시대에 전국에 걸쳐 대형 화재와 홍수 그리고 전염병이 있었기 때문이었는데. 그러다가 1910년 가구수 280만 4,103호 인구 1천 331만 3,017명으로 조사되어 1천만 시대에 접어들게 됩니다.
이처럼 미비한 의학 수준과 그것을 다방면에서 가로막은 이상주의를 요구하는 사회와 그에 비릇된 문제들로 인구는 끊임없이 변동되었고 성장이 답보 상태에 머무르게 되었습니다.
일본의 경우는 1590년에 이미 1,800만으로 2,000만을 코 앞에 두고 있었고 1804년에는 2,500만의 인구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또 이미 에도 시대에 서양 의학이 널리 받아들여져 기존의 의학을 한방 의학이라 하여 별개로 구분하고 있었지요,
초코 틴틴님은 학식도 있으시니 자급 자족 폐쇄 경제 사회인 조선 아니 고대 경제 사회에서 인구가 의미하는바가 어떤것인지 잘 아시리라 봅니다. 과연 어떠한 의미에서 조선이 일본 보다 경제적으로 군사적으로 우월했다고 단언 지으실수 있으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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