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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게시물ID : movie_50307
    작성자 : 마약밀매상
    추천 : 13
    조회수 : 2061
    IP : 119.196.***.60
    댓글 : 13개
    등록시간 : 2015/11/15 06:56:37
    http://todayhumor.com/?movie_50307 모바일
    [007 스펙터] 뿌리를 찾아 떠나는 순례

    ※ 스포일러가 있을 수 있습니다.


    20151113_052439.jpg

    1회차 스타리움 
    2회차 롯데시네마 2D



    2006년 카지노 로얄에서 시작한 다니엘 크레이그표 007은 기존의 관습을 거부하며 전작들과 사뭇 다른 이미지의 본드를 표방했다. 이런 파격적인 시도는 관객들에게 신선하게 어필했고 기록적인 성공을 거두었다. 스카이폴은 평단의 찬사까지 고루 받으며 007시리즈를 정점에 올리는 눈부신 족적을 남겼다. 그 후로 다니엘 크레이그는 10년간 장기 집권에 들어갔고 그는 제임스 본드 그 자체가 되어버렸다. 이제 제임스 본드라는 캐릭터에서 '샤프함과 능글맞음' 보다 '근육질의 순정마초' 이미지가 먼저 떠오르게 되어버렸으니 말이다. 

    하지만 샘 멘데스 감독을 포함한 오랜 007의 지지자들은 다니엘 크레이그표 007의 성공에 기뻐하면서도 그 이면에 점점 희미해져가는 007시리즈와 본드의 정체성에 혼란을 느꼈던 것으로 보인다. 본드카가 007 시리즈 그 자체를 상징하는 중요한 상징물이라는 점을 고려해볼때, Q가 다 부서져 버린 애스턴 마틴을 바라보며 "핸들만 덜렁 가져오지 말고 온전한 차를 가져오라 했잔아요" 하고 본드에게 투덜대는 도입부는 그런 위기의식을 에둘러 표현한 것 처럼 느껴진다. 내부가 다 부서지고 골조만 남은 본드카는 골조만 남고 전작들의 전통이 모조리 파괴되어버린 다니엘 크레이그의 007시리즈에 대한 우려의 눈길 아닐까.

    그런 의미에서 50주년을 기념한 스카이폴은 007의 정체성 회복을 위한 '예고편' 격이었다. 스카이폴에서 몇몇 관습의 부활을 시도하긴 했지만 액션 연출이나 본드 캐릭터의 기본 골조는 기존의 다니엘 크레이그 방식에서 한치도 변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스펙터는 007의 정통성을 온전히 계승한 '올드 007' 의 부활인 셈이다. 이런 의도는 건배럴 씬에서도 추측해볼 수 있다. 


    Casino.Royale.2006.1080p.BRrip.x264.YIFY.mp4_20151114_210432.694.jpg
    (카지노 로얄의 건배럴 장면)

    카지노 로얄의 건배럴은 전작들과는 확연히 다른 음악과 화면으로 구성되어 있다. 본드 캐릭터와 액션 연출 또한 건배럴과 마찬가지로 파격적이었다. 이어지는 퀀텀 오브 솔러스와 스카이폴에서는 오프닝이 아니라 엔딩에 건배럴을 배치하며 기존의 관습에 변주를 가했다. 하지만 스펙터에 이르러서야 마침내 007 시리즈의 전통을 오롯이 이어 받은 친숙한 화면과 음악으로 오프닝을 열고 있다. 이번 스펙터의 건배럴이야 말로 '올드 007 부활' 의 서막을 알리는 가장 적절한 신호탄인 것이다. 




    111.jpg


    스펙터는 멕시코 축제 씬에서 '죽은자들이 되살아 나다The dead are alive' 라는 선언과 함께 이 영화의 방향성을 보다 직접적으로 암시하고 있다. 전작 스카이폴을 지배하는 이미지가 '추락' 이었다면 스펙터의 테마는 '죽음과 부활' 이다. 이 죽음과 부활의 코드는 '해골' 이라는 이미지로 대변되고 이 해골은 스펙터를 상징하는 '문어'로 확장되어 간다. 샘 스미스가 부른 테마송에서 남녀를 휘감고 있는 문어가 해골로 바뀌는듯한 착시현상이 일어나며 그 해골이 다시 파편화된 블로펠드의 눈동자로 옮아갔던 이미지를 떠올려보자. 이것은 미시적으로는 맥이 끊겼던 스펙터라는 범죄 집단의 부활을 의미함과 동시에 거시적으로는 파괴되어 버린 007 시리즈의 유서 깊은 전통들을 되살리려는 시도로 받아들이기에 무리가 없다. 단순한 과거로의 회귀가 아니다. 이 영화는 점점 약해져가는 007의 정체성을 재정립하기 위해 떠나는 제임스 본드의 순례인 셈이다.

    스카이폴 저택에서 발견된 불에 탄 사진과 후견인 증명서는 뿌리를 찾아 떠나는 여행의 기차표다. 새하얀 설원의 병원과 라메리칸 호텔을 지나 그 기차가 도착한 곳은 국가나 지명조차 불분명한 사막의 한 공간이다. 다 쓰러져 가는 오두막 외에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이곳은 현실세계가 아닌 가상의 공간 같은 느낌을 준다. 기약 없이 기다리는 본드 일행 앞에 뜬금 없이 나타난 것은 1948년형 롤스로이스다. 이 올드카는 이 순례가 공간적 여행이 아니라 시간 여행임을 암시하고 있다. 본드와 마들렌이 도착한 방에 그들의 아버지와 찍은 어린시절 사진이 각각 걸려 있다는 점이 과거로의 여행이라는 의미를 더욱 증폭시킨다.

    대단히 흥미로운 점은 이 영화가 007시리즈의 정체성을 되짚어 보기 위해 제임스 본드의 가족사를 교묘히 연관시키고 있다는 점이다. 샘 멘데스는 스카이폴에서 본드의 어린시절을 억압하고 있던 스카이폴 저택과 M을 엄마로서 동치시킨 전례가 있다. '저택의 비밀통로에 숨어있다가 나오면서 본드는 아이에서 어른이 되었다'는 킨케이드의 대사를 고려해보면 스카이폴의 비밀통로는 어머니의 자궁과 같은 역할을 하고 있다. 둘다 고아로 자란 본드와 실바가 스카이폴에서 싸운 것은 어머니 M의 적자임을 확인 받기 위한 싸움이었던 셈이다. 그렇게 본드는 실바와의 대결을 통해 트라우마적 공간인 스카이폴 저택을 폭파하고 고아시절의 아픈 기억을 극복하면서 모계혈통에 관한 가족사를 정리했다.      

    샘 멘데스는 블로펠드와 본드가 만나는 장면에서 여우처럼 의뭉스러운 상징물을 다시 등장시킨다. 그것은 바로 운석이다. 재미있는 것은 이 운석이 교묘하게 Skyfall(낙하물)을 연상시키고 있다는 점이다. 이 장면에서 007시리즈와 본드의 어두운 가족사를 다시 한번 엮어 보려는 감독의 의도를 조심스레 읽어 볼 수 있다. 본드의 후견인이었던 오버하우저. 그의 친아들 블로펠드 앞에 양아들 본드를 등장시키며 부계적통 자리를 두고 겨루는 구도를 조성한다. 본드의 입장에서는 아버지를 살해한 블로펠드에게 정당한 복수를 해야 하고 블로펠드는 양아들을 제거함으로써 상처 입은 적통 승계권자로서의 지위를 공고히 하고 싶은 입장이다. 즉, 이 영화는 007스펙터에서 벌어지는 싸움이 패륜아 블로펠드에 대항하는 정당한 아들로서의 정통성 회복을 위한 싸움인 동시에 다니엘 크레이그표 007에 대항하는 올드 007시리즈의 싸움임을 다시 한번 천명하고 있는 것이다.

    블로펠드는 본드를 구속하고 전기 드릴로 위협한다. 재미있는 것은 블로펠드가 본드를 즉시 죽이지 않고 예전 기억을 삭제하려 한다는 점이다. 이 싸움이 아들로서의 정통성 회복과 007의 정체성 회복이 교묘히 엮인 싸움이라는 점을 주지해보면, 블로펠드가 드릴로 본드의 기억을 삭제하려는 것은 이복 동생의 제거임과 동시에 과거로 부터 기억되어 왔던 007 시리즈의 오랜 전통을 파괴하려는 시도인 것이다. 즉, 스펙터의 세계관 내에서 '악 = 정통성을 어지럽히는자, 선 = 정통성을 이어 받으려는자' 라는 등식 비슷한 관계가 성립하게 된다. 007 스펙터에서 왜 샘 멘데스가 기존의 다니엘 크레이그식 캐릭터와 액션을 거부하고 집착적으로 예전 007시리즈의 오마주를 시도하는지 추측해 볼 수 있는 부분이다. 

    구속된 본드의 의식 상태는 뿌옇게 흐려진 화면으로 표현되고 있다. 이런 상태는 위에서 언급한 '죽음과 부활'의 코드와도 관련이 깊다. 유리창에 기어다니는 도마뱀의 형상이나 흐릿한 고양이의 영상은 기차에서 내렸을 때부터 이어져 온 것처럼 이 공간이 현실세계의 공간이 아니라 본드의 무의식 속에서 벌어지는 사건이라는 의심을 증폭시킨다. 엑스레이 화면 속의 '해골' 이 죽음과 유사한 상태를 의미한다는 점을 상기하자. 드릴 고문이 007의 정통성을 훼손하기 위해 본드의 무의식 세계에서 이루어지는 심정적, 상징적 행위라고 가정해보면 많은 관람객들이 '본드는 드릴에 측두엽을 두번이나 찔렸음에도 어째서 멀쩡한가' 하고 제기한 의문도 설명이 가능해진다. 드릴에 찔린 본드에게 마들렌이 사랑을 고백한 후 그가 부활하지 않았던가. 마들렌의 직업이 무의식의 상처를 치료하는 '정신과 의사' 라는데 주목해보면 답은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다. 게다가 본드를 죽음의 상태에서 깨우는 것이 하필 무의식을 깨우는 '알람 시계' 폭탄이라는 점도 좋은 증거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샘 멘데스 감독은 일련의 싸움을 마치 신화속 영웅들이 극복해야 했던 고행처럼 묘사하고 있다. 눈 덮힌 설원을 헤치고 메마른 사막을 지나 거구의 괴물과 싸워야 했던 모험 말이다. 본드는 그들 중에서 그리스 신화의 테세우스와 닮은 점이 많다. 아버지가 없이 컸던 테세우스는 아버지가 숨겨둔 신표를 발견하고 자신의 뿌리를 찾기 위해 떠났다. 모험 중에 미궁 속의 괴물 미노타우르스와 싸우게 된 부분은 아주 유명하다. 미궁 같은 MI6 건물에서 붉은 화살표를 따라 괴물 블로펠드를 찾아가는 제임스 본드는 테세우스다. 본드걸 마들렌은 실타래를 풀어 캄캄한 미궁 속을 인도하는 아리아드네 공주다. 마들렌의 몸을 칭칭 감고 있던 폭탄의 뇌관, 그것이 아드리아네의 실타래의 상징이 아니고 무엇일까. 그 실의 끝에는 방탄유리를 사이에 두고 거울처럼 마주보고 있는 괴물 블로펠드와 영웅 제임스 본드가 있다. 정체성을 어지럽히는자와 정체성을 지키려는자. 이 싸움은 결국 자기 스스로와의 싸움과 다르지 않은 것이다. 

    333.jpg

    복잡한 가족사, 악당들과의 악연, 본드걸과의 애틋한 사랑. 본드는 폭풍 속에서 춤추는 연처럼 질긴 인연의 실로 그들과 연결되어 있다. 샘 멘데스는 무려 4편에 걸친 본드의 모험을 스펙터라는 길고 튼튼한 문어발로 옭아 매고 있는 셈이다. 스펙터는 다소 거친 바느질 탓에 박한 평가를 받으며 커리어를 시작하고 있다. 하지만 시간이 좀 지난 후에는 반드시 위상에 걸맞는 재평가가 이루어지리라 단언한다. 골조 뿐만아니라 내부까지 깔끔히 수리된 클래식 본드카를 타고 있는 본드 커플. 옅은 미소와 함께 유유히 화면 저쪽으로 사라지는 그들을 흐뭇하게 바라본 한 관객으로서, 샘 멘데스의 정통성을 향한 굵은 한땀이 또 한번의 50년을 이어갈 007시리즈의 초석이 되길 기대해본다. 

    '죽은자들이 되살아 났다 The dead are aliv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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