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월호가 침몰한 날이랑 타이타닉호가 침몰한 날이랑 딱 하루 차이나는데 104년전 타이타닉호에서도 여러 선원들과 승객들이 영웅정신, 희생정신을 보였듯이 2년전 세월호에도 이런 사람들이 많이 보였습니다.
기억합시다...
세월호 (일부) 선원들의 직업정신
세 월호 선장은 가장 첫번째로 도망나오고 이 때문에 항해사들과 기관사들이 뒤따라나와 대부분이 학생들인 승객들을 죽음으로 몰아놓았고 (타이타닉처럼 끝까지 남는 것도 아니고 첫번째로..), 정부와 해경은 느릿느릿하게 구조작업을 진행했습니다. 하지만 이런 영웅들도 있었다는걸 기억해야 합니다.
승무원 박지영씨는 2011년 수원과학대학교 산업경영학에 입학했지만 아버지가 암으로 세상을 떠나면서 가족의 생계를 책임지기 위해서 휴학을 해야만 했습니다. 휴학후 청해진해운에 입사해서 승무원으로 일을하면서 이후 다시 복학하려고 했지만 2014년 4월16일 세월호 침몰사고로 인해서 안타깝게 생을 마감했습니다. 선장을 비롯한 여러 선원들이 빠져나갈때 박지영씨만큼은 "선원은 마지막에 나간다"며 남아있는 학생들을 한사람이라도 더 살리기 위해서 끝까지 노력했다고 합니다. 3층의 학생들이 구명조끼가 부족하자 4층에서 구명조끼를 구한 뒤 3층 학생들에게 전달했다고 하였고 수영을 못하는 박지영씨는 이미 가슴까지 물이 차오른 상태에서도 마지막까지 승객을 구조했다고 알려져 더욱 안타까웠습니다. 왜 구명조끼를 안 입냐고 하자 "누난 너희들 다 탈출하고 나갈거야" 라고 말했지만 끝내 탈출하지 못했습니다. 외신에서도 이를 보도했습니다.
양대홍씨는 세월호의 사무장이었습니다. 그는 4년전에 청해진해운에 입사했으며 그전에는 선원으로 일하다가 청해진해운에서는 사무장으로 진급을 했다고 합니다. 양대홍씨의 형은 그가 책임감이 굉장히 강한 사람이라고 소개해 주었습니다. 사건당일 배가 많이 기울어져 있는 상태에서 양대홍씨는 아내 안소현씨에게 전화를 걸었습니다. "배가 많이 기울어져 있다. 통장에 돈 있으니까 그걸로 아이들 등록금 해라" 아내가 다시 상황을 묻자 "길게 통화 못해. 지금 아이들을 구하러 갈거야." 라고 했다고 합니다. 아내는 남편 양대홍씨는 배에서 탈출할 생각이 없었던것 같다고 전했으며 남편은 도망치지 않았다고 전했습니다. 양대홍사무장은 채널A 관찰카메라 24시에 출연했을 당시에도 성실한 사무장의 모습으로 화면에 잡혔습니다.
정현선씨와 김기웅씨는 4년전부터 사귀어온 사이로 올해 9월의 결혼을 약속하고 각각 승무원과 아르바이트로 세월호에서 일을 하고 있었다고 합니다. 정현선씨는 6년전부터 세월호에서 서비스업무를 맡아왔고 김기웅씨는 7년전부터 청해진해운 소속으로 불꽃놀이 이벤트를 해왔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원래 김기웅씨는 세월호가 아닌 오하나마호라는 여객선에서 일을 했지만 예비신부인 정현선씨가 "심심한데 같이 타면 좋겠다"고 권유해서 이번에 세월호에 승선 했다고 합니다. 김기웅씨는 3층 로비에서 자고 있던 동료 3명을 깨우고 선내로 들어가 정현선씨와 사건당일 많은 승객들을 대피시키고 구했지만 정작 두 사람 다 빠져나오지 못했습니다.
세월호 승객들의 희생정신과 우정
최혜정 교사는 동국대에서 역사와 영어를 복수 전공했으며 재학중의 임용고시를 통과했다고 합니다. 또한 사범대 수석졸업 한 뒤 단원고가 첫 부임지 였다고 합니다. 사건 당일 기상때문에 출발이 늦어진다고 가족에게 카톡을 보냈지만 가족들은 그것이 그녀의 마지막 메세지였다고 전했습니다. 담임으로 맡았던 첫제자들을 두고 떠날 수가 없어서 SNS로 '걱정하지마, 너희부터 구하고 나갈께'라고 보낸 뒤 10여 명의 학생들을 구출해 냈지만 본인은 끝내 세월호에서 탈출하지 못하고 시신으로 발견되었습니다.
남윤철 교사는 어려서부터 불의를 참지 못하고 자신이 맘먹은 일은 꼭 이룰 만큼 의지가 강했던 인물이라고 합니다. 강직한 성격이여서 학생들을 두고 도저히 혼자 빠져나올 수 없었을거라고 친척분이 전했습니다. 사고 당시 남윤철교사는 선실에 끝까지 남아 학생들에게 구명조끼를 던져주면서 비상구로 인도했다고 합니다. 그러면서 더 많은 학생들을 구하기 위해서 선실로 내려갔고 생존한 학생들은 선실로 내려간 모습이 선생님의 마지막이였다고 말했습니다.
정차웅 군은 검도 3단의 유단자로 체육학도 꿈을 키웠던 정 군은 키 180㎝를 넘는 듬직한 체구를 지니고 있었습니다. 본인은 구명조끼를 입고있었고 탈출할 수 있었던 상황이지만 삶과 죽음을 오가는 순간에 친구에게 구명조끼를 주고 또 다른 친구들을 구하기 위해 물속으로 몸을 던졌고 생존하지 못했습니다. 유족들은 최하 등급의 품목을 선택해 장례식을 간소하게 치뤘고 합니다. 2인조 프로젝트 그룹 플레이트는 5일 본지와 통화에서 뒤늦게 짝사랑을 고백한 여학생의 안타까운 사연을 담아 ‘말야…’라는 제목의 노래를 만들었습니다.
최덕하 군은 세월호에서 최초로 구명요청을 보낸 승객입니다. 최 군은 세월호 4층 객실에 있다가 배가 기울자 복도로 뛰쳐나왔습니다. 담임선생님인 남윤철 씨도 복도에 있었는데 당황한 학생들이 복도에서 어쩔 줄 몰라 했습니다. 남윤철선생님은 흔들리는 배 안에서 한 손으로 난간을 쥔 채 중심을 잡으며 학생들에게 구명조끼를 던졌다. 최 군은 떨리는 손으로 휴대전화를 켜고 119를 누르고 살려달라는 전화를 보냈습니다. 세월호가 제주 해상교통관제센터(VTS)에 보낸 첫 신고보다 3분 앞선 시각이었습니다. 급한 마음에 최 군은 “타고 가는 배가요. 타고 가는 배가!”라고 소리를 질렀다. 전남소방본부 119상황실에서 “선생님을 바꿔 달라”고 하자 최 군은 남 선생에게 전화를 건넸고 남선생은 “여기 배가 침몰했어요”라고 다급하게 말하고 휴대전화를 최 군에게 돌려준 뒤 급하게 발걸음을 옮겼습니다. 최군은 끝내 빠져나오지 못하고 죽었습니다. 최군이 아니었더라면 해경은 더 늦게 도착했을테고 사망자는 더 늘어났을 겁니다.
박호진 군은 구조헬기가 도착한 뒤에도 남아서 20여명의 학생들을 구했다고 하는데요. 주변의 여학생들을 일일히 대피시키고 나서야 본인도 구조선에 올랐다고 합니다. 또 사고 당시 동영상에서는 자신보다 울고있는 6살짜리 권지연양부 터 챙기는 놀라운 모습을 보여주었는데요. 권지연양의 오빠와 부모님은 끝내 세월호에서 빠져나오지 못했습니다. 권지연양의 가족은 제주도로 이사를 가는 상황이였으며 다문화 가정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발견당시에 권지연양은 물에 흠뻑젖어 있는상태였고 배에서 탈출하면서도 "받아요! 아기요.아기!" 라고 외치며 권양을 챙기는 모습이 마음을 짠하게 만들었습니다.
화물차 운전기사 김동수씨는 사건 당시에는 알려져 있지 않았지만 김홍경씨와 함께 10명정도의 승객들을 구출하는 모습이 동영상에 찍혀 '파란 바지의 구조 영웅'이라고 불리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인터뷰에서는 아들딸같은 아이들을 더 구하지 못했다고 애통해하시는것이 나왔고 이후 정부에게서 제대로 보상받지도 못한 채 사건 당시의 트라우마에 시달리며 자살시도까지 하셨다고 합니다.
그 외
민간 잠수사 이광욱 씨는 그동한 아버지의 일을 따라 30년이 넘도록 잠수부 일을 했습니다. 이 씨는 5월 4일 현장에 도착해 6일 오전 6시 5분쯤 민·관·군 합동구조팀이 수중 수색을 재개한 직후 민간잠수사 이 모씨가 작업 중 의식을 잃고 쓰러져 헬기로 목포의 한 병원으로 이송됐으나 숨졌고 사인은 기뇌증이었습니다. 당일 첫 잠수에 나섰다가 변을 당한 이씨는 잠수사들의 피로누적을 감안해 언딘에 의해 고용돼 추가투입된 민간잠수사 13명 가운데 1명이었습니다. 전날 현장에 처음으로 투입된 이씨는 날씨가 좋지 못해 잠수하지 못했다가 이날 오전 첫 잠수 도중 사고를 당했습니다. 검찰은 해경에게 책임을 묻기는 커녕 애꿎은 민간 감독관만 기소했습니다.
단원고의 재학중인 3학년 김민혁군은 본인이 단원고의 재학중임을 밝히면서 트위터(SNS)를 통해서 실종자와 생존자 등을 실시간으로 알려주었습니다. 비록 배에 타고있지는 않았지만 실시간으로 모든 사람들에게 후배들의 상황에 대해 알려주면서 아무도 안하는 일을 하며 고생했으니 영웅이라고 불릴 만합니다. SKT는 김민혁군이 하루종일 SNS에 상황을 중계하느라 데이터가 다 소진되자 김민혁군에게 돈을 추가로 받지않고 데이터무제한요금제로 변경해주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