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망갈 곳 없는 엘리베이터 안. 초등학교 5학년 A군은 끔찍한 30초를 견뎌야만 했습니다. 5월 봄날이었습니다. A군은 엄마와 인사하고 집을 나섰습니다. 학교에 가려고 탄 엘리베이터엔 중학생 B군이 이미 타고 있었습니다. A군이 타자 B군은 기다리기라도 한 듯 자연스럽게 어깨동무를 했습니다. 그리고는 “재밌는 거 보여줄까”라며 가방에서 30cm 길이의 칼을 꺼냈습니다. A군은 어리둥절했습니다. 그러다 칼이 턱밑까지 밀려 들어오자 몸이 굳었습니다. 너무 긴장했던 탓에 A군은 당시 상황을 잘 기억하지 못했습니다. 다만 한 마디는 기억난다고 합니다. “이거 찌르면 쑥 들어간다”는 중학생 B군의 말입니다. 내려가는 30여초 동안 B군은 A군 주위로 칼을 이리저리 휘둘렀습니다.
가해 학생 B군 학교에선 학교폭력대책자치위원회가 열렸습니다. 학폭위는 학교 차원에서 자치적으로 사태를 파악하고 대책을 내놓는 자리입니다. 이 중학교 학폭위는 대책을 내놓기 위해 사태를 파악할 때 다섯 가지 기준을 적용합니다. 고의성, 지속성, 심각성, 반성 정도, 화해 정도 입니다. 각 기준에 0점부터 4점까지 점수를 부여한 뒤, 점수가 높을수록 더 강도 높은 처분이 따르게 됩니다. 최소 서면사과에서 최대 강제전학까지 처분을 내릴 수 있습니다.
‘고의성 낮음(1점), 지속성 없음(0점), 심각성 높음(3점), 반성 정도 높음(1점), 화해 정도 없음(4점).’ 주어진 기준에 따라 처분을 내린 이 학교 학폭위 결과 보고 내용입니다. 가장 심각한 학교 폭력에 대해 20점을 부여하는 학교폭력위원회가 가해 학생 B군에 매긴 점수는 9점. B군은 교내 봉사 5일과 학부모 교육 5시간 처분을 받았습니다. 이런 처분을 내린 학폭위 위원들의 평가 근거는 더욱 납득하기 어렵습니다.
“호기심 많은 학생으로 고의성은 없어 보입니다. 고의성은 0점으로 하면 좋겠습니다.” “가해 학생이 많이 반성하고 있는 것 같으니 반성정도 높음(1점)으로 주면 좋겠습니다.” “심각해 보이니 심각성은 3점으로 하면 좋겠습니다.” 위원들의 의견을 종합해보면 심각해 보이긴 해도 호기심에 그런 일이고 많이 반성하고 있다는, 가해 학생에 치우친 결론입니다.
학폭위 위원들의 면면을 들여다 봅니다. 9명 중 3명은 가해 학생 학교의 선생님, 5명은 가해 학생 학교의 학부모입니다. 외부인사는 경찰관 1명 뿐입니다. 피해 아동 A군의 입장을 제대로 대변해줄 사람이 없습니다. 하지만 위원 구성에 절차상 문제는 없다는 게 학교측 입장입니다. 학교 측 책임자는 기자에게 이런 말도 했습니다. “장난이었는데 학폭위에까지 불려와야 하는 상황에 대해 가해 학생 측이 부당성을 제기했다”고 합니다. 이 상황을 ‘장난’으로 받아들이고 있는 게 가해 학생 학교 관계자들의 합의된 의견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