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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게시물ID : humorbest_497037
    작성자 : 마늘먹은닭
    추천 : 28
    조회수 : 10075
    IP : 1.177.***.211
    댓글 : 9개
    베스트 등록시간 : 2012/07/17 11:53:31
    원글작성시간 : 2012/07/16 22:21:01
    http://todayhumor.com/?humorbest_497037 모바일
    중국 식인문화의 발생배경

    예전에 소위 ‘중국집’이라고 하는 중화요리집 음식 맛이 좋으면 그 집은 인육을 쓴다는 말이 공공연히 나돈 적이 있었다. 현대문명의 시대에 그런 일이 가능하냐고 비웃는 사람들이 있을지 모르나 실제로 중국인들은 인육을 먹는 풍습을 가지고 있었고 더 나아가 그것을 하나의 문화로 승화(?)시켰다. 흔히 중국문화라고 하면 찬란하고 호화로운 선진이미지를 떠올리기 쉬운데 그 내면에는 식인풍습의 어두운 일면이 존재하고 있음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극심한 기근으로 인해 또는 원수에 대한 복수로서의 식인행위는 다른 나라, 문명권에도 많이 발생한다. 한 예로 임진왜란 당시 권율장군과 정기룡 장군은 왜군의 생간을 내어 씹어 먹은 것으로 유명하다. 하지만 중국의 식인풍습은 그 시초가 이런 경우와는 확연히 다른 부분이 존재하며 또한 중국인들의 사고전반을 지배하는 원리로 작용하고 있다는 점을 주목해야 할 것이다. 중국인을 이해하고 원만히 대처하기 위해서는 그들의 식인풍습에 관심을 가지고 접근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1) 정치사에 얽힌 중국 식인풍습의 사례

    식인풍습은 중국 4천년 역사에 면면히 이어져 내려왔다. 한나라가 건국된 기원전 206년부터 청나라가 멸망한 1912년까지, 식인의 기록은 220차례나 정사(正史)에 등장하고 있다. 구전으로 전해오는 것이긴 하지만 최초의 식인 이야기는 중국의 전설적인 왕조인 하나라를 배경으로 한다. 아들을 죽인 원수를 육장(肉醬)으로 만들어 원수의 아들에게 먹기를 강요한 여인의 이야기다.

    사마천의 사기, 즉 정사에 최초로 기록된 식인사례는 중국왕조사의 대표적 폭군인 은(殷)의 주(紂)왕 이야기다. 그는 대신인 구후의 딸이 절세미인이란 말을 듣고 아내로 삼았는데 그 아내가 너무 정숙해 자신의 성적인 취향에 맞지 않자 격노해 그녀를 살해하고 그녀의 아버지 구후를 해(인육을 소금에 절인 육젓)로 만들어 먹어버린다. 신하인 곽후가 이를 강력히 말리자 주왕은 곽후 또한 포(脯:찢어 말린고기)로 만들어 먹어버린다.

    그 외에도 주왕은 자신에게 간하는 신하 익후를 자(炙:불고기)로 만들어 먹어버리는가 하면 (해, 포, 자는 이후 중국 춘추전국시대까지 인육 조리법의 대표격으로 계속 등장한다) 신하인 황비호의 아내 경씨를 희롱하다 거절 당하자 그녀를 해로 만들어 남편인 황비호에게 하사하고 먹게 하는 끔찍한 짓까지 저지른다. (후에 황비호는 격노해 군사를 일으켜 주왕을 제거하게 된다)

    비교적 잘 알려진 일화로 춘추시대 노나라 사람인 공자의 경우가 있다. 공자는 ‘해(윗글에서 언급)’를 무척 즐겨 이것 없이는 식사를 하지 않았을 정도였다. (중국의 고전서인 예기, 동주열국지, 논어등에 언급) 그러나 그의 수제자 자로가 위나라의 신하로 있다가 왕위다툼에 휘말려 살해된 후 그 시체가 잘게 토막나 해로 만들어져 공자 자신의 밥상에 올라온 것을 보고 큰 충격을 받아 이후 그는 그렇게 좋아하던 해를 먹지 않았다고 한다.

    중국은 고대 이전부터 강력한 왕권을 중심으로 한 정치체제를 가지고 있었는데 이것을 유지하기 위해 엄격한 법령들을 만들었다. 이 법령에는 ‘일벌백계’의 효과를 위해 끔찍하고 잔혹한 형벌들이 포함되어 있었다. 이중 ‘살육의 형’이 규정되어 있는데 이것은 다름아닌 ‘식인의 형’으로서 정식으로는 주나라 시기의 율령부터 등장하지만 전 왕조인 은나라 때에 이미 죄수의 살점을 도려내 다른 죄수에게 먹이는 형벌이 존재했다. 황제의 권위에 도전하는 자에게 내리는 벌로서 식인형은 중국역사에 면면히 이어졌다.

    한고조 유방은 팽월을 죽인 후 간장에 절여 신하들에게 나누어 주었고 수 양제는 자신에게 거역하는 신하를 삶은 뒤 그 국을 문무백관에게 내려 마시게 했다는 기록이 있다. 자치통감 '당기'편에 보면 측천무후 집권시기에 탐관오리였던 내준신이 식인형을 당했는데 군중들(내준신에게 처형당한 이들의 가족들)이 다투어 내준신의 고기를 산채로 잘라 먹어 눈 깜짝할 사이에 동이 났다.

    눈알을 도려내고 안면의 가죽을 벗겼으며 배를 찢고 심장을 끌어내니 마침내 진흙 같은 찌꺼기만 남았다고 전해진다. 명대의 명장 원숭환 장군은 청나라의 계략으로 처형당했는데 군중들이 몰려 와 그의 살점을 발라가는 바람에 뒤늦게 시신을 수습하러 온 이들은 뼈밖에 수거할 수 없었다고 한다.

    (2) 일상사에 얽힌 중국 식인풍습의 사례

    당나라 시대 이후로 식인풍습은 더 이상 이야깃거리도 되지 못할 만큼 흔한 일이 되어버렸다. 중국인 일상에 깊이 뿌리박힌 대중문화(?)의 일부로 자리잡은 것이다.

    중국인들 사이에서 널리 읽힌 대중적인 소설들 -삼국지, 수호지, 서유기 등-은 그들 특유의 식인풍습을 상세하게 표현하고 있다. 삼국지연의에서는 싸움에 지고 도망가는 유비에게 자신의 아내를 죽여 그 엉덩이살로 음식을 만들어 바친 자의 얘기, (진수의 정사 삼국지에서도 유비가 즐겨먹은 음식이 인육으로 만든 포였다는 기록이 있다) 여포가 잡혀 죽은 후 그 고기를 죄인들이 먹었다는 얘기 등이 나온다.

    특히 수호지는 중국의 일상 식인풍습을 아주 적나라하게 묘사하고 있다. "... 숨어 있다가 부자가 지나가면 뛰쳐나와 금품을 빼앗고 그 살은 고기로 먹고 기름은 등불을 밝히는 데 씁니다. 뚱뚱한 자는 쇠고기 대용으로, 마른 자는 만두소로 만들지요.

    " 이것은 ‘한지홀률’의 별호를 가진 ‘주귀’란 자가 양산박 법도를 설명하는 부분에 나오는 것으로 소위 의적이라는 양산박 무리들은 사실은 사람을 죽여 재물을 빼앗고 그 고기를 먹는 극악무도한 악인들이었던 것이다.

    주인공 송강의 아우인 ‘흑선풍’ 이규는 사람을 죽이고 난 후 그 인육을 먹곤 했는데 너무 많이 인육을 먹어서인지 눈알이 항상 붉게 충혈되었다고 한다. 무송이 유배가는 과정에서는 지나가는 여행객들을 죽여 그 고기로 만두를 만들어 파는 끔찍한 주점이 나온다. (이런 곳을 ‘흑점’이라고 한다.)

    ‘동양이 서양보다 우수한 99가지 이유’ 라는 책에 이런 고사가 나온다. 나이든 시부모를 모시고 사는 며느리가 살았는데, 때마침 흉년이 들어 사람들이 서로 다른 사람들을 잡아먹곤 했다. 며느리는 시부모가 자신을 잡아먹을 거라는 말을 듣고, 놀라 친정으로 도망을 친다. 친정 아버지는 "누구 딸을 마음대로 잡아먹어!" 라고 분개했지만 후에 그 딸을 잡아먹은 건 친정 아버지였다.

    과거 중국의 미식가(美食家)들은 식도락을 추구하기 위해 사람고기를 상육(想肉)이라고 해 즐겨 먹었다. 원나라의 도종의가 지은 ‘철경록(輟耕錄)’이나 송나라 장작이 지은 ‘계륵편’에는 사람고기를 요리하는 방법이 상세히 나와 있기까지 하다. 후대로 갈수록 맛으로 인육을 먹는 습관은 대다수 민중들에게까지 널리 퍼져 인육을 장에서 공공연히 사고 팔며 아무 거리낌 없이 그 맛을 즐기게 되었다. ‘신용문객잔’으로 대표되는 흑점이 존재했던 것이 사실인 것이다.

    중국 식인풍습의 절정은 당나라 시기로, 당시 세계인 대제국으로 성장한 당나라는 고급 귀족문화가 크게 발달했으며 끊임없는 귀족들의 특미(特味)추구를 만족시키기 위해 본격적으로 인육을 요리재료로 쓰기 시작했다. 이 때의 인육애호가가 열전(列傳)에 기록되기도 했는데, ‘철경록(輟耕錄)’에는 친구를 젓갈로 만들어 먹은 설진, 자기의 첩을 삶아 먹은 고찬의 이야기들이 나온다. ‘조야첨재’ 에도 병중에 자기 노비의 고기를 먹은 독고장 등이 나오는데 모두 이 무렵의 인물들이었다.

    당나라 시기 이전에는 인육이 암시장에서 몰래 유통되다가 이때에 이르러 전국 각지에 상육(인육)을 판매하는 시장이 생겨 공개적으로 거래를 하게 되었다. (양주(楊州)와 봉상(鳳翔)은 당나라의 대표적인 상설 인육시장이 있던 곳이다) 인육은 납치, 인신매매 등으로 공급이 되었으며 또 중죄수들을 인육으로 만들곤 했는데, 억울하게 인육이 된 사람이 상당히 많았다고 한다.

    여자의 경우 외모가 아름다우면 기방 등으로 팔려가지만, 얼굴이 변변치 못하고 일을 할 만큼 튼실하지도 못하면 인육이 되곤 했다. 측천무후 때는 식인 문화의 극성기로 보통 인육은 두 발 달린 양고기라 불렸으며 인육이 너무 많이 유통되어 다른 고기값을 폭락시킬 정도였다. (쌀값보다 싸고 개고기의 1/5 정도였다고 한다)

    상설 인육시장은 이후에도 꾸준히 명맥을 이어 송나라 때의 항주(杭州)와 변경(?京), 명나라 때의 개봉(開封)과 중경(重京), 청나라 때의 안경(安京) 등에 개설되었다. 청나라 말기에는 말레이계 사람의 인육을 수입하여 대나무 바구니에 담아서 이러한 인육시장에서 판매하였고, 한족들은 이것을 보약(補藥)으로 먹었다고 한다.

    이러한 인육판매에 대해 형식적이나마 송나라때 금지법이 만들어지기도 했지만 실효를 거두지는 못했다. 심지어 외국에서도 중국인들이 모여 사는 곳에서는 인육이 판매되곤 했는데 1919년에는 식량 부족이 심했던 러시아의 수도에서 중국인들이 인육 장사를 하다가 총살되었다는 기록도 있다.

    인육은 어느 시대에나 싼 고기로 취급되었는데, 명나라 때 사천(四川)지방에서는 인육이 남자일 경우 한 근에 7전, 여자는 8전에 거래되었다. 그러나 이 가격은 다른 고기들과 비교했을 때 형편없는 것이었다. 1백여 년 전 청나라 때의 정치가 증국번의 일기에는 1860년 강소지방의 상육은 한 근에 90전이었는데 태평천국의 난 때 인플레가 심해서 130전까지 가격이 폭등하기도 했으며 1900년대 초 군벌시대에는 상육이 90전에 거래되었다는 기록도 있다.

    중국을 방문한 외국인들은 중국의 식인풍습을 목격하고 기록으로 남기곤 했는데 중국문명의 찬미자로 불리는 마티니(Martin Martini : 1614~1661)의 견문록에도 이러한 식인풍습에 대한 목격담이 나타나 있다. 마르코 폴로 또한 ‘동방견문록’ 에서 자신이 직접 목격한 복주(福州)의 식인 풍습을 상세히 기록하고 있다.

    ‘...이 지방에서 특별히 기록할 만한 것은 주민들이 그 어떤 불결한 것이라도 가리지 않고 먹는다는 사실이었다. 사람의 고기라도 병으로 죽은 것만 아니면 아무렇지 않게 먹는다. 횡사한 사람의 고기라면 무엇이건 즐겁고 맛있게 먹는다. 병사들은 잔인하기 짝이 없다.

    그들은 머리 앞부분을 깎고 얼굴에 파란 표식을 하고 다니면서 창칼로 닥치는 대로 사람들을 죽인 뒤, 제일 먼저 피를 빨아먹고 그 다음 인육을 먹는다. 이들은 틈만 나면 사람들을 죽여 그 피와 고기를 먹을 기회를 엿보고 있다...’

    노신은 그의 작품 ‘광인일기(狂人日記)’ 에 식인의 피해망상증에 걸린 광인을 주인공으로 등장시켜 식인 풍습이 만연한 사회상을 폭로했다. 광인일기에 나타나는 주인공의 과대망상증은 정신병자를 묘사한 것이 아니라 중국에서의 실제상황을 비유적으로 묘사한 것이다.

    노신은 그의 또 다른 작품인 ‘아Q정전(아Q正傳)’ 에서 다룬 노예근성과 함께 이 식인 풍습을 중국의 ‘2대악’으로 규정, 근절시키려고 노력했는데 당시 중국의 식인풍습 문제가 얼마나 심각했는가를 짐작할 수 있다.

    (3) 중국의 식인풍습과 유교의 상관관계

    중국의 유명한 사상가 노신(魯迅)은 식인 풍습과 연관지어 국가를 ‘사람이 사람을 먹는 역사사회’라고 정의했다. 그는 국가에 의해 구축된 폭력기관이 광대한 대중을 우리에 가두고 수탈의 대상으로 삼았으며 그 우리 속에 갇힌 극빈한 군중들은 서로가 서로를 잡아먹는 작용을 통해 인구와 식량의 자동제어를 하고 자생 자멸해간 결과를 이루어냈다고 역설하면서 유교의 원리가 바로 이러한 국가체계를 탄생, 유지시킨 핵심이라는 것을 강조했다.

    중국 5·4운동의 사상적 지도자 오우(吳虞)는 직설적으로 ‘유교의 사상이 식인풍습의 기반을 이루었다’고 주장하면서 강력히 유교를 비판했으며 이후 중국공산당에서도 유교의 폐해 중 하나가 식인풍습을 조장한 것임을 밝혔다.

    충효, 인의를 강조한다는 유교는 ‘복수주의’를 인정할 뿐 아니라 오히려 장려를 했다. ‘부모의 원수와는 같은 하늘 아래 살 수 없다(不俱戴天)’ 는 생각으로 심하면 부친의 원수를 29대까지 갚기도 했는데 그것을 효라고 본 것이다. 부모의 복수를 하는 자는 지원극통함을 푼다는 의미로 한 칼에 원수의 숨통을 끊지 않고 수천갈래로 난도질을 한 후 그 고기를 먹거나 심장과 간을 꺼내어 씹기까지 했다.

    ‘효’라는 유교 사상의 실행으로서 병으로 죽어가는 부모에게 자신의 넓적다리살 등을 잘라서 봉양하는 일이 흔했다. (인육은 가끔 약용으로도 쓰였다. 이시진의 본초강목(本草綱目)에는 인체 각 부위의 약효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이런 일이 진정한 효행인가 하는 정치적인 논란이 벌어지기도 했는데 당시의 황제들 뜻에 따라 ‘효자’로 표창을 받거나 혹은 신체를 훼손한 ‘불효자’로서 매를 맞은 후 귀양을 가기도 했다.

    ‘충’을 보이기 위한 식인이 자행되기도 했는데, 실례로 춘추전국시대의 유명한 제나라 환공의 일화가 있다. 환공은 유명한 미식가였는데 그가 진미를 찾자 요리사였던 역아(易牙)는 환공의 환심을 사기 위하여 자신의 세 살짜리 아들을 죽여서 요리해 바침으로 환공에 대한 충성심을 보증 받는다. (역아는 후일 권력을 함부로 휘두르는 간신이 된다) 역아뿐 아니라 극한 상황에서 자기 살을 베어내거나 아내, 자식을 잡아 자신의 주군에게 대접하는 경우가 종종 있었고, 흔히 이런 행위는 충으로 기려졌다.

    (4) 중국의 식인풍습이 생겨나게 된 배경

    중국의 식인풍습은 중원을 둘러싸고 벌어진 격한 권력투쟁에 따른 잔혹한 형벌제도의 탄생, 사람을 잡아먹는 형벌이 성문법으로 제정이 된 것, 세계에서도 유래를 찾기 어려운 잦은 기근과 천재지변, 전쟁, 농업기술의 낙후로 인한 식량 부족의 극심함 등 여러 요인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결과가 그 배경이라고 할 수 있다.

    법적허용이 된 데다 잦은 기근과 전란의 영향이 겹쳐 식인풍습은 아무 저항감 없이 중국민중에게 뿌리박히게 되었다. 따라서 정쟁이나 전쟁에서 패한 정적, 적국군병 및 국민은 "잡아먹는 고기"가 되는 것이 너무 당연한 것으로 인식되었다. 상황에 따라서는 자국민들까지 대량 징발해 하루에 수천명씩 ‘군대식량’으로 사용한 것도 중국역사를 살펴보면 보기 드문 일이 아니었다.

    한 예로 당나라 말 혼란기의 처참함은 극을 이뤄, ‘황소의 난’이 일어났을 때 군대행렬에는 인육을 가공하는 기계가 등장했는가 하면 국경에서 반란을 일으킨 절도사의 군대가 마을을 습격해 사람들을 모두 인육으로 만들어 먹기도 했다고 한다.

    식인현상은 변경지역이나 미개발지역이 아닌 인구가 과밀된 지역에서 출현했다. 정치, 경제, 문화의 중심지였던 장안, 낙양, 개봉, 북경, 남경, 양주, 항주 등의 대도시가 식인문화의 다발지역임은 주지할 필요가 있다.

    또한 중국문명의 발전과 그 식인풍습의 전파는 족적이 서로 일치하는 비례관계가 있다. 식인문화의 시작은 거의 대부분 황하유역의 산동, 하남, 하북, 산서, 섬서성이 중심이었다. 시대가 흐름에 따라 점차 남쪽으로 남하해가는 특징을 찾을 수 있는데 중국문화의 전파에 따라 황하유역에서 장강을 넘어 산동, 복건성일대로 파급되어진다.

    그 경로는 중국인들의 강남개발과 이주의 역사와 함께 한다. 즉 사람들이 많이 이주한 지역은 과잉개발에 의한 자연환경의 파괴로 자연생태학적 균형이 깨져 기근이 발생하며 이에 따라 식인현상이 발생하게 되는 것이다.

    예를 들면 한나라 시대 고조 2년부터 흥평 원년에 이르는 400년 동안 식인현상은 대부분 중국문명의 시작인 황하일대에서만 발견되었다. 그런데 흥평 2년 이후에는 장강(양자강)일대에서도 발생하고, 점차 강남, 광동, 복건성에까지 식인현상이 나타나게 되는데 이것은 중국세력이 남하한 3-4세기 이후 동진시대 이후의 일이다.

    출처 : 한중학술문화교류협회/ 중국문화자료실
    [출처] 중국의 식인문화의 진실|작성자 광야


    중국의 식인문화(1)

    식인문화를알아야 중국인을 이해할수있다

    중국식인문화와 중국인의 사고 대만의 사학자 황문웅은 중국의 식인문화는 5천년을 관통하며 지속되고 있고 식인문화를 알지 못하고서 중국의 역사와 문화를 논한다는것은 있을수 없는일이며 중국인의 보편적인 사고방식도 이해할수 없다고 말을 하였습니다.

    왜 중국인은 서로를 믿지 못하고 부모자식간에서 배신을 하는가? 왜 중국인은 강자에겐 약하고 약자에게 잔인한가? 왜 중국은 중국특유의 대가족주의가 발달했는가 등등.. 이모든것이 식인문화와 관련이깊다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식인문화로 인한 폐해와 중국인들의 사고에 미친 악영향을 노신은 광인일기를 써서 정면으로 비판했죠.

    중국사람이 아닌 외국인이 중국의 식인문화에 대해 심도 있게 연구를 한 사람들은 바로 일본인들입니다. 그들은 이 식인문화 연구를 통해 중국인의 특성을 잘 간파하고 있었고 이를 대중국 전략을 짜는데 기본지식으로 활용했습니다.

    우리는 바로 옆나라에 살면서도 중국의 식인문화가 존재했는지 조차도 모르고 그것이 중국사람들의 사고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도 모르고 있었습니다. 이게 한국인과 일본인들의 차이가 아닐까요?

    중국의 식인문화는 미개종족의 식인문화와는 분명한 차이가 있습니다. 확실히 중국의 식인문화는 엄청난 차이가 있습니다. 그리고 이것이 그들의 역사와 정치,문화 중국인의 사고방식에 미친 영향은 엄청납니다. 왜 중국인들이 서로를 믿지 못하며 부모자식간에도 안믿는지.. 식인문화를 살펴보면 이해가 가실것입니다. 또 입으로는 예를 외치면서도 같은 입으로 사람을 잡아먹는 그들의 심리상태토 이해가 가실겁니다.

    식인종으로 알려진 마사이족 여자들이 뇌가 석회화되어 죽는 경우가 많다는 것으로 세계보건기구에 보고되었다. 그 원인을 찾기 위해 역학팀을 보내 연구했더니 그들의 식인풍습 때문인 것으로 밝혀졌다. 사람고기는 제일 좋은 부분부터 남자, 노인, 어린이 차지가 되고 가장 먹기 어려운 골수나 뇌부분을 여자들이 먹기 때문이 그렇게 되었다는 것이다.

    중국의 식인문화(2)

    식인문화가 생겨난 배경 1.

    격한쟁투에 따른 가혹한 형벌제도의 탄생 중국의 역대 황제들은 율령에 의해서 성문법을 규정했습니다. 중원을 둘러싼 격렬한 쟁투는 잔혹한 보복을 낳았고 잔혹한 형벌제도를 탄생시켰습니다.

    이 잔혹한 형벌들은 중국의 식인문화를 정당화시키는데 밑거름이 되었습니다. 전세계에 유래가없는 황제의 명령에 의한 인간의 고기를 먹거나 먹이게 하는 "식육의 형벌" 이 그것이며 그 잔혹한 형벌은 놀랍게도 성문법으로 규정되어 버렸습니다.

    예를 들어 주나라시대에는 중죄인에게 5가지 형벌을 내리는데 묵형, 비형, 궁형, 월형, 살형이 성문법으로 규정되었습니다.

    묵형은 이마에 먹으로 죄인의 문신을 새기는것이고 궁형은 거세를 시키는 형이며 월형은 다리를 자르는형입니다.

    사상가인 묵자는 묵형을 받았고 사마천은 궁형을 그리고 병법의 대가인 손자는 월형을 받았습니다.

    시간이 지나며 그 형벌은 더 잔혹해지고 가짓수도 대폭적으로 늘어나 나중에는 여자의 생식기를 틀어막아 버리는 형벌까지도 생겨나게 됩니다.

    그리고 드디어 식육의 형벌이 성문법으로 기록되어 실시되게 되며 이는 전 중국인의 식인풍습을 확산시키는데 기폭제 역활을 하게 됩니다.

    2.중국의 역사는 살인의 역사

    중국의 역사상 대규모적인 내란은 진시황제 이후 1920년까지 160차례이고 소비된 기간은 896년입니다. 즉 3년에 1년은 내란이 있었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리고 봉건영주간의 침탈전쟁은 448차례에 이르고 대규모 전쟁은 222차례입니다. 소비된 기간은 이루 말할수 없을정도지요.

    근대에 이르면 이러한 양상은 더욱 격해집니다. 중화민국 정권수립이후 22년 동안 7백회의 내전이 발생했고 그중 사천성에서만 5백회이상이 발생했습니다.

    이를 두고 모택동은 중국을 방문한 알바니아 군사대표단에게 이런 말을 했습니다.

    "중국인을 가르켜 평화를 사랑하는 민족이라 했는데 천만의 말씀이다. 우리는 투쟁과 전쟁을 사랑하는 민족이다."

    양계초라는 인물은 중국인을 육민(戮民)이라 칭했는데 이는 전란에 의한 살육사의 비율이 굉장히 높은 국민이란 뜻입니다.

    내란과 기근이 덮칠때마다 소,돼지처럼 죽어가는것이 역사의 숙명이라고 지적했습니다.

    그리고 그 사실은 1989년 천안문 사태에서 또다시 한번 증명됩니다.

    3.역사상 유래를 찾을수 없는 천재지변과 기근

    등운특이란 사람이 지은 중국 구황사란 통계에 의하면 중군은 기원전 18년 부터 1937년 까지 수해, 한발, 메뚜기창궐, 우박, 태풍, 지진, 대설등의 전채만 5천 2백여차례가 있었다고 발표했습니다. 즉 평균 6개월마다 1차례의 재해가 일어났음을 의미합니다.

    가혹한 형벌체계의 발전과 성문법화, 그리고 전란의 역사, 그리고 기근의 역사, 대개 심한 기근이 들었을때 전란이 발생하는점을 두고보면 그때의 식량사정이 어떠했을런지는 어렵지않게 짐작이 가시리라 생각되어 집니다.

    중국 정사 중 사기(史記)를 비롯한 이십육사등에 기록한 전란, 기근, 형벌로 인한 식인풍습은 220여차례가 기록되고있고 자치통감, 속자치통감, 명통감, 문헌통고, 속문헌통고, 등등의 자료에 기록된 식인풍습까지 계산하면 거의 셀수가 없을정도의 식인사례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중국의 식인문화(3)

    유교와 중국인의 식인의 관계

    중국인들의 사고방식을 이해하려면 먼저 그들의 역사를 알아야하고 그것이 그들 사고와 가치 및 문화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가를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나서 직접 그들과 부딪치며 배워나가야 하겠죠.

    식인문화는 중국의 고유문화이며 이를 잘 이해하면 중국인의 사고방식과 그들의 문화를 이해하는데 큰 도움이 되리라 생각되어서 입니다.

    먼저 식인문화에 대한 전반을 살펴보고 그것이 중국인의 가족주의, 대인관계, 중화사상, 기업문화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 나름대로 분석하고 그것을 연재하려 합니다.

    중국의 식인문화가 발달하게 된 배경에는 중원을 둘러싼 격한 쟁투에 따른 잔혹한 형벌제도의 탄생과 사람을 잡아먹는 형벌이 성문법으로 제정되어 법적으로 허용되었다는점과 세계에서 유래를 찾을수없는 잦은기근과 천재지변, 전쟁, 농업기술낙후로 인한 식량부족등이 한대 맞물리면서 확산되었다는것입니다.

    법적으로 식인이 허용되고 식량부족에 기근, 전란이 잦아들면서 차츰 식인문화는 아무 저항감 없이 중국민중에게 뿌리 박히게 되었던것 같습니다.

    따라서 정쟁, 전쟁에서 패배한 정적, 적국군병 및 국민등은 "잡아 먹히는 인육"이 되는것은 너무도 당연했고 상황에 따라선 자국국민을 임의로 대량 징발해서 하루에 수천명씩 군대의 식량으로 사용되어진것도 중국역사를 살펴보면 결코 보기 드문일이 아니었습니다.

    예와 인의를 강조하는 유교도 이에 한몫을 단단히 했습니다. 왜냐면.. 공자역시 정당한 복수를 칭송하였기 때문입니다. 중국에서 왜 유교가 발달할수 밖에 없었던 이유도 식인문화와 관련깊습니다.

    춘추전국시대에 떠도는 말중에 하나가 "만일 사람을 잡아먹지 않는 사람이 있다면 그사람이 바로 성인(聖人)이다" 라는 말이었습니다. 그말은 그만큼 식인문화가 널리퍼져 있었고 모든 중국인이 사람을 "즐겨" 먹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사회분위기가 그런 상태였기 때문에 "예"와 "도덕"이 강조되어질수 밖에 없었고 그런 사회분위기 하에서 유교가 발달 했습니다.

    중국의 식인문화(4)

    중국 식인문화의 3대특징

    1)중국문명의 발전과 그 식인문화의 전파는 그 족적이 일치한다.

    식인문화의 시작은 거의 대부분이 황하유역의 산동, 하남, 하북, 산서, 섬서성이 중심이었습니다. 시대가 흐름에 따라 점차 남쪽으로 남하해가는 특징을 찾을수 있습니다. 이어 식인문화는 중국문화의 전파에 따라 남하하여 회화유역에서 장강을 넘어 산동, 복건성으로 파급되어 집니다.

    그 파급경로는 중국인들의 강남개발과 이주의 역사와 함께 합니다. 즉 중국인이 많이 이주하면 인구가 급증하고 과잉개발에 의해 자연환경이 파괴되며 자연생태학적 균형이 깨어져 기근이 발생하고 식인현상이 발생하게 됩니다. 예를 들면 한나라 시대 고조 2년 부터 흥평원년에 이르는 400년 도안 식인현상은 대부분 중국문명의 시작인 황하에서만 발견되었습니다.

    그런데 흥평 2년 이후에는 장강, 황하일대에서도 발생하고 강남, 광동, 복건성에서 식인현상이 나타는것은 중국세력이 남하한 3-4세기 이후 동진시대 이후가 됩니다.

    2)인구과밀지역과 일치한다.

    식인현상은 대부분 인구과밀지역과 일치해서 발생합니다.변경지역이나 미개발지역이 아닌 인구 과밀 개발지역에서 출현합니다. 특히 정치,경제,문화의 중심지인 장안, 낙양, 개봉, 북경, 남경, 양주, 항주등의 도시가 식인문화의 다발지역임은 주지할 필요가 있습니다.

    3)정치환경변화와의 인과관계가 있다.

    노신은 고대 중국국가 성립이후의 사회를 "사람이 사람을 먹는 역사사회" 라고 못을 박았습니다. 즉 노신이 말하고자 했던것은 국가라고 하는 사적인 권력에 의해 구축된 고대국가 폭력기관이 광대한 대중을 국가라고 하는 우리에 가두고 수탈의 대상으로 삼고 우리 속의 극빈한 군중은 서로가 서로를 잡아먹는 작용을 통해서 인구와 식량의 자동제어를 하고 자생자멸해간 결과를 이루어냈다고 하는것입니다.

    노신은 수탈의 가혹화와 인구 과밀화가 가져온 식량위기 및 자연-사회환경의 악화가 사람이 사람을 잡아먹는 사회를 형성하고 중국의 식인문화를 창출했다고 주장합니다.

    다음편에는 식인문화를 충성심으로 미화하는 케이스를 살펴보고 식인문화를 정당화 그리고 더 나아가 미화하고 칭찬하며 여러 사람에게 본받게 함으로써 식인문화를 더욱더 부추긴 역사를 소개하고져 합니다.

    중국의 식인문화(5)

    역사에 기록된 중국인의 식인 중국에서는 기원전 206년부터 19C초까지의 식인기록이 정사에 200여개가 넘게 기록되어져 있다. 사기(使記)에서는 은 왕조(중국최초의 왕조)의 마지막 임금 주왕이 자신의 신하들을 해, 포, 자로 만들어 먹었다고 한다.

    춘추시대 노나라 사람인 공자는 '해'를 좋아해서 식탁에 '해'가 없으면 식사를 하지 않았다는 말이 있을 정도였다. 그러던 중 위나라의 신하로 공자가 총애하는 제자 자로가 권력다툼에 밀려 처형되었고 그의 시신이 '해'로 만들어져 공자의 식탁에 올려졌다. 그 날 이 후 공자는 해를 먹지 않았다고 한다.

    대표적인 인육요리분류
    * 해 : 인육을 잘 게 썰어 소금에 절인 고기
    * 포 : 인육을 저며서 말린 고기
    * 자 : 인육을 구워서 익힌 고기

    본초강목(本草綱目) : 인체 각 부위의 약효에 대해 기록
    철경록(輟耕錄) : 송나라 말기에서 원대에 이르는 시대의 인육 요리법을 기록한 책 진
    수의 삼국지(三國地) - 현덕 유비가 '포'를 즐겨먹었으며 여포의 시신을 죄인들에게 먹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 중국 정사에 나타난 식인의 시초

    은나라시대의 식인사례를 게재했습니다만 그것은 정사에 기록된 사례는 아닙니다. 사마천의 사기에 기록된 즉.. 정사에 최초로 기록된 식인사례를 올리고자 합니다.

    은왕조의 주(紂)왕은 대신인 구후의 딸이 절세미인이란 말을 듣고 아내로 삼았는데 그 아내가 너무도 정숙하고 외설을 좋아하지 않아 자신의 성적취향에 맞지않자 격노하고 그녀를 살해하고 그녀의 아버지 구후를 해(소금에 절인 육젓)으로 만들어 먹어버립니다.

    신하인 곽후가 이를 강력히 말리자 주왕은 곽후를 포(脯:찢어 말린고기)로 만들어 먹어버립니다.

    그밖에도 주왕은 자신에게 간하는 신하 익후를 자(炙:불고기)로 만들어 먹어버립니다.

    또 신하 귀후는 포로 매백은 해를 만들어 먹어버렸습니다.

    또 주왕은 신하인 황비호의 아내 경씨를 희롱하다 거절당하자 그녀를 해로 만들어 남편인 황비호에게 하사하고 먹게 합니다.

    이에 황비호는 격노하여 군사를 일으켜 주왕을 제거하게 됩니다.

    동물세계에서나 통하는 약육강식의 논리가 인간에도 적용되는 적나라한 사례입니다.

    # 식인의 시작 夏왕조시대
    # 최초로 문헌에 기록된 식인풍습은 하나라때부터 시작합니다.

    하왕조의 후예란 인물은 병사를 이끌고 약정국을 침공하여 국왕인 백봉의 궁전에 들어가 재산을 약탈하고 백봉을 살해한후 그 육신을 잘게 쪼개어 육장(肉醬)을 만들어 하나라 왕인 중강왕에게 바쳤습니다. 즉 속국의 임금의 고기로 만든 육젓을 진미로 만들어 전리품으로 하왕에게 헌상한것입니다.

    그 사건이 있고 얼마지나지 않아 후예는 그 신하인 봉몽과 자신의 애첩간의 공모에 의해 살해를 당합니다.

    후예의 애첩은 과거 후예가 정복한 나라에서 전리품으로 데려온 왕녀였습니다.

    그녀는 후예를 살해한뒤 그를 역시 육장으로 만들었죠.

    다음날 후예의 아들은 아버지를 찾았으나 찾지 못하자 의붓어머니에게 아버지의 행방을 묻자 후예의 육젓을 가져와 보여주며 "너의 아비가 우리나라를 멸망케하고 나의 아들을 죽여 육젓으로 담았으니 나도 너의 아비를 죽여 육젓으로 담았다. 너도 그의 아들이니 용서할수 없느나 니 아비의 육젓을 먹으면 용서해주겠다"

    후예의 아들은 놀라 도망쳤으나 곧 잡혀 역시 육젓이 되었습니다.

    하왕조에서 처음으로 문서에 기록된 식인의 역사는 복수에 의한 것입니다만은 시간이 지날수록 복수 및 형벌로서의 식인에서 군량비 대신쓰는 식량으로써.. 단지 사람고기를 너무나 맛있어해서 즐기는쪽으로 발전하고 대상도 죄인, 원수에서 아무런상관이 없는 자국백성 및 부녀자로 확대됩니다

    중국인은 왜 식인을 대범하게 받아들이는 걸까요?
    왜 살인과 사기같은 범죄를 저지르고도 죄의식을 느끼지 못할까요?
    왜 뇌물을 받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할까요? 왜
    약자에게 잔인하고 강자에게 비굴한 것을 지혜로운 처세술이라고 여길까요?
    왜 돈에 미친듯이 환장을 하는 걸까요?
    그들의 민족성이 본래 잔인해서? 아닐 겁니다.
    어머니의 자궁에 잉태될 때 그 인간의 유전자 속에 민족성이 전해지겠습니까? 거기에 무슨 특별한 정보같은 게 있는 것도 아닐텐데.

    그렇다면 그들의 사회, 문화적 환경에 따라서 그런 결과들이 나오는 거겠죠. 중국을 한 마디로 요약해서 말한다면 1백명이 정원인 기차간 안에 1만명이 들어가 서로 밑에 깔리지 않으려고 서 있으려 안간힘을 쓰는 꼴입니다.

    즉 한마디로 극심한 생존경쟁 사회란 거죠.

    역사를 들어 설명한다면 중국은 수천번의 내전과 침략, 기근, 질병에 시달려 왔습니다.

    춘추전국시대, 진시황의 사후 벌어진 유방과 항우의 항쟁, 흉노족의 침략, 전한의 멸망과 내분, 후한의 붕괴와 더불어 위오촉의 삼국시대, 그 이후 북방 유목민족들의 대대적인 남침과 그로 인한 강북 상실... 수나라의 멸망과 역시 잦은 내분, 당왕조의 팽창에 이은 무수한 전쟁, 오대 십국, 거란족과 여진, 몽골의 침략, 명나라의 쇠퇴와 내란, 청의 침입, 서양 열강과 일제의 침략, 국공내전... 이렇게 삶과 죽음이 오가는 극한 상황들이 계속 반복되다 보면 사람의 가치관에 중대한 변화가 발생합니다.

    형이상학적인 관념들- 명예, 도덕, 윤리, 규범, 염치, 동정, 사랑 등 -은 무시되고 오로지 형이하하적이고 원초적인 본능들을 위주로 매사를 판단하게 되지요. 우선은 돈이 있어야지요. 그 다음은 음식, 집, 색욕, 권력의 순으로 발전해 갑니다. 이 과정은 현대 중국인들이 동경하는 성공의 과정이기도 하고요. 등소평이 개방을 하기 이전에 이미 중국인들의 심리 속에는 물욕에 대한 강렬한 열망이 있었던 겁니다.

    이렇게 중국인들은 철저히 실용적(?)입니다. 죄의식이라든지 선과 악에 대한 진지한 고민이라든지 하는 쓰잘데 없는 몽상따위는 애초에 그들의 머릿속에 자리잡을 곳이 없죠.

    그런 실용적인 사고의 극단이 바로 식인이라는 방식으로 나타난 거죠. 땅은 한정되어 있는데 인구는 쎄고 쎄고 넘쳐나겠다, 한 두놈쯤 죽여봐야 표도 안나니 이왕 죽어서 썩을 거 내가 좀 먹고 영양 보충좀 하면 어떠냐... 하는 생각으로 식인을 한 겁니다.

    중국의 역사서와 소설들을 몇 가지 들춰 보았는데 -여건상 수천권의 관련 서적들을 모두 본다는 건 불가능한 일.- 놀라운 사실은 중국인은 식인을 그다지 끔찍한 일이라고 보지 않는다는 것이었습니다.

    좀 대놓고 떠들기엔 그렇지만 일상적으로 일어날 수 있는 일? 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았습니다.

    춘추전국시대에 보면 이런 일들이 나옵니다.

    송나라의 환공이 자신의 말을 듣지 않는 신하인 남궁장만과 맹획이 각각 진나라와 위나라로 도망치자 두 나라로 사자를 보내 그들을 은밀히 데려오게 했습니다. 그리고 남궁장만과 맹획이 송나라로 끌려오자 송환공은 그들을 시장 한 가운데에 세워놓고 병사들을 시켜 쇠몽둥이로 수백번을 때려 죽인 다음 둘의 살점을 칼로 떼어 소금에 절여 그 인육을 모든 신하들에게 나눠주었다고 합니다.

    그럼 그 인육을 받은 신하들을 어떻게 했을까요? 고이 모셔놓기만 했을까요? 각자 상상의 나래를 펼쳐 보시길 바랍니다.

    또 이런 일도 있습니다. 춘추전국시대의 오패이자 가장 뛰어난 군주인 제환공은 간신인 역아를 총애했는데 어느날 그에게 "나는 일찌기 새고기와 집짐승, 가축, 사냥감, 물고기로 만든 온갖 요리를 먹어보았지만 사람의 고기를 먹지 못해 그 맛을 모르겠다"라고 농담조(?)로 말을 걸었습니다. 그러자 역아는 아무 말 없이 물러가더니 점심상에 왠 찐 고기 한 쟁반을 들고와 제환공에게 바쳤습니다.

    기록에 의하면 그 고기는 젖을 먹은 염소 새끼 고기보다더 연하고 맛이 좋았다고 합니다. 맛있게 고기를 먹고 난 제환공은 역아에게 "이 고기가 무언데 이토록 맛이 좋으냐?"라고 묻자 역아는 태연스럽게 말했습니다. "제 큰 아들을 죽여서 상감께 바쳤습니다."

    이런 일이 있는 후 제환공은 역아를 어떻게 대우했을까요? 놀랍게도 그는 역아를 "군주를 위해 자신의 자식까지 죽여 바친 충성심있는 인물"이라고 여기며 깊이 총애해 말년에는 그에게 국가의 전권을 맡겼다고 합니다.

    여기서 몇가지 들여다 볼 것이 있습니다. 이미 춘추전국시대에 식인은 흔하게 일어났으며 중국인들은 그것을 일상화된 현상으로 여겼고 죽임을 당해 요리가 된 인간을 전혀 동정하지 않았다는 것, 또한 역사를 기록하고 있는 사관들도 식인이라는 행위 자체를 비난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정말이지 이런 중국의 추한 일면을 알면 알수록 공자가 "구이九夷의 땅에 가서 살고 싶다."라고 말한 내역이 이해가 됩니다. 아울러 고조선이 망하기 전까지 우리땅에는 범죄가 없어 사람들이 밤에도 집문을 걸어 잠그지 않고 평화롭게 살았는데 한나라의 침공으로 조선이 망하고 한족漢族들이 대거 유입되 들어오자 온갖 범죄가 들끓어 밤에 집문을 걸어 잠그지 않고는 잠을 잘 수 없었다는 기록도 이해가 되고요.

    참고로 흉노와 선비족시절부터 수백년 동안 중국을 지배해온 몽골인들은 중국인을 어느 민족보다 싫어하고 혐오합니다. 그것은 몽골인들이 누구보다도 중국인들의 추악한 식인 풍습에 질겁을 한 것이 아닐까요? (반면 한국인은 좋아한답니다. 왜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출처] [펌] 중국의 식인문화 |작성자 새우튀김



    고대 중국역사속에 살아있는 인육시식의 역사가 미스테리


    식인문화는 중국 4천년 역사에 면면히 이어져 내려왔다. 한나라가 건국된 기원전 206년부터 청나라가 멸망한 1912년까지, 중국에서는 식인의 기록이 220차례나 정사(正史)에 기록되어 있다.

    최초의 식인 이야기는 중국의 전설적인 왕조인 하나라 당시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 아들을 죽인 원수를 죽여 육장(肉醬)을 만들어 원수의 아들에게 먹기를 강요한 여인 이야기다. 유교는 ‘복수주의’를 인정할 뿐 아니라 오히려 장려한 면이 있어 복수에 의한 식인행위가 있었다. ‘부모의 원수와는 같은 하늘 아래 살 수 없다(‘불구대천’, 不俱戴天)’는 생각으로 심하면 부친의 원수를 29대까지 갚기도 했다. 복수할 때는 한 칼에 숨통을 끊는 것으로 만족하지 않고 천 갈래, 만 갈래로 잘랐으며 때로는 고기를 잘라먹고 심장과 간을 꺼내어 씹어먹으며 뼈까지 갈아먹는 경우도 적지 않았다. 한 예로, 측천무후 당시 잔혹한 고문과 형벌로 유명했던 내준신이 처형되었을 때에는, 군중들(그에게 처형당한 이들의 가족들)이 다투어 그의 고기를 잘라먹었다고 한다.

    황제는 법률로 ‘살육의 형’을 규정했다. 이는 주나라 때의 율령 체제부터 등장하지만 이전에도 마찬가지였다. 식인 기록이 나타난 최초의 정사인 <사기(史記)>는 중국 최초의 역사왕조인 은 왕조(주나라 이전의 왕조)의 마지막 임금 주왕이 신하들을 ‘해’( , 인체를 잘게 썰어 누룩과 소금에 절인 고기), ‘포’(脯, 저며서 말린 고기), ‘자’(炙, 구운 고기)로 만들었다고 기록했다. 해, 포, 자는 이후 중국 춘추전국시대까지의 인육 조리법의 대표격으로 계속 등장한다.



    춘추시대 노나라 사람인 공자는 이 ‘해( )’를 즐겨서 해 없이는 식사를 안 했다는 말이 있을 정도였다. 그러나 공자가 아끼던 제자 자로가 위나라의 신하로 있다가 왕위다툼에 휘말려 살해되고, 그의 시체는 잘게 토막내어져 해로 만들어지고 말았다. 이 해는 사자에 의해 공자의 식탁에까지 전해졌다. 이 일 후로 공자는 그렇게 좋아하던 해를 먹지 않았다.



    중국 역사사회에서는 생존경쟁의 패자가 승자의 먹이로 식탁에 오르는 일이 다반사였다. 그리고 충성심을 보이기 위해 식인이 자행되기도 했다. 춘추전국시대의 유명한 제나라 환공은 미식가로도 유명했다. 그가 진미를 찾자 요리사인 역아(易牙)는 자기의 장남을 잡아서 삶아 바쳤다. 역아뿐 아니라 극한 상황에서는 자기 살을 베어내거나 아내나 자식을 잡아 주군을 대접하는 경우가 종종 있었고, 흔히 이런 경우는 충성으로 기려졌다.



    인육은 가끔 약용으로도 쓰였다. 이시진의 <본초강목(本草綱目)>에는 인체 각 부위의 약효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이러한 통념에다 ‘효’라는 유교 사상의 실행으로서, 병으로 죽어가는 부모에게 자신의 넓적다리살 등을 잘라서 봉양하는 일은 더욱 흔했다. 단, 이런 일이 진정한 효행인가 하는 정치적인 논란이 벌어지기도 했는데, 당시의 황제 뜻에 따라 어떤 시대의 사람들은 ‘효자’로 표창을 받았고, 다른 시대 사람들은 신체를 훼손한 ‘불효자‘로서 매를 맞은 후 귀양을 갔다.



    수·당대에는 인육시장이 출현했고, 인육애호가가 열전(列傳)에 기록되기도 했다. 송 말기부터 원대에는 <철경록(輟耕錄)>이라 하여 인육 요리법을 자세히 적은 요리책까지 출판되었다. 원나라를 방문한 마르코폴로는 <동방견문록>에서 자신이 목격한 복주(福州)의 식인 풍습을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이 지방에서 특별히 기록할 만한 것은 주민들이 그 어떤 불결한 것이라도 가리지 않고 먹는다는 사실이었다. 사람의 고기라도 병으로 죽은 것만 아니면 아무렇지 않게 먹는다. 횡사한 사람의 고기라면 무엇이건 즐겁고 맛있게 먹는다. 병사들은 잔인하기 짝이 없다. 그들은 머리 앞부분을 깎고 얼굴에 파란 표식을 하고 다니면서 창칼로 닥치는 대로 사람들을 죽인 뒤, 제일 먼저 피를 빨아먹고 그 다음 인육을 먹는다. 이들은 틈만 나면 사람들을 죽여 그 피와 고기를 먹을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



    중국의 식인 풍습은 <삼국지>, <수호지>, <서유기> 등 유명한 중국 고대의 소설에도 잘 나타나 있다. <삼국지>의 경우, 정사로 기록된 진수의 삼국지에는 유비가 즐겨먹은 음식이 인육으로 만든 포였다고 하며, 여포가 죽은 후 그 고기를 죄인들에게 먹였다고 한다. 소설 <수호지>에서는 인육으로 고기만두를 만들어 파는 악한이 등장하고, <서유기>에서는 고승(高僧)의 고기가 불로장생의 영약이라 하여 삼장법사가 끊임없이 요괴들의 공격을 받는 장면이 나온다.



    인육의 판매를 금지하는 법이 송나라 때에 만들어졌지만, 명나라를 거쳐 청나라 말기에 이르기까지 인육은 시장에서 공공연히 매매되었다. 1918년, 중국 근대의 사상가 노신은 <광인일기(狂人日記)>에 식인의 피해망상증에 걸린 광인을 주인공으로 등장시켜 식인 풍습이 만연한 사회상을 폭로했다. 그는 또한 ‘국가는 사람이 사람을 먹는 역사사회‘라고 정의한 바 있다. 중국 5·4운동의 사상적 지도자 오우(吳虞, 1874∼1949)는 ‘유교 = 식인’이라 하며 강력히 유교를 비판했다. 식인풍습은 공산화된 중국에서 유교의 폐해 중 하나로 비판되었고, 최근에 이르러서야 점차 사라져갔다. 오랜 역사와 문화를 자랑해 온, 유교문화의 종주국인 중국에서 식인 풍습이 꾸준히 이어져 내려왔다는 것은 이해하기 힘든 역사의 단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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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씨발... 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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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 2012/07/16 22:51:08  59.30.***.1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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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 2012/07/17 03:11:36  221.138.***.35  애퍼쳐
    [6] 2012/07/17 04:54:54  113.199.***.129  
    [7] 2012/07/17 09:05:15  218.51.***.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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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9] 2012/07/17 11:31:18  210.103.***.39  까부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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