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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붕 뚫고 하이킥 이후 김병욱 감독에게 웃음을 요구하는 것은 일종의 강박이란 생각마저 들었다. 시트콤이라는 장르 때문에 드라마를 부정당하는 김병욱 감독을 보고 있노라면 아예 노선을 틀었으면 좋겠다가도 일말의 불안감은 남아있었다. 과연 그의 드라마에서 웃음기를 온전히 제거한 탈 시트콤 화가 가능할 것인가 하고. 그래서 내게 응답하라 시리즈는 다른 의미에서 충격이자 해답이었다. 아아. 이런 방식으로도 드라마를 만들 수 있구나.
시간을 뛰어넘었다 다시 불러들이고 각종 장치를 복선과 암시 디테일로 흐트러뜨려 놓아 마치 퍼즐을 풀듯 결과를 추리하게 하는 파격적인 전개. 심지어 남자 주인공의 감정선을 무려 드라마의 절반가량 배우의 연기력 하나에 맡겨놓은 이 오만한 드라마. 그럼에도 드라마의 형식을 완전히 갖추고 있는, 이것은 드라마다. 그래서 내게 응답하라 시리즈는 김병욱 감독의 가능성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카메오로 등장한 SNL 걸 김슬기의 일화는 내게 그런 이유로 몇 가지 의미가 되었다. 메인 커플의 앞날을 신기 있는 소녀의 악담으로 풀어놓다니. 정말 황당한 전개인데 그럼에도 시청자를 집중하게 한다. "태지 오빠야. 이제 두 번 다시 못 볼 거 같아서. 그래서 마지막으로 얼굴 한번 볼라고 넘었다." 1996년. 서태지의 은퇴까진 예지했지만, 그로부터 2년 뒤. 그가 돌아오리란 사실까진 예측할 수 없었던 소녀. "알았다. 알았다. 알았다. 열심히 해봐. 내도 가끔 틀릴 데 안 있더나. 내 그래도 서태지는 맞췄다이. 알재?" 전화의 내용으로 미루어보건대 소녀의 능력이 영험한 수준은 아니고 사람 잡는 선무당 짓을 몇 번은 했던 반쪽짜리 무당이었나 보다.
어처구니없는 것은 그야말로 시트콤의 유머 소재로나 쓰일 이 황당한 에피소드가 희한하게 아련하기까지 하더라는 것. "쓰오빠. 짱! 여자친구랑 끝까지 가야 될 낀데." 오빠야. 니 여자친구랑 헤어질 끼다! 꽥하고 소리 지른 김슬기의 한마디가 예언인지 쓰레기의 말마따나 화풀이였는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쓰레기 오빠에게 받아든 용돈으로 악담이 염원으로까지 진화한 것을 보면 쓰레기가 건넨 것은 차비가 아니라 복채였던가 싶어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
병원과 공중전화. 따지고 보자면 쓰레기와 나정이 함께했던 공간이다. 하지만 같은 공간 아래 어쩜 이렇게 다른 풍경이 펼쳐지는 것인지. 허리디스크로 울먹이는 나정을 내 허리 아픈 것보다 더 쓴 얼굴로 바라봤던 쓰레기가. 그 아이를 위해 40초 데운 우유와 주머니에서 꺼낸 서태지와 아이들. 머리를 쓰다듬어주고 커튼을 쳐주는. 나정이가 했던 요구사항을 하나하나 실천하는 이 자상하고 사려 깊은 판타지를 사촌 여동생 김슬기 앞에서는 상상할 수 없었다. 그저 꾸짖고 힐난하고 한심해하는 사촌 오빠 쓰레기의 모습뿐.
분명 남매라고 불렀을 때 서로의 머리를 쥐어뜯는 그분들이긴 했지만 그래도 이따금 부숴질 듯 애틋해하는 쓰레기의 목마른 감정이 진짜 사촌 여동생에겐 일 g도 느껴지지 않더란 말이다. 나정이가 지난 십여 년간 받아왔던 오빠라는 이름의 로맨스가 새삼 애틋해졌다. 장남도 아닌 삼 형제의 막내. 이런 그에게 친구의 죽음은 일찍이 그를 가장으로 성장시켰다. 오빠를 잃고 울먹이는 나정이를 본 그에게 나정 네 가족은 아픈 손가락과도 같았으리라. 새삼 태훈을 잃고 결핍된 그들을 오빠의 위치에서, 혹은 아들의 자리로 채워준 쓰레기의 존재감을 생각하니 가슴이 아려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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