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월당 이란분이 올린 깡패로본 우리역사100년이란 게시물을 보다가
제가 김두한이 김좌진장군 아들이 아니라는 댓글을 올렸습니다.
그랬더니 [흔한쿨가이]란분이 반말로 어줍잖은 지식으로~라카더라 식으로 얘기하는 나같은놈을위해
김두한이 김좌진장군 친자식이 맞다는 링크를 띄워줌
시건의 발단 좌표 댓글등중 거의 끝자락에있음
http://todayhumor.co.kr/board/view.php?kind=&ask_time=&search_table_name=&table=humorbest&no=484728&page=11&keyfield=&keyword=&mn=&nk=&ouscrap_keyword=&ouscrap_no=&s_no=484728&member_kind= 그가주장한 링크임
http://mirror.enha.kr/wiki/%EA%B9%80%EB%91%90%ED%95%9C 링크내용 中
'청산리 대첩의 영웅 김좌진 장군의 아들'이라고 실제 김두한 본인도 말을 했으나, 이에 대해선 논란이 많다. 예를 들어 김두한은 청산리 대첩 때 자신이 7살이라고 했고, 11살 되던 해에 아버지 김좌진이 죽었다고 말했다. 그러나 청산리 대첩은 1920년에 있었고, 김좌진은 1930년에 죽었으므로 그의 나이를 생각해보면 말이 이상하다. 그래서 김좌진 장군의 아들설을 부정하는 입장에서는 김두한의 유족에게 유전자 감식으로 진위를 가리자고 제안했으나 유족 측에서 거절했다. 사실, 가족들과 떨어져 해외에서 돌아가셔서인지 김좌진 장군의 자식들에 대해선 논란이 여러 번 나왔다(...).
결론적으로는, 김두한은 김좌진 장군의 아들이 맞다. 자세한 정황증거는 아래에서 이야기하도록 하고, 이러한 의혹이 생기는 이유는 김두한 본인의 회고록이나 라디오 프로그램에서 했던 이야기 등에서 자신을 지나치게 미화하는 과정에서 많은 거짓들이 덧붙여졌기 때문에 진실마저 신빙성이 떨어지게 된 것이다.[1] 김두한의 자기미화부분에 대해서는 많은 이야기가 있지만 지면상 그의 출생에 관한 부분에 대해서만 서술한다. 아래는 김두한이 회고록에 서술한 출생과정이다.
어느 날 김좌진이 서울 근교 야산(사직공원 뒤)에서 동지들과 회합을 가지고 있던 때였다. 일경들이 이를 알고 들이닥쳐 포위망을 좁혀왔다. 김좌진은 동지들을 대피시킨 뒤 홀로 일제 순경들을 상대해 때려눕히고 자신도 도피했다. 쫓아오는 일경들을 피하기 위해 사직동의 어느 양반집의 담을 넘어 방으로 뛰어들어 갔다. 그 집은 궁녀 박 상궁의 집이었고 그 방은 박 상궁의 딸 박계숙의 방이었다. 박계숙은 그를 책장 안에 감추어 주었고 김좌진은 위기의 순간을 넘겼다. 책장 안에 있던 그는 간이 크게도 잠이 들었고 그 사이 박 상궁은 이 사실을 감추기 위해 그날로 하인들을 고향으로 보내버리고 이후 모녀가 손수 김좌진의 시중을 들었다. 이때 태어난 혁명아가 바로 김두한이었다.
각종 소설이나 드라마 등에서도 이 이야기를 정설인듯 다루고 있지만 이 부분은 명백한 거짓말이다. 1930년 1월, 김좌진 장군이 암살당하자 당시 동아일보, 조선일보 등의 국내언론은 이를 크게 보도했고 유족의 동정에 대해서도 관심을 집중했다.
“그의 가족은 지금 전부 그의 근거지 이든 길림성 모처에 잇다는데 그의 칠십 로모와 그의 안해며 그의 아우되는 김동진씨를 합하야 세 식구가 잇다 하며 시외 모처에 씨의 서자[2] 한 사람이 잇슬 이라는데 “(『동아일보』 1930년 2월 13일자)
곧이어 조선일보 개성특파원 최문우씨가 바로 이 김두한의 거처가 시외 모처가 아니라 개성이라는 것을 알아내 취재를 해서 1930년 3월 17일부터 2회에 걸쳐 신문에 연재했다. 그의 기사에는 김두한의 어머니 김계월과 김두한의 어린시절 사진까지 실려 있어 신빙성에서 나무랄 것이 없다.
“그가(김좌진) 가장 사랑하던 애첩 김계월(26)의 몸에서 출생한 김두한(12)이란 아들이 현재 홍성에 잇느니 혹은 경성 시외에 잇느니 하야 그 확실한 소재처를 아지 못할 안이라 애첩 김계월이가 원산 방면에서 료리업을 한다고 보도되엇거니와 그는 모다 오보이엇스며 허설이엇고 정작 김좌진의 아들 두한이 잇는 곳은 아버지가 잇는 바 바람 거친 그곳과는 정반대로 고요한 조선의 도읍 개성에 잇다. 그는 목하 개성 서본뎡(西本町) 이백 오십 사 번지에서 자긔의 조모와 가치 쓸슬한 그날그날을 소일하고 잇다.”『조선일보』 1930년 3월 17일자)
그가 3월 12일 김두한의 집을 찾아갔을 때 김두한은 “아침밥을 먹고 나가 아직 도라오지 안코(...) 어둠컴컴한 방에 두한의 외조모만 병으로 누어 잇섯슬 ”이었다고 한다. 진실을 정리해보면 이렇다.
김계월의 아버지는 참판을 지낸 김상회라는 사람으로 명문 집안이었으나 구한말 격변하는 시대에 몰락한 양반이었다. 집안이 파산할 지경에 이르자 결국 김계월은 15세 때 서울의 다동권번(茶洞券番)이라는 기생집에 팔려 가게 되었다. 연도를 계산해보면 1916년 즈음이다. 바로 김좌진이 서울에서 활동하던 시기와 일치한다. 이때 기생집에서 김좌진과 김계월의 첫 만남이 이루어진 것이다.
두 사람은 이후 3년 동안 동거했으나 김좌진은 1918년 홀연 만주로 떠나버리고 김계월은 서울에 홀로 남게 되었다. 김두한은 회고록에서 “떠나는 아버지를 붙들고 어머니께서 태아가 있음을 고하자, 아버지는 아들을 나으면 두한이라 하고 딸을 나으면 두옥이라 부르라 하시면서 홀연히 집을 떠나셨다고 후일 어머니가 말해주셨다”고 하는데 이는 여러 정황으로 미루어 보아 사실일 가능성이 높다. 그는 먼저 펴낸 회고록에서는 이후의 어머니와 할머니에 대해 자신이 일곱 살 때 “예비검속됐다”거나 “투옥됐다”고 말하고 그 이후에 대해서는 언급이 없다. 그리고 이후에 나온 육성증언에서는 “여덟 살 때 두 분이 돌아가셨다”고 말했다. 그러나 『조선일보』 최문우 기자가 개성으로 찾아갔을 때 그는 이미 열두 살로 할머니와 함께 있었다. 여기에는 김두한이 감추고 싶은 가족의 내력이 있었다.
남편을 홀로 떠나보낸 김계월은 살아갈 방도가 막막했다. 그래서 결국 노모와 아들을 데리고 국경을 넘어 김좌진을 찾아갔다. 김두한이 자신이 여섯 살 때 만주로 가서 아버지를 만났다는 것은 그래서 사실이다. 다만 어슴푸레한 기억으로만 남아 있을 것이었고 그래서 그가 말하는 연도가 죄다 실제와 틀리게 된 것일 터이다.
그러나 노모의 건강이 악화돼 다시 귀국할 수밖에 없었다. 이때가 대략 1926년 즈음이었다. 고국으로 돌아온 그들은 서울의 인사동에 거처를 정하였으나 역시 살아갈 길이 막막했다. 김계월은 다시 기생으로 나가려고 했으나 어쨌든 안동 김씨 가문의 첩으로서 올바른 처신이 아니라는 주위의 만류로 그만두고 친지들의 도움으로 간신히 연명했다.
그러나 이도 오래 버틸 일은 아니었고 결국 친지들이 없는 개성으로 가서 기생을 하기로 작정하고 개성으로 온 것이다. 아마도 개성에서의 기생생활도 만만치는 않았던 모양이다. 결국 김계월은 다른 기생 두 명을 데리고 요리업을 하기 위해 함흥으로 떠나버렸다. 최문우 기자가 찾아갔을 때 김두한이 할머니와 단 둘이 살고 있었던 것은 이런 이유에서였다. 김계월은 함흥에 있다가 다시 더 북쪽의 흥원으로 갔고 아마도 이후 소식이 끊긴 것으로 보인다.
김두한은 서울에 살 때 잠시 교동보통학교를 다닌 적이 있을 뿐 개성으로 옮긴 이후엔 학교를 가지 못했고 그나마 어머니와의 연락이 끊긴 뒤로는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일이 힘들었을 것이다. 결국 집을 나와 서울로 와서 청계천 장차구다리 밑에서 거지생활을 하게 되었던 것이다. 김두한이 개성 출신의 천애고아라는 얘기는 이렇게 해서 나왔다.
김두한은 이런 자신의 불우한 가족사를 감추고 싶었을 것이다. 그래서 아버지가 항일투사였듯이 어머니와 할머니까지 항일투사의 대열에 올리기 위해 일제의 탄압을 받은 것처럼 말을 지어냈다. 이렇게 김두한의 거짓말은 자신의 출생과 성장과정에서 어두운 부분은 삭제하고 자신을 영웅화하는 데 초점이 맞춰져 있다. 그의 회고록과 육성증언은 바로 그런 거짓말들로 가득 차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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