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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을 맞으며 그녀가 서 있었다. 바로 눈앞의 풍경도 제대로 볼 수 없을 정도의 눈보라 속에서도 그 아름다움만은 잃지 않은 채로.
이미 몸에 힘은 하나도 없었지만, k는 마지막 기력을 쥐어짜 그녀에게 손을 뻗었다. 그러나 아무리 그가 손을 뻗어도 그녀에겐 닿지 않았다.
결국, 그녀에게 채 다가가지도 못한 채로 그의 의식은 서서히 깊은 바닥 속으로 가라앉아 갔다.
“헉! 젠장, 또 이 꿈인가...” 꿈에서 깨어난 그는 욕설을 내뱉으며 잡념을 날려 보내기 위해 텐트 문을 거칠게 열어젖혔다.
그러나 차가운 바람이 k의 뺨을 베고 지나가도 잡념은 쉽게 사그라지지 않았다. 대체 왜 자신이 여기 또 왔는지 그조차 알 수 없었다.
삼 개월 전, k는 이 산에서 조난당했다. 자신의 능력만을 믿고 셰르파를 고용하지 않은 것이 원인이었다. 다른 팀이 그를 발견하지 못했다면 그는 얼음 동상이 된 채로 다른 팀들의 이정표 역할이나 하고 있었을 것이었다.
생각이 있는 사람이라면 다시는 이곳에 올 엄두조차 내지 않았을 터였다. 그렇다고 그가 남다르게 담이 크다거나 산에 대한 욕망만으로 살아가는 사람도 아니었다. 그녀의 모습을 보지 못했더라면, 아마 그는 이 산이 있는 방향으로 오줌조차 누지 않았을 터였다.
모두가 그저 환각을 본 것이라고 말했지만, 쓰러지기 전 그는 분명히 그녀를 보았다.
만 년 동안 쌓여 온 빙하 같은 새하얀 피부, 처녀의 피처럼 붉은 입술, 하늘에 있는 달을 떼어다 놓은 것만 같은 눈동자.... 그녀는 그가 지금까지 보아 온 어떤 여인보다 아름다웠다. 아니,‘아름다움’ 이란 단어가 오직 그녀를 위해서 존재 하는 것만 같았다.
그녀를 본 이후로 그녀의 모습은 그의 머릿속을 점령한 채로 사라지지 않았다. 밥을 먹을 때도, 술을 마실 때도, 애인과 길을 거닐 때도, 심지어 잠이 들었을 때조차 그녀에 대한 꿈만 꾸었다. 아무리 잊으려 해도 소용없었다. 잊으려면 할수록 그녀는 더욱더 그의 뇌를 잠식해갔다. 그리고 정신을 차려 보니, k는 또다시 그 산을 오르고 있었다.
뺨을 베고 지나가는 바람에 k는 겨우 상념에서 깨어났다. 그녀에 대한 생각을 반복하면 반복할수록, 그녀를 만나고 싶다는 마음은 점점 커져만 갔다. 다시 한 번 그녀를 만날 수 있다면, 죽어도 좋다는 생각이 들자, 그는 텐트 문을 완전히 열어젖히고 눈보라가 휘날리는 밖으로 발걸음을 내딛었다.
밤에 산행을 하는 것은 위험하다는 초등학생조차 알 법한 상식조차 무시할 정도로 그는 더 이상 기다릴 수 없었다.
지금 그의 머릿속에는 오직 한 순간이라도 빨리 그녀를 보고 싶다는 생각뿐이었다.
발을 내딛자마자 휘몰아쳐오는 걸음을 옮기기도 힘들 정도로 강한 눈보라도, 언덕 위에서 그를 호시탐탐 노리고 있을 눈사태도, 눈 밑에 교묘히 숨겨진 크레바스2)도 그의 발걸음을 막지 못했다.
“하아, 하아, 하아.......” 시속 20km의 칼바람이 무사의 검처럼 k를 베고 지나갔다.
역시 밤의 산은 위험하다. 가로등이 없으니 주변에 뭐가 있는지 제대로 보이지 않는 건 둘째 문제다. 오히려 밤의 산에서 가장 무섭고도 위험한 것은 ‘공포’다. 이 넓은 곳에 나 혼자뿐이라는 공포. 여기서 사고를 당하면 구조는커녕 내 시체를 발견해 줄 사람도 없다. 그런 생각이 들자, k의 발걸음이 점점 더뎌졌다. 이러면 안 된다. 라고 k는 누군가에게 설명이라도 하듯 중얼거렸다.
발걸음을 멈추면 오히려 더 위험하다. 그녀를 보지도 못하고 개죽음을 맞게 되는 것이다. 그렇지만 어둠에 대한 근원적인 공포는 k의 발을 단단히 붙잡고 헤어 나오지 못하도록 만들었다. 한 발걸음만 내딛어도 앞에 크레바스가 있을 것만 같고, 위에서 눈사태가 휘몰아쳐오는 것 같다.
아니, 실제로 눈사태가 그를 우르릉 덮치는 소리가 들리는 것만 같다. 산에서 가장 위험할 때는 눈보라가 몰아칠 때도, 눈사태가 덮쳐올 때도 아니다. 바로 ‘내가 왜 여기서 이러고 있는 거지?’ 라는 생각이 들 때다. 목표의식이 없어지면 인간은 놀랄 정도로 나약해진다.
이제 ‘그녀의 얼굴을 한 번만이라도 보고 싶다.’ 는 갈망만으론 한계에 이르렀다. 고 k는 생각했다. 늦기 전에 더 큰 목표, 더 큰 의지를 형성해야 한다. 그녀와 키스한다? 그녀를 데리고 같이 한국으로 간다? 그녀와 사귄다? 그녀와 결혼한다? 아니다. 그런 것을 바라는 것은 그녀의 아름다움을 파괴하는 것이다. 진정한 아름다움은 누군가의 소유가 되지 않았을 때만 성립한다.
피그말리온처럼 아름다움을 소유한 사람은 그 한 순간은 좋겠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그 아름다움에 점점 무감각해지게 된다. 그리고 결국은 더 이상 그 아름다움을 느낄 수도 없게 되겠지. 그렇기에 아름다움이란 누군가의 소유도 되지 않아야 한다고 k는 생각했다. 그렇다면 내가 가져야 하는 목표는 뭐지? 그래, 그녀의 그 아름다움을 더욱 더 빛나게 만들 소원이다. 완벽하기만 한 것 같은 그녀도 곰곰히 생각해 보니 딱 한 가지의 단점이 있었다. 만년설처럼 차가운 표정. 그 표정을 미소로 바꾸어 놓을 수만 있다면.. 이깟 산을 오르는 것쯤은 두렵지 않다. 새로운 목표를 얻은 k는 다시 발을 내딛었다. 그리고 그가 미처 보지 못한 눈사태는 그를 완전히 삼켜 버렸다.
분노한 코끼리 떼 같은 눈사태 속에서 그가 살아 있는 건 그야말로 기적이었다. k는 자꾸 감기려는 눈꺼풀을 억지로 열고 앞을 바라보았다.
거기에는... 눈을 맞으며 그녀가 서 있었다. 바로 눈앞의 풍경도 제대로 볼 수 없을 정도의 눈보라 속에서도 그 아름다움만은 잃지 않은 채로. 이미 몸에 힘은 하나도 없었지만, k는 마지막 기력을 쥐어짜 그녀에게 손을 뻗었다.
그러나 아무리 그가 손을 뻗어도 그녀에겐 닿지 않았다. 이것이 꿈인지 현실인지 구분할 수 없었지만, 드디어 그녀를 만났다는데도 꼼짝할 수도 없다는 현실이 그를 괴롭게 했다. 이대로 쓰러질 수는 없다. 고 생각하며 k는 마지막 힘을 쥐어짜 그녀에게 기어갔다. 아아, 그녀는 정말로 아름다웠다. 지금까지의 고생을 전부 잊을 정도로. 이제 조금만 더 가면.. 그녀를 만날 수 있다. k는 최후의 힘을 짜내서 그녀에게 한걸음, 한걸음 다가갔다. 그리고 그녀에게 이르기에 한 걸음만 남은 그 순간, k는 크레바스에 빠지고 말았다.
크레바스에 빠지면서도 k는 그녀를 바라보았다. 아아, 그녀는 그제야 웃고 있었다. 환희의 눈물이 차오르는 것을 느끼며 k는 심연 속으로 점점 빨려 들어갔다.
“하아, 하아, 정말 겨울의 산은 최악이군, 스티브.”
“조심하게! 정신을 놓으면 악마에게 홀릴 지도 모르니까.”
“악마요?”
“이 지방의 오래된 전설인데, 사악한 악마가 여신의 모습으로 변신해서 지친 여행자를 꼬여낸다는군.”
“하하하! 정말 재미있는 전설이군. 여신의 모습이라면 한 번 보고 싶은데?”
“그만두게. 아무리 아름다워도 그것 때문에 죽는 건 싫다고.”
“하하, 그러지. 근데, 아까부터 나는 이 우르릉거리는 소리는 대체 뭐지?”
-끝-
1)프레이야- 북유럽 신화의 사랑, 아름다움의 여신
2)크레바스-지리, 지질학에서 가리키는 빙하의 틈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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