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 자게에서 눈팅만 하다가 저도 글을 쓰게 되네요.
외과 레지던트 수련을 마치고 현재 외과전문의로 공중보건의 근무 중입니다.
최근 포괄수가제로 이야기들이 많네요. 안과에 이어 포괄수가제 대상 진료과목인 이비인후과, 산부인과, 외과도
일주일간 수술을 중단하기로 했다는 소식도 들리구요. 아고라 뿐 아니라 각종 포털의 게시판, 자게까지 이 이야기로
떠들썩 하군요.
현직 외과의사로서 지금까지 경험한 포괄수가제에 대한 경험과 앞으로의 예상에 대해 써보려고 합니다.
사실 원론적인 이야기(의료의 질 저하, 의료비 절감 등등…)들이 병원 밖에 있는 대부분의 사람들에게는
그리 와 닿지 않을 테니 말이죠.
레지던트 시절 국민건강보험공단에서 운영하는 모 병원에 두 달간 파견 나간 적이 있습니다. 포괄수가제 시범사업을
했던 대표적인 병원이죠. 근무 전날 인수인계를 받는데, 좀 특이하더군요. 포괄수가제의 대상이 되는 급성충수염
(흔히들 말하는 맹장염), 치질, 탈장 수술을 받는 환자는 CP(Clinical pathway)로 지정되어
입원부터 퇴원까지 처방이 미리 입력되더군요. 원래 맹장수술의 경우 수술 후 환자의 컨디션과 회복경과를 보아
퇴원일 결정하는 것이 원칙인데, 수술 전인데 퇴원일이 미리 결정되어 있으니 좀 이상하다고 생각했습니다.
또한 최근에 맹장수술은 수술상처가 작고 회복이 빠른 복강경 수술이 대세가 되었는데, 그 곳은 개복수술이 원칙이더군요.
알고 보니 포괄수가제 대상의 질환은 공단에서 정한 일정 금액만 받게 되어 있어 손실을 막기 위해 병원 측에서
한도 이상의 진료가 이루어지지 않도록 약속처방을 미리 정해놓은 것이라고 하더군요.
사실 수술 후에 아프다고 퇴원을 안 하려는 환자들이 많아 어르고 달래는 일이 많은데.... 좀 걱정이 되더군요.
수술방에 들어가니 확실히 차이를 알겠더군요. 우선 고가의 장비가 투입되는 복강경 수술은 하지 않습니다.
개복해서 열고 수술합니다. 수술실 감염 방지를 위해 최근에 대부분 사용하는 일회용 수술가운과 기구도 쓰지 않습니다.
모든 물품을 재활용하고 수술가운도 세탁해서 다시 씁니다. 수술 중 봉합의 목적으로 여러 실을 사용하게 되는데,
저가의 화이트실크만을 사용하더군요 (의사되고 그 병원 가서 처음 구경했습니다. 사용해보니 잘 끊어지더군요....-_-;;;)
수술 범위가 넓어지고 염증이 심했던 사람은 수술 후 복강 내 장기 유착으로 인한
장유착, 장폐색 등의 합병증 예방을 위해 최근 많이 사용하는 유착방지제 또한 거기선 사용할 수 없습니다.
두 달간 일을 하면서 사실 전 포괄수가제라는 제도가 전체 의료비용 감소에는 효과가 있겠지만,
수술을 받는 개인의 입장에서는 분명 피하고 싶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분명 그런 비용절약형 진료가 불법은 아니지만, 양심에 가책을 느낄 수 있는 여지가 많았습니다.
사실 수술하는 의사의 입장에서는 수술 후 합병증이 가장 걱정이 되는데, 포괄수가제 하에서는 걱정이 되는 부분이
많습니다.
이제 정부가 밀어붙여 포괄수가제가 시행되면 벌어지게 될 일들이 눈 앞에 보입니다.
일단 중소병원들은 포괄수가제 항목에 포함되는 수술에 여러 제한을 두게 될 겁니다. 일단, 기저질환이 있거나
노년의 환자, 즉 합병증의 가능성이 있는 환자들은 되도록 대학병원 쪽으로 유도하게될 겁니다. 수술 후 합병증으로
입원기간이 길어지고 비용이 더 들어가게 되면 병원이 손해를 보게 될 테니까요. 수술 후 충분한 회복기간을 요구하는
환자들에게는 강제퇴원 후 응급실을 통한 재입원 등의 꼼수가 생길 겁니다. 수술방법 (복강경 vs 개복), 수술 소모품 등이
저가 항목으로 대체되고 수술 후 조기 퇴원이 강요되겠죠. 대형병원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포괄수가제 대상의 환자들은 다인실 병실 입실이 제한되고 비보험 적용인 1~2인실병실을 사용하게 하겠죠.
포괄수가제의 최대 수혜자는 보건복지부(정부)와 민간보험회사가 될 겁니다. 의료비 절감으로 상당한 이익을 얻게 되겠죠.
의료계는 어떨까요? 아마도 현 제도에 맞추어 잘 적응하겠죠. 정부의 의료비 제한을 피해 갈 꼼수를 개발하고 적정수순을
찾아내 이익을 보전하겠죠. 지금도 심각한 메이저 기피(흉부외과, 외과, 산부인과 등등)현상은 더 심해지고 많은 의사들이
피부미용, 비만, 노화방지, 성형에 몰리겠죠. 이번에 지정된 포괄수가제 대상 질환의 환자들은 같은 가격이면
좋은 병원 가자는 심리로 대형종합병원으로 몰리겠죠.
사실 이번 사태에 의사협회와 안과, 산부인과, 이비인후과, 외과 개원의협의회가 결의한
일주일 간의 정규수술 거부라는 무리수는 단순히 돈에 환장한 의사들의 밥그릇 지키기는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제일 먼저 나선 안과의 경우 백내장 수술 수가가 10% 삭감되었지만, 이번에 추가로 나선 다른 과
(이비인후과, 외과, 산부인과)의 경우 편도수술 수가는 9.8%, 충수절제술 5.3%, 탈장수술 9.3%, 항문수술 1.3%,
자궁적출술 13.2%, 제왕절개술 9.1% 인상되었습니다. 당장 손해 볼 것은 없다는 말이죠.
근데 왜 강경하게 수술 거부라는 무리수를 들고 나온 걸까요?
사실상 의료정책 결정에 있어 배제되어 왔던 의료계와 고압적인 자세의 정부의 힘겨루기가 시작되었다고 봅니다.
그간 정부 측 입장과 의사들의 입장 사이에서 불분명한 태도를 취했던 의사협회 집행부가 물러나고,
강성의 집행부가 개원의들의 열렬한 지지를 받으며 이번에 새로 취임했습니다.
기형적으로 흘러온 보건의료체계의 판을 바꾸고, 의료계를 배제한 정부의 일방적 의료정책 결정 관행에 제동을
걸겠다고 나섰습니다.
사실, 이번 포괄수가제는 몇몇 공공의료기관에서 시범사업으로 수년 간 진행되었고, 용역을 받은 연구팀이
그 간의 결과를 종합하여 최근 보고서를 작성했습니다.
연구팀은 최종 결론으로 민간의료기관의 선택참여와 공공의료기관 당연 참여를 명시했습니다.
하지만, 보건복지부는 모든 의료기관 전면 참여를 결정하였고, 시행시기 또한 금년 7월로 앞당겨 결정했습니다.
연구 보고서에서 분명 전면적인 강제 시행은 문제점이 발생할 가능성이 있어 우선 공공의료기관부터 시작하여
점차 민간병원으로 확대해 나가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지적했지만, 보건복지부는 일단 시작하자고 강행처리 했습니다.
이에 의사협회 집행부는 건정심(건강정책심의위원회) 탈퇴와 이번 수술 거부 사태의 이슈를 만들어냈습니다.
일단 국민의 관심 밖에 있던 ‘포괄수가제 강제 시행’이라는 토픽을 핫 이슈로 만드는 데는 성공한 것 같습니다.
의사 단체 내부에서도 수술 거부에 대한 찬반양론이 뜨겁습니다. 개인적으로도 파업과 같은 극단적인 선택까지 가게
되지 않기를 바라지만, 의료 정책 결정이 합리적으로 이루어졌으면 하는 간절한 바램이 있습니다.
사실 이런 이슈들이 터져 나올 때마다 ‘히포크라테스 선서’는 잊었느냐, 의료 기술자가 아니라 의사가 되라… 등등의
의사 개인의 윤리성이 지적을 받곤 합니다. 하지만, 지금 언급하는 문제는 시스템에 대한 문제입니다. 저비용을 강요
하는 의료환경이 만들어낼 결과는 자명합니다. 보건 복지부와 정부는 이번 7대 질환 포괄수가제에 이어
의료 전영에 걸쳐 포괄수가제를 확대할 거라고 공언하고 있습니다.
주저리주저리 쓰다보니 길어졌네요... 기형적인 우리 의료환경에 대해서도 자세히 설명하고 싶지만,
오늘 진료 보는 중간중간 하루 종일 쓰다보니 지치네요...
관심 있는 분이 있는 지 모르겠지만, 우리 나라 의료 체계가 얼마나 특수한 지, 미국 등의 자본주의 의료제도와
영국, 유럽 여러나라의 사회주의 의료제도와 비교설명해보겠습니다. 다음 번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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