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양에서 쌀이 주요 작물이 된 점은 우선적으로 연간 강수량의 이유를 들수가 있습니다, 밀은 상대적으로 건조한 지역에서 잘 자라는데, 대체로 연강수량 500~1200 이내의 지역이 유리합니다 그러나 남한 지역이나 회수 이하의 남중국 지역은 연강수량이 1500대 근처의 고온다습한 지역이 대부분이라 벼의 생육이 밀의 생육 보다 유리합니다
또한 동아시아의 경우 계절풍 지대에 속해 한 계절에 강우가 집중되는데, 논농사는 수리시설등으로 물을 저장해야 하지만 일단 만들어 놓으면 밭농사와 달리 쟁기로 딱딱한 바닥을 힘겹게 갈아야 하는 수고를 덜 수가 있습니다. 물을 가두어 놓는 논이라 황소나 말등의 도움 없이 인력만으로도 써레질이나 잡초 제거가 가능하며 토양 유실도 상대적으로 적은 장점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벼의 생산성이 매우 높은 점을 들수가 있습니다. 1헥타르당 칼로리를 계산하면 옥수수나 감자가 물론 넘사벽이지만 이들은 1500년대 이후에야 도입되고, 밀과 쌀만 비교하면 거진 1.5~2배 가까운 효율을 보이기 때문에 높은 인구밀도가 가능하고, 앞에서 말한 것처럼 논농사는 가축이나 농기계에 대한 큰 자본투자가 적고(대신 수리시설에 대한 투자가 필요하지만) 전체적으로 노동집약적인 성격을 지니기 때문에 이 높은 생산성과 노동집약적 특성은 상호보완적으로 작용하여 높은 인구밀도를 유지시키게 됩니다.
일단 인구밀도가 높게 유지되면 다음부턴 다소의 위험이 닥치더라도 높은 생산성을 유지할 수 있는 논농사에서 벗어나기 힘든 굴레의 연속이 유지가 됩니다. 물론 동아시아 문명의 중심이었던 고대 북중국에선 건조한 기후 때문에 밀이나 맥, 조, 수수등의 밭작물이 중심이었고. 점차 쌀의 비중이 높아진 것은 남북조 시대 이후 고온 다습한 강남의 인구, 경제력이 성장하기 시작할 무렵이었습니다. 이는 지금도 북중국과 남중국의 식생활은 판이하게 다른 점을 사례로 들수가 있겠습니다,
논농사가 가뭄의 위험이 있다고 하지만 수리시설의 투자로 점차 후대로 갈수록 위험관리가 가능해지면서 위험을 극복할수 있었습니다. 반대로 밀의 경우는 기후에 의한 작황의 차이가 심하고, 밀의 재배지역이 대체로 수리시설의 비중이 적다는 것을 생각하면 오히려 위험성은 더 큰 문제를 안고 있다 볼수 있습니다.
중국의 대기근 사례를 보면 대부분 수자원이 풍부한 강남보다 북중국의 경우가 심했다는 점을 볼때 이는 앞의 문제를 증명함과 동시에 또한 논농사의 경우 '토양유실'을 최소화 할 수 있다는 매우 큰 장점을 설명해주는 부분으로 볼 수가 있겠습니다.
밭농사 지역의 경우 토양유실로 인한 지력의 쇠퇴, 염화현상등이 많은 문제가 되는데 논의 경우 물을 가두기 위해 경작지를 인위적으로 조성(물을 가둘 수 있게 둑을 쌓고, 경작지는 물을 채운 뒤 써래질로 평평하게 만들어 토양이 보존됨)하기 때문에 미세한 점토질의 보존을 할 수 있어 대체로 안정적인 재생산이 가능한 구조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동아시아의 경우 여름의 논농사-겨울의 보리 농사에 의해 1년 2기작이 가능한 것도 큰 메리트입니다. 이는 서양에서 밀-호밀, 귀리등과 대응되는 위계인데 대체로 밀과 쌀이 '고급'작물에 속하고 보리/호밀, 귀리등이 저급 작물에 속해 소비되는 계층이 달랐던 것도 비슷한 양상이죠(물론 조선에서 농민들이 쌀을 아주 못먹었냐 하면 그건 아니었지만)
교과서에도 나오지만 직파법이 아닌 이양법을 쓸 경우 보리의 생육기간이 충분하기 때문에 이기작을 위해서도 이양법이 확대되는 추세였죠. 감자나 고구마, 옥수수는 기존의 보리, 수수, 조등과 함께 하층민을 위한 중요한 작물로서 기능합니다.
청대 일부 지역에선 고구마의 가격이쌀의 1/10~1/20선에서 거래되는 경우도 있었으니까요. 이렇게 구황작물의 경우 높은 생산성과 낮은 가격으로 인해 하층민의 영양 공급에 큰 도움을 줬습니다.
더불어 논농사의 한계지역에서도 인구를 확대하는데 도움을 줬고 말입니다. 구황작물에 대한 자구책이 무슨 뜻인진 잘 모르겠지만 이런 대체작물들은 정부의 보급 노력이 아니라 인구압으로 인한 농민들의 자연스런 선택으로 보급이 확산됩니다.
사족을 더하자면 한반도의 경우, 고위도임에도 불구하고 벼농사에 미친듯이 매달린 끝에 거의 전국에서 벼농사가 가능했었던 점이 주목할만한 점입니다. 고려시대까지만 해도 대부분 밭농사에 매진했었고 '휴경농법'도 실시한 것 같습니다만, 조선초기에 들어서 상황이 상당히 바뀝니다.
'농사직설' 같은 조선초기 농서들을 보면, 매년-사시사철 농사를 짓는 '연작상경'으로 전환하는 모습을 보입니다. 그러면서 1.5기작이나 2기작이 널리 실시되는데, 일본학자 미야지마 히로시는 이를 당대 최고수준의 농업기술로 평하고 있습니다. 조선왕조는 이미 초기부터 '전근대 전통농업'으로는 거의 최고단계까지 레벨을 끌어올렸던 겁니다,
(저습지에 대한 간척 사업등 대부분의 큰강 유역이 본격 개발되는건 즉 경작지의 확대가 이루어지는것은 조선 후기부터입니다. 사실 조선후기의 인구증가도 생산성 증대도 있지만 이런 개간활동으로 인한 경작지의 양적 팽창 요인이 큰 역할을 한 것도 사실입니다. 그러나 조선왕조 내내 가경지 면적은 세종대와 크게 차이를 보이지는 않습니다.)
다만 면적상으론 지형적 요인으로 인해 밭의 비중이 큰게 당연하겠지만, 음식문화에서의 '위계'는 의심의 여지 없이 쌀이 중심이었습니다. 생산의 효율도 그렇고. 서양에서 밀과 그 보조작물(호밀, 스펠타 밀, 귀리, 보리 등)의 위상 차이와 비슷하게, 쌀과 밭작물의 문화적 위상 차이도 조선시대엔 이미 상당히 격차가 벌어졌습니다.
물론 독일에서 18세기까진 호밀이 밀과 대등한 위치였던 것처럼 한반도 북부에선 쌀의 우위성이 달랐다 라고 추측해볼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