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구가 지난 3번의 승격전 실패후에 드디어 골드를 찍더니 말했다.
'후 당분간 랭은 안 돌릴래. 일반 같이 돌리자'
'왜?'
'또라이들이 너무 많아. 겜하면서 스트레스 받는다'
순간 의문이 들었다. 왜 친구는 스트레스를 받으면서 까지 게임을 하며 골드를 찍어야 했을까.
돌이켜보면 나 역시 그랬다. 실버때는 '실론즈' 소리가 듣기 싫어 아군과의 말싸움을 최소화하고, 필요하면 차단까지 해가며 점수를 올렸다.
골드일때는 '골론즈' 소리가 듣기 싫어서, 플레티넘일때는 '플레기'소리가 듣기싫어서, 다이아를 찍으면 달라질줄 알았다.
다이아를 찍어도 팀원들의 패드립과 인격모독은 여전했다. 오직 이기고 점수를 올리기 위해, 멘탈을 챙기기 위해 전체채팅은 실버일때부터 항상 꺼두고 플레이 해왔다.
얼마나 올라가야 '그냥' 재미있게 플레이 할수 있을까? 주변의 시선이나 여론에 노출되어있는 다1 90이상 구간, 챌린저는 되야 패드립이나 시비, 정치질에 휘말리지 않고 게임할 수 있을까?
나름 매너있게 플레이 해 왔다고 생각했다. 남이 욕을하더라도 되도록이면 참았고, 패드립따윈 해본적도 없다. 아군의 플레이가 답답하더라도 '다음엔 ~~해주실수 있나요?'란 식의 요청으로 얘기해왔다. 솔직해져서 뒤돌아보니, 그 모든게 이겨서 티어를 올리고 남들앞에서 있어보이기 위한 나의 가식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속에선 열불이나고 패드립엔 맞패드립으로 대응하고 싶었으며, 트롤하는 아군이 있으면 쌍욕을 해주고 싶었다. 그러나 참았다. 티어를 높이기 위해서.
티어가 높다고 월급이 나오는것도 아니고 취업이 잘되거나 누가 치킨을 사주는것도 아니다. 그저, 뭣도 안되는 자존심. '나 이런 사람이다' 말하고 싶어서
생각해보면 제일 재밌는 게임은 아는 지인 5명과 모여서 팀랭을 돌리거나 일반게임을 할때다. 서로가 서로의 실력을 알고, 실수를 해도 웃어넘길수가 있어서였다. 승패에 연연하지 않았으며, 일부러 웃긴장면을 연출하기 위한 노력도 했다. 그럴때는 전체채팅을 켜고 상대팀과의 농담도 주고받으며 게임할수가 있었다.
강등을 막기위해 간만에 랭크게임을 돌리면 어김없이 스트레스가 찾아온다. 감이 떨어졌는지 라인전에서 실수가 반복되고 한마디로 '똥'을 쌌다.
아군 바텀듀오와 정글은 잘컸으나, 탑과 미드가 밀리는 상황이었고 한마디로 똥이 내려가고 있었다. 어김없이 바텀듀오와 정글러는 정치질을 한다.
탑 미드 달래서 줬더니 왜 쳐발리고 있냐. 심지어 적이 선픽이었고 카운터 픽들 뽑아놓고 뭐하냐, 손잭스 뇌문도냐. 가만히 입을 닫았다.
한타가 거듭될때마다 더욱 게임이 기울었다. 원딜은 탑 미드를 x신x끼들이 겜 말아먹었다며, 할줄모르면 남는 포지션이나 쳐 갈것이지...라며 욕섞은 말들을 내뱉기 시작했다. 미안하다 말렸으니 고기방패 템트리로 원딜보호 위주로 가겠다는 말을 했지만 그런다고 비난이 그치지 않았다.
한타나 소규모 교전에서 손해를 볼때마다 탑과 미드를 욕하는 원딜을 그냥 차단해버렸다. 의구심이 들었다. 저런식으로 날 비난한다고 해서 얻는게 뭘까
내가 욕을 먹는다고 게임의 판세가 달라지나? 아니면 탑과 미드에 책임을 떠넘기면 자신의 패배는 기록되지않나? 미안하다는데 계속 물고늘어지는 저 심리는 대체 뭘까? 차단을 하고나니 게임에 집중이 잘되는것 같았다. 게임의 승기를 잡았으며, 원딜에게 한마디 하고자 차단을 풀고 '말 그딴식으로 하지말라'고 하고있는데 적의 서렌이 나왔다.
점수창으로 넘어가고 한동안 원딜과 서폿은 '캬, 봇 캐리보소 ㅋㅋㅋ 미드 탑 개버스타네' '크레센도 무빙으로 피하는 피지컬 봄?ㅋㅋㅋ' 하면서 자신의 무용담을 펼쳐놓고 있었다. 내가 그를 차단해놓은 시간동안 얼마나 더 많은 패드립을 써댓을진 몰라도, 그의 머리에서 아군에게 욕을 해가며 정치질을 하던 자신의 옹졸한 모습은 사라지듯 했다.
그 모습을 보니 문득 생각이 들었다. 이제야 알겠다. 대부분의 한국 롤 유저들은 인정받기 위해서 랭크게임을 돌린다. 그들에게 롤이 재밌을지 어떨지는 몰라도 적어도 랭크게임은 스트레스의 연속일 것이다.
고랭커들은 '난 다이아 1티어에 있다. 상위 0.1%의 실력이다. 브론즈,실버는 이해할수가 없다. 어떻게 그렇게 못하지? 내가 우월한건가?'라는 사실로 자위질을 하고
저랭커들은 '난 실력은 되는데 운이 없어서 브론즈에 머물고 있는것 뿐이다. 그러니 얼른 티어를 올려 내 실력을 증명해줘야 한다'라는 강박에 시달린다.
내가보기엔 모든것이 경쟁속의 결과로 평가받는 한국사회의 특성때문이다. 물론 나도 그중 하나고. 실버,브론즈가 어때서? 거기선 그곳 나름의 진지한 한타와 치열한 수싸움이 존재한다. 그러나 다이아의 말 앞에 브론즈,실버의 말은 권위를 잃는다. 아무리 논리적인 말이라도 다이아가 뱉는 '실론즈가 뭘알아?' 또는 '심해성님 패기보소 ㅋㅋㅋㅋ' 라는 말 한마디에 정리가 되버린다. 브론즈,실버 역시 그런 쓰레기 같은 다이아가 뱉는 말에 상처를 받고 자존심이 상한다. 자신도 모르게 티어에 따라 서열을 세운다. 귀족과 천민이 되버리는 것이다.
그딴 다이아, 게임 점수좀 높다는게 뭔 자랑이라고. 현실에선 정몽준 아들이 뱉은 '미개한 국민'이라는 발언에 거품물고 달려들면서 게임상에선 지들이 자처해서 똑같이 하고 앉았다. 티어가 높다고 사람을 깔보는 것 자체가 그 인간의 인격을 대변해준다.
xx가 캐리했네, 라는 말에 심하게 반응한다. 인정받고 싶어 미친것 같다. 아군에게 'xx님 버스 감사요~'라는 말은 좀처럼 보기 힘들다.
'내 무빙 봄? 원딜캐리 아님? 노답들아 봐라, 이게 형 클라스다.' 그래봤다 시밤아. 너의 덜 배워쳐먹은 패드립과 욕설을
사람들은 항상 '나'는 높은 티어로 내 실력과 능력을 인정받아야 하고, '내' 캐리로 게임이 마무리되어야만 상쾌해하는것 같다.
높은티어를 타인에게 주는 상처나 조롱을 면죄해주는 자격증 비슷하게 생각하고, 승리를 위한 아군과의 합심보다 지더라도 '나는 잘했다'라는걸 인정받고 싶어하는 관심병 환자들이 넘쳐난다. '니들은 똥을 쌋지만, 나는 이 게임을 캐리했다. 나를 찬양해달라' 이걸 어필하고 싶어서 랭크를 돌리는지도 모른다.
아군을 욕하는건 '니들은 똥을 쌋지만' 이란걸 강조하기 위함인듯 하다. 전쟁속에서 영웅이 등장하듯, 찌질한 키보드 워리어가 스스로를 영웅으로 취급할걸 생각하니 역겹다.
티어고 뭐고 이젠 그냥 팀랭크나 5인 노말만 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