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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이다? 예술이 아니다?
지금까지 본 작품들은 모두 분야별로 예술성 논란에 끊임없이 휩싸였던 것들이었다. 필자는 미술과 조소에서 이런 류(?)의 알 수 없는 작품들을 제법 많이 접해왔었기 때문에 예술가들과 예술을 대하는 태도에 대해서 독자 여러분들과 하고 싶은 말이 참 많은데, 먼저 두 가지 이야기를 한 뒤에 말을 이어나가도록 하겠다.
01. 한 미술가 이야기.
어느 화창한 오후 한 여인이 파리의 거리를 한가롭게 거닐고 있었다. 바로 이 때 그녀는 길가의 한 카페에서 스케치를 하고 있는 한 화가를 발견했다. 그림 솜씨가 제법이었다. 그녀는 즉석에서 그 화가에게 자신을 스케치해줄 수 있느냐고 물었다. 그녀는 적당히 사례를 하겠다고 약속했고, 화가는 불과 몇 분만에 후다닥 여인의 초상을 그렸다.
"얼마를 드려야지요?"
여자가 물었다.
화가가 부른 값은 5,000 프랑.(약 600만원)
여자가 따졌다. 불과 3분만에 그린 그림인데 이렇게 턱없이 비싼 값을 부르는 게 말이나 되냐고. 화가는 무표정하게 대답했다.
"마담, 3분이 아닙니다. 내 그림은 창조입니다.
그리고 당신에게 이 정도 그림을 그려주기까지는 내 일생이 걸렸습니다."
▲ 이 화가는 파블로 피카소였다.
02. 한 영화 이야기.
이 화면은 2006년에 상영된 메릴 스트립과 앤 해서웨이의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Devil wears prada)의 한 장면이다.
우리들 대부분은 '하이패션'을 이해하지 못한다.(하이패션이 무엇인지는 아래 사진 참고.) 나같은 범인(凡人: 평범한 사람)의 눈에 하이패션은 '밖에서 입을 수 없는 옷'과 같은 단어이며, '캐주얼'의 범주를 벗어난 값비싼 '어떤 것'이라는 생각이 들 뿐이다. 이 세상을 사는 대부분의 범인(凡人)들도 나와 비슷한 생각을 한다.(적어도 내 친구들은 그렇다.) 그리고 우리는 어떤 연예인들이 C 브랜드의 오트 쿠튀르(haute couture) 1억원 짜리 재킷(또는 드레스)를 맞추는 것을 단순한 '돈지랄'로 보고 가십으로 삼는 것을 즐긴다. 한 마디로 예술가들과 그들이 쌓아올린 상아탑을 우습게 보는 거지. 예술은 돈 많은 사람들이 하는거야, 또는 허상이야. 라고 자위하면서 말이다.
▲ 이..ㅂ...입고다닐 수 있겠어?
어쨌든 앞서 소개한 '피카소'와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의 이야기는 그런 나와 내 친구들의 태도에 따끔한 일침을 날린다. 첫째로, 너희가 생각하는 것 만큼 예술가들은 뚝딱 만들어지지 않는다는 것. 둘째로, 많은 사람들이 '허황되다'고 외치는 예술의 세계가 알게 모르게 그대들을 먹여 살릴 수도 있다는 것을 말이다.
만약 당신이 자동차를 좋아한다면, 기술 속에서도 예술이 형성되는 것을 쉽게 발견할 수 있다. 매년 내노라하는 자동차 브랜드들이 1년을 하루도 거르지 않고 준비하는 신차 발표회와 컨셉트 카 발표회가 그것이다. 기업들은 신기술이 나오면, 그 기술을 자동차의 디자인과 조화롭게 만들기 위해 매년 수천억원의 돈을 투자한다. 기술이 크게 진보하지 못한 어떤 해에는 그냥 '껍데기'만 바꾼 자동차를 내놓기도 한다. 그럼에도 소비자들은 그 자동차를 구매하고, '신차'라 한다. 양산모델이 아닌 컨셉트 카 발표회가 주목받는 이유도 예술의 연장이라 볼 수 있다. 소비자들은 '그냥 붕붕카'를 구매하더라도 그냥 자동차 그 이상의 자동차를 만드는 기술력을 가진 회사를 선호하기 마련이다. 쉽게 설명해보자. 당신이 초등학교 3학년 여자아인데, 두 친구를 안다고 하자. 한 친구는 쉬는 시간에 5학년 수학책을 꺼내서 당신이 알아보지도 못하는 기호를 가지고 문제를 풀고, 한 친구는 그 학년에 맞는 진도로 공부를 하고 있다. 만약, 당신이 한 친구에게 3학년 수학을 배우고자 한다면, 당신은 어떤 친구에게 도움을 받겠는가? 답은 뻔하다. 5학년 수학책을 푸는 친구에게 도움을 받으려 할 것이다. 심지어 5학년 문제를 푸는 학생이 다른 학생과 시험 성적이 비슷하거나 조금 낮다고 하여도, 대부분의 사람들은 5학년 문제를 푸는 아이를 멘토로 삼을 것이다. 왜? 훨씬 진보적이니까. 마찬가지로 컨셉트카는 그 기업의 최신 기술과 미래 나아갈 방향을 보여주는 청사진이다. 사람들은 이 신기술 집약 자동차를 '기술'이라고 부르지 않는다. 대부분 구현이 미완성된 기술을 가지고 컨셉트카를 만들기 때문이다. 말 그대로 컨셉(Concept; 개념)인 셈이다. 그리고 그렇기 때문에 이런 컨셉트 자동차들은 발표가 끝남과 동시에 폐기되거나 시장으로 가지 않고 그 브랜드의 박물관 한 가운데에 보란듯이 전시된다. 컨셉트카는 기술이 아닌 '예술'의 대우를 받고 있다. 그리고 사람들은 이런 자동차 이상의 자동차를 만들 줄 아는 기업을 선호한다. 그들이 제시한 컨셉을 기대하면서 그들의 제품을 믿게되는 것이다. 기술을 예술로 승화시키는 순간이다.
▲ 아우디의 Concept car, 2011 Late ver. 예술이 기술이 되는 청사진이다.
그러나 아직도 예술이 자신과 동떨어져 있다고 생각하는 분들이 있다면, 그리고 지금도 이 세상을 떠다니는 수 많은 '자신과 관련 없어 보이는' 물건들이 예술인지 예술이 아닌지 고민하는 분들이 있다면, 필자는 이렇게 정리해 드리고 싶다. 각 분야의 전문가들이 충분한 준비 끝에 사람들과 소통하기 위해 세상에 내놓은 작품이 누구에게든 인정을 받으면, 그것이 바로 예술이다.라고. 그 소통이 대중들끼리 이루어지던, 비평가들끼리만 이해할 수 있는 소통이건 그것은 크게 중요하지 않다. 작품이 존재함만으로도 소통을 불러 일으킬 수 있다면, 그것만으로 한 사람의 '물건'은 예술로 평가 될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위에서 예를 들었던 '즐거운 사라'는 1992년에는 그냥 '야설'에 불과했다. 하지만 오늘날 '즐거운 사라'는 예술이 맞다. 그 내용이 오늘날의 사람들에게 그다지 거부감을 주지 않을 뿐더러, 이를 문학으로 인정하지 않는 사람 수 만큼이나 버금가는 사람들이 이 작품의 예술성을 인정해 주고있기 때문이다. 한 마디로 작품의 예술성을 판단하는 모든 요소는 개개인에게 있다. 그리고 당신은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물건을 예술이라고 수용할 수도, 물건이라고 거부할 수도 있는 자격이 있다.
다만, 필자가 예술을 선택하는 선택지를 당신에게 전면 위임했다고 해서 모든 예술을 쓰레기라고 치부하거나, 또는 현대미술을 하는 사람들을 이해할 수 없다거나, 마지막으로 이런 사람들을 싸잡아 허황된 몽상가들 이라고 함부로 부르는 우는 범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왜냐하면, 몇몇 작품만을 가지고 작가의 예술성이나 예술품의 가격을 왈가왈부 하기엔 당신은 너무나도 비전문가이고, 근거 또한 빈약할 것이기 때문이다. 모든 일이 다 그렇겠지만, 비판은 긍정보다 훨씬 더 조심스럽게 해야 한다. 만약 그렇지 않으면, 당신보다 미술에 조예가 깊고, 그 사람의 작품이 가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당신을 앉은 자리에서 무시할 것이다. 미술 애호가들이 무식하고 수동적이기 때문에 현대 미술품들을 터무니없이 비싼 가격에 구매하고, 칭송하고 있다는 착각은 제발 접었으면 좋겠다. 미술계는 더 이상 '벌거벗은 임금님'이 등장하는 멍청한 동화 속 세계가 아니다. 오늘날 임금님이 만약 벌거벗고 행진을 하고 있고, 그런 모습을 보며 사람들이 박수를 치고 환호를 하고 있다면 그곳에는 분명히 그럴만한 뭔가가 있다.
반대로, 예술가들이나 고등학생들도 '소통'하기 위해 자살을 하거나 자해를 하는 그런 멍청한 짓을 계획해놓고 자신의 행위를 예술이라고 표현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그것은 예술이 아니다. 그것은 단절된 소통이며, 일방적인 억지다. 이는 예술이 아니라 어린애 땡깡이다. 조금 극단적으로 표현을 한 것 같긴 한데, 죽음으로서 대의를 표하는 행위는 젠틀맨 리그(Gentleman League: 상식이 통하는 사회)가 아니었던 시절에나 예술로 통용되던 행동이었다. (전태일 변호사님과 간디의 단식투쟁을 떠올리는 사람들은 그 당시 사회가 젠틀맨 리그였는지를 다시 한 번 떠올려보시기 바란다.) 다시 한 번 말하지만, '자살, 자해, 상해' 등을 통해서 예술을 한다는 사람들은 (적어도 대한민국 내에서 만큼은) 문제가 있다.
▲ 매슬로우의 욕구 단계설.
예술은 맨 마지막 단계인 5단계에 있으며, 인간 본성 궁극의 욕구이다.
예술은 어렵다. 예술을 하는 사람도 여렵고, 예술을 보는 사람도 쉽지 않은 것이 예술이다. 그래서 매슬로우(Abraham H Maslow)는 예술을 인간 욕구의 상위에 놓았으며, 인간이 향유할 수 있는 쾌락 중 고급 쾌락으로 그것을 정의했다. 플라톤도 현재 눈에 보이는 미술들은 모두 '이데아'의 세계를 모방한 것에 불과하다면서 진정한 예술은 완성하기 어려움을 이야기했다. 아리스토텔레스, 샤프츠베리, 비움가르텐, 칸트, 헤겔 등. 당대 내노라하는 세계적인 철학자들도 예술(藝術)을 정리하기 위해 노력했지만 모두가 만족할 수 있는 예술의 정의를 내놓은 학자는 아직 존재하지 않는다. 다만 그들이 예술에 대해 가진 공통적인 견해가 있었다면, 그들 모두 예술을 '자기 주관'대로 정의했다는 점일 것이다. 당신과 나도 마찬가지다. 당신과 나의 예술은 다를 수 있으며, 설령 우리가 이것이 예술이라고 지금 당장 합의를 본다고 하여도, 우리들의 자식 세대에서 이것을 예술로 인정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그때 만큼은 예술이 아닐 것이다.
하지만 이렇게 어려운 예술에 사람들이 집착하고, 예술을 사랑하고, 끊임없이 예술을 하는 이유는 예술이 그만큼 재미있기 때문이다. 예술은 직관적이고 함축적으로 우리들의 과거, 현재, 미래를 연결하는 가교이다. 때론 밑도 끝도 없이 우리네 삶에 질문을 던지기도 하지만, 그것들이 인간의 미래를 결정하는 이정표가 되기도 한다. 그리고 이런 반열에 오른 예술가들을 우리는 '거장'이라 칭하며 그들의 이름을 평생 기억한다.
모든 예술이 세상에 물음을 던지진 않는다. 하지만 우리가 오늘날까지 사랑하고, 기억하고, 진정한 예술로 기억하는 거의 대부분의 '걸작'들은 획일적인 세상에 질문을 던졌던 작품들이다. 다시말해, 거장들의 작품들은 대부분 논란과 이슈의 중심에 있다가 예술로 인정받은 작품이었다. 피카소의 작품이 그랬고, 마네의 그림이 그랬고, 비틀즈의 음악이 그랬고, 스티븐 스필버그의 영화가 그랬다. 그리고 이 뒤를 잇기 위해 귀여니와 김인규씨, 그리고 낸시랭 같은 사람들은 오늘도 예술이냐 외설이냐의 기로에서 열심히 세상을 향해 질문을 던지고 있다. 이 사람들을 거장의 반열에 올려놓을지 그냥 '미친사람'으로 남겨둘지를 결정하는 것은 당신 몫이다.
다시 한 번 말하지만 예술의 기준은 분명 우리들의 마음속에 있다. 그러니 열심히 감상하고, 열심히 질문하자. 그렇지만 나는 당신이 섣불리 비판하진 않았으면 좋겠다. 무식하면 용감하고, 용감하면 좋긴 한데, 잘못하면 본인 뿐만 아니라 주변 사람들이 피곤해질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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