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참전군인 추가수당(보너스) 제도
미군은 건국전쟁인 독립전쟁때부터 참전 용사들에게 추가수당을 지급했다.
이건 전쟁에 참여하느라 사회에 있을때보다 수입이 떨어지는데 대한 보상책이였다.
독립전쟁의 병사들은 80 달러와 1백헥타르의 토지를 받았다.
이 제도는 쭉 유지되다 미국-스페인 전쟁때 폐지된다.
2. 1차대전때의 추가수당
1차대전 참전 용사들은 1인당 60 달러를 받았는데, 전사자 9백만에 달하는 지옥을 겪은 사람들에게 이건 너무 적다는 여론이 생겨났다. 하원은 이 여론에 응해 미국내 복무자들은 1일당 1달러로 최대 5백달러, 파병 군인들은 1일 1.25 달러로 최대 625달러를 추가 지급하는 법안을 의결한다. 쿨리지 대통령은 반대했지만, 외회는 대통령의 거부권을 찍어누르며 가결했다. 추가 지급 대상자는 약 360 만명, 지급액은 약 36 억 달러. 꽤 큰 돈이기에 의회는 이 돈을 신탁기금을 부어 만들기로 하고 20년짜리 신탁기금을 만든다. 이 예산이 완성되 돈을 지급하는것은 1945년.
3. 경제대공황
그런데 경제대공황이 터졌고, 1932년에는 미국내 실업자가 1,300 만명을 돌파했다.
많은 사람들이 극빈층으로 전락해 판자집을 지어 연명했고, 이들중에는 1차대전의 퇴역병들도 많았다.
퇴역병들은 정부가 자신들의 돈을 가지고 있다는걸 알았고, 당장 판자집에서 연명하는 처지이니 그거라도 받으면 상황이 나아질거라 생각했다. 그리고 그 자신도 1차대전 참전용사인 하원 의원 라이트 패트먼이 이들의 고통에 공감해 보너스를 당장 지급하는 법안을 발의했다. 정부는 원칙,재정상의 이유로 반대했다.
이 소식을 들은 전국의 퇴역병들중 일부가 워싱턴에 가족들까지 데리고 상경했고 그 수는 2만 5천명에 달했다. 퇴역병들은 판자집을 짓고 지내면서 매일 거리를 행진하며 법안 통과를 요구하는 시위를 벌였고, 스스로를 보너스 원정대라 불렀고 사람들은 보너스 군대라고 불렀다. 여론은 이들을 공산당 사주를 받아 공산혁명을 시도하는 빨갱이 폭도들이라고 보도했다. 당시 높으신 분들도 이들을 퇴역병인척 하는, 소련의 사주를 받은 빨갱이 폭도로 생각했다. 익숙한 풍경이다.
4. 진압
즉시 지급 법안은 하원을 통과했으나 상원에서 기각되었고, 정부는 퇴역병들에게 기차표를 주며 돌아가라고 했지만 약 6천여명만이 돌아갔고 나머지는 남아서 시위를 계속했다. 한달넘게 계속된 시위에 정부는 경찰에게 해산을 재촉했지만, 경찰은 시위대가 대규모인데다 궁지에 몰린 사람들이라 진압을 시도하면 대규모 폭력사태가 발생할 것이라고 경고한다. 그러나 정부는 계속 진압을 명령했고, 경찰이 진압을 시도했으나 예상대로 대규모 폭력사태가 발생했다. 그 와중에 겁먹은 경찰관 한명이 발포해 버리며 시위대중 두명이 사망했다.
사태가 이 지경에 이르자 후버 대통령은 연방군에게 진압을 명령했고, 당시 육군 참모총장인 맥아더가 직접 나선다. 맥아더는 다른 높으신 분들처럼 시위대가 퇴역병들이 아니라 소련의 사주를 받아 정부전복과 공산혁명을 시도하는 빨갱이 폭도들이라고 여겼다. 그리고 이들중 1할정도만이 실제 퇴역병이고 나머지는 공산당 폭도일거라 주장했다. 부관이였던 아이젠하워의(2차대전 유럽연합군 최고사령관, 미 대통령도 되는 드와이트 아이젠하워.) 만류에도 불구하고 맥아더는 패튼의 (성질 더러운 조지S패튼) 3기병대를 선두로 6대의 전차와 1개 보병연대까지 동원했다.
패튼은 후일 2차대전에서 자기 병사들에게도 우리의 피에 굶주렸다는 말을 듣고, 전장의 미친개나 싸움닭이라고 불리는 호전적인 사람이다. 그런만큼 진압은 전차를 앞세우고 판자촌을 향해 돌격앞으로. 최루가스를 뿌리고 기병대가 돌격하며, 그 뒤를 착검한 보병대가 뒤따르며 시위대를 판자촌으로 밀어넣었다. 패튼은 소위시절에 맥시코 내전에서도 사살한 적 장군의 시체를 자동차 본네트에 매달고 다니며 호전성을 보였었고, 맥아더도 그의 호전성을 잘 알고 초강경진압을 위해 앞세웠을 것이다.
진압을 명령했던 후버 대통령도 맥아더가 이렇게 막 나가자 경악해 중지를 명령했지만, 맥아더는 대통령의 명령을 무시하고 전차로 시위대의 판자촌을 짓밞고 불태워 말 그대로 쓸어버렸다. 아기 두명이 최루가스에 질식사했고 임산부 한명은 유산했으며 총 사상자는 백명이 넘었다. 안그래도 경제 대공황으로 억울한 욕을 들어 처먹으며 급락하던 후버의 평판은 이 일로 바닥을 파고들었고, 이런저런 일들이 겹쳐 다음 대선에서 루즈벨트에게 패배한다.
(대공황은 후버탓이라고 할수 없지만. 대통령중 책임 소재자를 찾자면 전임자 쿨리지다. 이것은 김대중 대통령이 IMF 로 욕먹는것과 비슷한 것.)
한편 조사결과 몇몇 높으신 분들이나 맥아더의 주장과 달리, 시위대의 95% 이상이 소련의 사주를 받은 빨갱이 폭도가 아닌 진짜 퇴역병과 그 가족들로 밝혀졌다.
5. 맥아더의 후일담
맥아더도 대통령의 명령을 무시하고 유혈사태를 만들어 평판이 급락했고, 루즈벨트때 군비 감축으로 대통령,의회와 싸우다 육군 참모총장에서 짤리고 필리핀 군사고문으로 파견된다. 한편 불쌍한 아이젠하워는 5년간 맥아더의 뒤치닥거리 부관질을 하고도 필리핀까지 끌려가 4년간 맥아더의 뒤치닥거리 부관노릇을 해야했다. 그는 대대장노릇 한번 못해보고 맥아더의 뒤치닥거리나 하며 소령~중령 시절을 보냈지만, 9년간 데이고 뒤치닥거리를 한 경험으로 맥아더에 대해 충분히 잘 알게 되었고 그를 경계하게 되었다.
그런데 필리핀은 그의 아버지가 3대 총독이고, 2대 대통령이 맥아더의 죽마고우이며, 그가 어릴적 지내고 예전에도 복무했던곳이니 맥아더 입장에서 그렇게까지 나쁜곳만은 아니였다. 맥아더는 필리핀군의 원수계급을 받았는데, 이걸 얼마나 마음에 들어 했는지 2차대전에서 미 원수계급을 받은 후에도 필리핀 원수의 모자를 쓰고 다녔다. 그의 유명한 사진인 선글라스 + 담배 + 모자 사진에서의 모자도 필리핀 원수모.
그리고 그의 할아버지가 영국 귀족가 출신이자 위스콘신 주지사, 아버지는 남북전쟁,미국-스페인전쟁,미국-필리핀 전쟁의 소년 전쟁영웅이며, 겨우 20세에 연대장이 되고 중장 예편하고, 필리핀 3대 총독을 지낸 초 엘리트 가문인지라 이따위 짓을 하고도 그의 출세에 지장이 생기지는 않아 2차대전에서 원수까지 진급한다. 그의 몰락은 후일 한국전에서 중공군과의 전투에서 한 삽질과, 또다시 대통령의 명령을 무시해서 시작되었다.
그리고 맥아더는 후일 대통령들에 대해 평할때, 다른 대통령들은 깟지만 후버만은 나쁘지 않았다고 평했다. 자기 하고 싶은데로 해본 시절이라 그런듯.
6. 루즈벨트가 문제 해결
이때 해산당한 보너스 원정대는 전국에서 겨울내내 시위와 폭동을 벌이다 루즈벨트 당선 후 다시 워싱턴에 모여 시위를 벌였다. 루즈벨트도 원칙과 재정문제로 조기 지급은 반대했지만, 경찰이나 군대 대신 아내 엘리너에게 커피를 잔뜩 들려 보냈다. 엘리너는 시위대에게 폭력을 쓰는 대신 대화를 나누고 커피를 마시고 노래를 부르며 어울렸고, 루즈벨트는 보너스 조기지급대신 뉴딜정책 공공건설 일자리의 제공을 제안한다. 퇴역병들은 썩 만족하지는 않았지만, 조기 지급을 요구한 근본적 원인이 대공황-실직때문에 생긴 먹고사는 문제였기에 이 제안을 받아들여 플로리다 키스 제도의 도로건설에 참여했다.
7. 그런데 조기지급 법안 통과
그런데 1935년 이곳을 대규모 허리케인이 덮치며 이곳에서 일하던 퇴역병 3백여명이 사망했다. 이 재앙에 퇴역병들에 대한 동정여론이 형성되었고, 그 여론에 36년 의회는 쿨리지 때처럼 루즈벨트 대통령의 반대권을 찍어누르고 조기지급 법안을 가결시킨다.
나라를 위해 싸웠는데 먹고 살기 어려워 참전 수당좀 미리 달라했더니 빨갱이 취급과 전차까지 동원해 짓밞아 아기와 태아까지 포함해 백명에 달하는 사상자가 나오고, 이후 돈 대신 받은 일자리에서는 자연재해로 3백명 넘게 죽었으니 보너스를 미리 받았어도 새옹지마라 하기에는 너무 안습.
8. 제대군인 원호법
한편 이 사건으로 뭔가 배운 의회는 1944년 제대군인 원호법을 만들었다.
이 법안은 상이용사에게 연금,주택,교육,의료보험,직업훈련등에 대해 혜택을 주었고, 2차대전 참전 용사들의 사회 재적응에 매우 큰 도움을 주었다. 그리고 이 법안덕에 중산층이 확대되고 전후 경제공황이 예방되었다 한다.
댓글 분란 또는 분쟁 때문에 전체 댓글이 블라인드 처리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