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진실과 선악의 강박을 깨다.
라쇼몽
한 스님이 한숨을 푹푹 내쉬고 있다. 왜인고 물으니 자기 머리로는 대체 뭐가 진실인지 알 수가 없으니 얘기를 들어달라고 한다.
4명의 인물들이 다양하게 얽힌 치정. 하지만 이야기를 들을수록 당연히 뭔가 얻을 수 있으리란 관객의 기대는 산산이 깨져 버린다.
이 사람의 얘기를 들어 보면 이 사람의 얘기가 맞고, 저 사람의 얘기를 들어보면 저 사람의 얘기가 맞으니. (사람.. 이라는 표현이 틀릴 수도 있다. 이 중엔 망자-귀신의 얘기도 포함되므로.)
"저도 모르겠군요."
"그렇죠?" 다시 한숨을 내쉬고 먼 산을 바라보는 스님의 눈길.
영화, 병맛 터지는 리얼리티 판타지.
디스 이즈 디 엔드
이 영화에서 모든 배우들은 각기 자신의 실제 이름을 갖고 있다. 유명한 배우들인만큼 그들에게 싸인을 해달라거나 사진을 찍어달라는 사람들이 많은데 이들에 순순히 응해주곤 한다.
"우리 어디 갈거야?" "그린 고블린(스파이더맨 배역 이름-위 사진 맨 왼쪽)네. 걔네 집에 마약이 산더미처럼 쌓였대."
설마 하고 넘어간 다음 장면에서는 정말 '그린 고블린'이 자기네 집 문을 열어준다.
"헤이, 그린 고블린! 스파이더맨은?" "나보고 그렇게 부르지 말랬지?"
이렇게 광란의 파티가 시작되는데 갑자기 혜성이 떨어지고 한꺼번에 사람이 죽어나간다. 그야말로 세계의 종말. 이 상황에서 헐리웃 스타들은 어떻게 대처를 할 것인가? 스타들이 총 출동한 기상천외한 마지막 엔딩까지, 우습기 짝이 없다.
영화, 시민들이 함께 만들다.
고진감래
특이하게도 이 영화는 서울 시민들이 그들이 속한 일상들을 영상으로 찍어 만든 영화다.
이 영상들을 모아 한 편의 영화로 만든 감독은 무려 박찬욱. 그 특유의 이죽거리는 듯한 연출이 나타나지 않을까 걱정할 필요는 없다. 시종일관 영화가 보내오는 메세지는 따뜻하기 짝이 없다.
사람들의 소소한 일상과 그 속에서 밀려오는 감동.
그리고 서울, 살 만한 도시라는 생각이 드는 귀여운 영화.
영화, 새로운 공간에서 펼쳐지다.
언프렌디드 : 친구삭제
올해 봤던 영화 중 가장 특이한 영화. 위 사진에 나와 있는 노트북 모니터 화면 속에서 모든 스토리와 상황들이 펼쳐진다.
조금만 발을 헛디뎌도 심각한 망작으로 빠질 수 밖에 없는 상황이나, 나름대로 괜찮은 스토리 라인 속에서 납득할 만한 전개가 펼쳐진다.
더군다나 몇 몇 장면은 꽤나 공포스럽기까지 하다!
영화, 만화와 현실을 넘나들다.
스페이스잼
당대 최고의 선수였던 마이클 조던이 그의 직업인 농구선수로 나온다는 설정 말고도 이 영화는 재밌는 점이 있는데, 현실과 만화 속을 수시로 오간다는 점이 그 것이다.
기승전결로 흐르는 부분에 있어서는 약간 버벅대는 듯한 느낌이 들지만 만화 속 주인공들의 도움을 받아 난관을 극복하는 실제 인물의 모습이 꽤나 신선하게 느껴진다. 물론 만화 영화와 영화 배우가 한 프레임 속에서 등장하는 영화로서는 처음이 아니다. (브래드 피트의 <쿨 월드> 등) 하지만 이 중에서는 가장 자연스럽기 때문에 이 영화를 선정.
영화, 평범한 시민들의 표정으로 만들다.
잭 애스 : 배드 그랜파
미국에서는 굉장히 유명한 코미디언이 할아버지로 분장하고 손자 앞에서 각종 사고를 치는 모습을 담은 영화다.
이 할아버지는 일반 시민들 앞에서 깽판이나 다름 없을 정도의 막 나가는 행동들을 보여준다. 관을 떨어뜨려 시체를 바닥에 엎어지게 한다던지, 장례식에서 싸움을 한다던지, 자신의 성기를 자판기 안에 집어넣는다던지, 역시 성기의 일부를 내놓고 여성용 스트립 클럽에서 춤을 춘다던지.
그저 영화적 연출로 그쳤으면 재미가 반감되었을 테지만, 이 영화는 마치 다큐멘터리처럼 이 할아버지를 대하는 일반 시민들의 표정을 그대로 담아낸다. 누구는 배꼽을 쥐고 웃기도 하고, 누구는 위협적으로 그의 주먹을 할아버지 얼굴에 들이밀기도 한다.
영화, 홍상수 스타일의 극한을 드러내다.
옥희의 영화
홍상수 감독은 촬영 전 날, 혹은 당일 대본을 써 오고 배우들에게 적극적으로 애드립을 주문하기로 유명한 감독이다. 그랬던 홍상수가 이번에는 그가 가진 연출의 극한을 선보였다. 대본 없이 배우들의 합 만으로 영화를 만들기 시작했고, 결국엔 완성까지 이르른 것이다. 게다가 영화가 던지는 메세지도 오히려 이전 작품들보다 더 선명하다.
배우들은 실제로 막걸리를 마시고 실제로 취해 횡설수설 영화적 흐름과 상관 없는 얘기를 늘어 놓는다. 그래서인지 이 영화, 도도히 흐르는 물결 속에서 펄떡거리면서 날뛰는 생선이 가질 법한 생동감을 지녔다.
영화, 배우들을 고문하다.
블레어 윗치
<파라노말 액티비티> <REC> 등 핸드헬드-1인칭 촬영기법으로 만들어진 영화들의 원조격인 영화를 꼽으라면 이 영화를 꼽을 수 있다. 이 영화의 마케팅 방법은 굉장히 독특했는데 영화가 개봉할 당시부터 내려갈 때까지 언론 등을 통해 '이건 실제 일어났던 영상을 습득해 공개하는 것'이라 마케팅을 뿌려댔다.
놀랍게도 이에 많은 사람들이 속아 넘어가 영화 촬영 장소에서 수 많은 호러 매니아들이 숙식하는 등 난리통이 일어난다.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속았던 까닭은 배우들이 보였던 공포의 감정이 진짜였기 때문이다. 이 영화는 배우들을 산 한 가운데 떨어뜨려 놓고 큰 틀에서 어떤 행동을 요구하는 대본만 수시로 주었다고 한다.
그랬기 때문에 예상치 못한 상황에서 습격을 받거나 하는 장면들에서 배우들은 공포에 휩싸여 '진짜로' 도망갔고 이들이 보여주는 이 생생함은 리얼리티 호러에 한 획을 그었다.
영화, 리얼리티를 저주하다.
무서운 집
그 동안 영화라는 매체는 자신이 영화라는 사실을 지우기 위해 부단히 노력해 왔다. 특히 각종 촬영 기법의 발전은 관객들이 영화에 몰입해 영화로부터 '튕겨나가지 않도록' 단단히 단속한다.
네이버 영화에서 4000원에 서비스 하는 이 영화(알바 아님)는 이렇듯 역사를 통해 쌓아온 영화적 노력을 완전히 부숴 버린다.
이 영화가 진짜가 아니라는 사실을 형편 없는 배우의 연기와 어설프기 짝이 없는 미쟝센을 통해 강조, 관객들로 하여금 끊임 없이 영화로부터 튕겨져 나가게끔 만든다.
귀신을 보고서 몸 보신을 해야 한다며 열심히 음식을 만드는 등장 인물의 모습에, 또 이 음식이 어떻게 만들어지는지 웬만한 요리 프로그램 능가하는 차분함으로 기다려주는 연출적 인내심에 감탄을 금하지 못 했다.
온 몸으로 망작임을 강조하고, 몰입하고자 하는 관객을 끊임없이 튕겨내는.
영화, 고전 속에 로봇을 집어 넣다.
엑스마키나
이 영화에서 등장 인물은 4명에 불과하다. 갇힌 로봇, 로봇의 주인, 그의 하녀, 인간적 감정이 넘치는 주인공까지.
이러한 적은 숫자의 배우 구성과 이 속에서 펼쳐지는 제법 우아한 기승전결은 고전 서양 연극을 떠올리게 만든다. 다만 등장 인물이 로봇이라는 점이 다를 뿐. 하지만 이런 '사람이 아닌 것의 배치'는 굉장히 묘한 효과를 낳는다. 등장 인물들 간에 펼쳐지는 긴장의 주체 중 하나를 '사람이 아닌 것, 그래서 사람으로서 이해하기 힘든 것'으로 뒤바꿈으로써 별다른 노력을 하지 않고도 예측 불허한 흐름으로 나아간다.
당신은, 당신의 피조물이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고 있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