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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인에게.
[그러니까 그런 이야기지. 넌 지금 하체가 병신인 나를 보며 안쓰러워하거나 혹은 별 생각 없거나 늙고 쭈글쭈글한 날 보며 혐오감을 느낄지 모르지만 사실은 그런 게 중요한 게 아니지. 난 말이지. 세상에서 한발 떨어져서 보는 능력이 있어. 뭐, 대단한건 아니야. 사람들이 모두 가지고 있지만 잘 사용하지 않거나 사용하는 법을 잊어버리는 능력이지. 그러면 지금 뭐가 중요하느냐. 바로 너의 태도를 보며 내가 어떻게 느끼는지가 중요한거야. 아, 물론 그건 나한테 중요한거지. 너한테 중요한건 내 외모나 태도가 너에게 어떤 느낌을 주느냐지.]
노인은 평온한 표정으로 진지한 이야기를 내어놓았다. 노인의 상태를 확인하던 간호사는 언제나처럼 시작된 그의 설교를 차분하게 들어주고 있었다.
[자신과 타인. 그건 그런 관계인거지. 그래서 인간은 오해를 하고 불화를 조장하고 서로 시기하며 질투하고 미워하는 거지. 인류가 존재하는 한 절대 없어지지 않는 것이 있어. 바로 싸움이지. 그래서 신은 인간에게 나와 같은 능력을 준거야. 한발자국 물러서서 보라고.]
간호사는 노인의 이야기가 길어질 것 같다고 느꼈는지 익숙한 몸놀림으로 간이의자를 빼어 노인의 침상 옆에 놓고 앉았다. 노인은 간호사를 쳐다보며 조곤조곤 이야기를 계속해 나갔다.
[그런데 사람들은 못해. 안해. 왜? 비참하거든. 잘 봐. 한발자국 물러서서 나를 내가 봤어. 자기객관화라고하지. 이게 상당히 고통스러워. 그렇지 않겠니? 나이는 이제 80넘어서 90을 향해 가지. 피부는 탄력이 없고 머리는 숱이 없고 하얗게 세었고 머릿결도 힘이 없고 빛이 바랬어. 거기다가 하체는 맛이 갔어. 다리는 물론이고 성기에도 힘이 안 들어가. 남자가 고자가 된다는 건 이제 살 의미가 없다는 거야. 한심하고 무능해보이지. 그래서 사람들은 자기객관화를 적정 수준만큼 만 하거나 아예 하지 않아. 비참한 자신을 깨닫기가 싫으니까.]
노인은 잠시 숨을 들이마셨다. 길게 말을 하자 호흡에 무리가 오는 듯했다. 이윽고 간호사를 바라보던 시선을 힘겹게 창밖으로 옮기며 노인은 계속 이야기를 했다.
[그런데 난 하고 있어. 왜? 그게 첫 걸음이거든. 자신을 인정해. 자신을 깨달아. 자신의 모습을 다시 한 번 평가해봐. 그리고 자신의 위치를 찾는 거지. 내 위치는 지금 아주, 아주 낮을 거야 아마. 그런데 왜 내가 살아 있는 줄 알어? 난 아주, 아주 낮은 곳에 있는데 나보다 낮은 곳에 있는 사람들이 더 많아. 인생이란 그런거야. 끝이 없어. 추락하는 곳은 말이지. 더 이상 잃을게 없다고 생각하는 순간에도 또 잃을게 있는 게 인생이지.]
노인은 이제 간호사의 존재를 신경쓰지 않는 것처럼 아득한 시선을 창밖을 향해 보냈다. 무언가를 찾는 듯 했고 그립게 회상하는 듯 했다. 아니면 간호사와 다른 사람의 눈에는 보이지 않는 무언가가 보이는 것 같기도 했다.
[사실은 그렇지. 나라고 해서 24시간 항상 자기객관화를 잘 하고 있는 건 아니야. 나도 인간이니 감정에 휩싸이고 실수를 하고 죄를 짓고 오판을 하지. 그런데 중요한건 그런거야. 문제는 문제를 인지하는 것부터 시작해야 문제를 해결 할 수 있지. 무슨 말인지 알겠나? 저 한심한 인생들을 바라보며, 또 한심한 나를 바라보며 그게 한심하다는 걸 알아야 해결책을 찾는 다는 이야기야. 내가 한심한지 모르면 난 이대로 계속 쭉 살겠지. 살인이 죄 인줄 모른다면 수틀리면 살인하고 그렇게 쭉 살겠지. 그게 나와 다른 이들의 차이이지.]
간호사는 차트를 꺼내어 갑자기 무언가를 적기 시작했다. 노인은 그런 것 마저 신경쓰지 않았다. 익숙한 광경이여서 그런 것인지 아니면 자신의 이야기에 심취해있는지 알 수는 없었다.
[그러니까 인간들은 알아야해. 진실을. 그래야 그 진실을 바꾸도록 노력을 하거나 해결책을 찾지. 변화는 변화의 필요성을 느껴야 일어나는 거야. 물론 해답이 없는 것도 있어. 나를 봐. 내 인생은 어떻게 해야 다시 일어날 수 있지? 사실 답은 없어. 그럴 땐 난 이렇게 하지. 내 과거를 돌아보는 거지. 그러면 답이 나와. 무슨 답? 지금 이 상황은 내가 과거로 일백 번 돌아가도 바뀌지 않을 거야. 후회란 그런거지. 그러니까 어떻게 해야겠어? 그냥 지금을 받아들이고 만족하고 살아야지. 가끔 이런 애들이 있어. 돈 많은 새끼들. 그 새끼들 티비에 나오면 이렇게 말하지 “난 젊었을 때 일 밖에 한게 없어서 돈은 많지만 청춘을 버린게 너무 아깝다. 지금이라도 그 청춘을 찾고 싶다.” 개소리 하지 말라고 그래. 나한테 걸리면 아주 주옥되니까. 잘 들어. 그 새끼들이 그런 소리를 티비에서 할 수 있는건 청춘을 버렸기 때문이야. 그놈들이 청춘을 다 즐겼으면 그 자리에 없어. 그런거야. 그런데 그런 헛소리를 하고 있지.]
노인은 감정이 격해졌는지 숨을 몰아쉬면서도 길게 이야기를 했다. 여전히 목소리는 조곤조곤했지만 그의 얼굴은 약간 상기되어있었다. 간호사는 역시 노인을 살피며 차트에 끊임없이 무언가를 적어나갔다.
[사실 우리는 모두 이렇게 생각해야하는 거야. 지금 이 위치. 이 삶이 내 최선이었다. 그걸 부정하면 넌 최선을 다해 안 살았던거야. 여기에 사람들은 불만을 품겠지. 나처럼 하찮은 인생인 애들은 말이야. “난 더 잘 할 수 있었어. 내가 안했던거 뿐이야.” 아니지. 못한거야. 그놈들은 다시 과거로 돌아가도 못해. 진지하게 물어봐. 그 정도 밖에 노력 못하는게 너야. 그리고 나지. 그게 진정한 자기 객관하야. 그래놓고 이제 와서 과거타령을 하지. 한심하지 않나? 그래, 과거는 바뀌지 않아. 후회는 아무리 빨리해도 늦은게 아니라 후회는 병신짓이야. 물론 순간 순간의 선택이 안타까울 수 있겠지. 내가 못해본 것. 내가 못가본 길이 아쉽고 더 좋아보일 수 있겠지. 그런데 넌 이미 여기 있잖아. 나도 이미 여기 있고. 그러면 별말 할 필요가 없는거야. 못해본걸 아쉬워하고 후회하는 놈이 젤 멍청한 놈이야. 그럴 꺼면 그때 하지 그랬어? 안했지? 그럼 넌 그냥 그런 놈이야. 나도 그냥 이런 놈이지. 여기에 하체 고자 80대 노인이 바로 나야. 난 자연스럽게 늙어가는 것이고 내 인생의 오점은 있을지 모르지만 난 후회없어. 지금 이렇게 병신이 되었지만 이것도 내가 바꿀 수 없는 안타깝지만 받아들여야 할 일이지. 우리가 이 자리에 있는 건 그 당시에 우리가 할 수 있던 최선이 그거 밖에 안됐기 때문이야. 우리는 다들 이렇게 흘러온거야. 물론 그런 자신이 한심하다는 것을 인정한다면 지금 부터라도 바꾸려고 해야지. 그래서 인정하는 게 중요한거야.]
노인의 목소리는 간간히 잦아들다가 돌아오곤 했다. 하지만 그런 호흡 속에서도 또박또박 자신의 말을 전했다.
[간호사, 난 사실 내 삶의 끝을 아직 몰라. 죽을때가 되면 다들 안다는데 난 아직 죽을 때는 아닌가봐. 며칠이건 몇 주건 아직 남긴 남은 것 같아.]
노인은 간호사에게 시선을 돌렸다. 노인의 눈동자에는 말로는 표현할 수 없는 많은 감정이 담겨있는 듯했다. 하지만 그건 후회나 슬픔, 쓸쓸함 같은 그가 당연히 보여야할 감정이 아니라 무언가 기대와 희망이 가득한 감정들이었다.
[나는 나를 받아들이고 있네. 조금 사족을 단다면 인간은 누구나 내면에 괴물을 안고 살지. 나는 그 괴물조차도 인정하고 받아들이고 있지. 그렇기 때문에 순간순간 내가 괴물이 되지 않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하고 제어하고 있어. 음, 내 안에 괴물에 대해선 내일 다시 이야기 하도록 하지. 이야기가 길어질 것 같은데 자네도 다른 환자들 봐주러 가야지. 너무 시간을 뺏어서 미안해. 단지 그걸 말하고 싶어.]
노인은 잠시 말을 멈추고 무언가 고민하다가 인자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이렇게 내 이야기를 들어주어서 고맙네. 자네가 그 차트에 무엇을 적는지 대충 짐작은 가지만 그런 것 보다는 이런 내 이야기가 끝날 때 까지 그냥 내 옆에 앉아있어 주는 것만으로도 난 너무 고맙네. 정말 고마워. 난 그걸로 만족하네.]
간호사는 그 말에 살짝 눈웃음을 지어주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노인은 병실을 나서는 간호사의 뒷모습을 끝까지 쫓다가 병실의 문이 완전히 닫히자 눈을 감고 잠을 청했다. 너무 많은 힘을 쏟아 이야기를 한 듯 아주 지쳐보였다. 하지만 그의 얼굴은 행복해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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