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에서 나가지 못한지 3달이 지났다.
아파트 22층에서 올려다 본 먹구름은 손에 닿을 듯 가깝게 느껴진다.
그래서인지 오늘따라 유독 짙어만 보였다. 비대한 먹구름으로 살찌운 하늘이 어찌나 우중충하고 묵직한지,
금방이라도 땅 위에 곤두박질쳐 버리는 건 아닌가, 걱정이 들 정도다.
하늘 따위 무너지면 좀 어떠하리. 적어도 비소식이 찾아 온 것은 분명했다.
내 방 천장에서도 비가 내렸으면, 그래서 몸을 좀 적실 수만 있다면 소원이 없을 것 같다.
방에서 나간다면 다른 무엇보다 샤워가 하고 싶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찬물의 세례가 찬송가처럼 쏟아지는 샤워기 앞에 서서.
한 줌 가득의 샴푸와 몸에 흘러넘칠 만큼의 바디샤워로 도배되고 싶다.
양털 같이 두툼한 거품 옷을 입는 그 순간이
너무나, 진저리나게, 몸서리 쳐질 만큼, 간절하고 간절하다.
어깨춤을 간지럽히는 머리칼을 고쳐 묶으려 머릴 풀었다.
엉덩이 골을 덮고도 남정네들 솥두껑 손으로 두 뼘즘 남을 검은 색 기름융단이 펼쳐졌다.
엄마가 가져다준 머리끈으로 머리를 묶었다 풀기를 벌써 몇 번 반복했는지 기억조차 없다.
기름덩어리 머리칼은 항상 내 신경의 칼날을 바짝 세운다.
맨 살에 닿는 그 께름칙한 감촉이 싫다. 소름이 끼칠 만큼 지저분하고, 끈적거린다.
누가 내 방에 자물쇠를 걸어 놓았다는 이야기는 아니다. 내 방문은 24시간 열려있다.
우리 집 현관은 허술하다 못해 무방비하다. 우리 아파트는 담장이 낮기로도 유명하다.
이 아파트 단지를 좀 벗어나고 싶다.
매일 풍경이 똑같은 창문 밖의 풍경에도 이젠 신경질이 난다.
나가서 좀 걸었으면, 아니 뛰었으면. 냉수 같은 아침공기 마시면서 커피 같은 오후 햇살 마시면서.
세 달 전 그 날. 그날 아침의 기억이 아직 생생하다.
아침 일찍부터 샤워를 했었고, 여유 있게 머리를 말렸다.
머리가 마른 후 30분간 대강대강 화장을 했다. 출근 복장은 즐겨 입던 검정색 스커트와 흰색 블라우스였다.
커피색 2호 비비안 스타킹을 신었었고, 아침 회의를 위한 서류봉투와 핸드백을 챙겼었다.
마지막으로 방을 나가기 전 확인한 핸드폰 충전상태가 98%였던 것까지도 기억한다.
그리고 화장대에 올려 둔 열쇠 꾸러미를 챙겨 내 방을 나서던 순간이었다.
세상의 모든 불빛이 깜빡 하고 점멸했다.
내 방을 나서고는 내 눈을 의심할 수밖에 없었다. 분명 나는 방문을 나섰다고 생각한 순간.
시야에 들어 온 것은, 그것은 다시 내 방이었다.
“어라?”
고개가 갸웃하고 돌아갔다. 어깨의 핸드백을 다시 고쳐 걸었다.
슥하고 뒤를 돌아보니 거실이 보였다. 나는 등을 돌려 다시 방을 나섰다.
깜빡….
“어라?”
그리고 나는 다시 방이었다.
아직도 하루 한 번씩은 다시 시도를 해보곤 한다.
방 문 앞에 서서 경건한 마음가짐으로 천천히 심호흡 하고, 굳게 마음을 가다듬고선 한 발짝.
그리고 또 깜빡…. 석 달째 나는 아직 방 안이다.
하릴없이 빈둥거리는 시간도 1, 2주. 컴퓨터를 붙잡고 있는 것도 지친지 오래였다.
이곳은 무음과 잡음의 경계를 넘나드는 심심함의 공간이다.
내 보폭으로 가로 여섯, 세로 네 걸음. 이 좁은 곳엔 엄마가 사다 준 생수병이 방구석에 탑처럼 쌓였고,
1주 동안 내가 만들어 낸 쓰레기가 철옹성 요새처럼 방벽을 단단히 하고 있다.
얇은 이불 두 겹과 높이 낮은 베개가 시체처럼 널브러져 있고,키 낮은 화장대는 소복하게 먼지만 쌓여간다.
그나마 화장실이라도 붙어있어 다행이었다. 작은 세면대 하나 없는 화장실이지만, 그마저도 없었다면 지금 즘 미쳐버렸을 것이다.
핸드폰을 열어 엄마에게 메신저를 보냈다. 뭐해? 하고.
지금 보내면 아마 엄마는 30분 즘 지나서 답을 할 것이다.
부모님은 회사에서 보내준 여행을 떠났다. 원래는 가족여행이었다. 4박 5일간의 가족여행.
하지만 나는 이 지경이었고, 부모님은 그 놈의 ‘푸켓’에 꼭 한번 가보고 싶다 했다.
태국의 이색적이고 영롱한 그 바다를 나도 한 번은 보고 싶었지만,
아무리 시도 해봐도 나는 방을 떠날 수 없었다.
엄마는 2주일 치의 레토르트 식품, 아니 식량 아니? 사료를 남겨두고 떠났다.
겉보기엔 2주일 치는커녕 한 달 치도 넘는 것 같다. 매몰차다 생각했지만 이해 할 수 있었다.
부모님이 집에 남아있더라도 내가 방을 나서지 못하는 것엔 변함이 없다.
효도는 못 할망정 부모님 여행길의 발목을 잡는 딸이 되고 싶진 않았다.
-지금 바다야. 너무 좋다.
엄마는 거짓말 같이 푸르른 바다를 배경으로 아빠와 오붓하게 찍은 사진을 전송했다.
기운이 빠진다. 어깨가 주저앉는다. 이 방에서 나가지 못하는 것으로 내가 포기한 것이 얼마인가.
푸켓 여행은 물론이었다. 회사도 겨우 3일 연속으로 무단결근 했다는 사유로 해고당했다.
나와 부모님의 터무니없는 설명은 해고 사유에 쐬기를 박았다.
“방을 못 나간다구요!”
내가 평범한 사람 같았어도, 그따위 핑계를 대는 사람에게는 손가락질을 했을 것이다.
아마 그런 말도 함께 했겠지. 그.것.도.변.명.이.라.고. 말끝에 그런 말도 덧붙이면 구색이 좋을 듯하다.
개념 없는 년.
회사에 대해선 체념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도 조금 섭섭했던 건 내게 전화가 딱 한 번뿐이 걸려오지 않았다는 것이다.
나의 사회적 입지가 겨우 그 정도였을까? 겨우 전화 한 통? 싶은 서운함이었다.
어떻게 연락도 없이 출근 안는 여자에게 전화를 딱 한 번만 걸 수가 있어? 첫마디도 가관이었다.
“너, 이제 안 나와도 돼.”
내가 그만두기를 기다렸다는 듯이 어쩜 그렇게 앙칼지게 말을 뱉을까. 나쁜 년. 무슨 일 있어? 묻는 법도 없이.
그때 생각을 하자, 머리에 도는 열기가 ‘슝슝슝’하며 스팀처럼 뿜어져 나오는 것 같다.
쯧 하고 혀를 찼다. 생각에서 깨어나자 창문턱에 후드득 빗방울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고갤 들어 창을 보니 빗발이 들이친다. 나는 창문을 닫지 않고 그대로 방에 누웠다.
투둑 하며 빗방울이 팔꿈치까지 튀기는 게 기분이 좋다.
머리를 내밀어 머리를 적실까? 아니… 수건도 없는 걸….
눈을 감았다. 촤르르 흐르는 빗소리를 자장가 삼아 잠을 청했다.
끝없는 나락에 몸은 던진 듯 5분도 안되어 잠이 들었던 것 같다.
그렇게 몇 시간 이었을까. 덜커덩하는 큰 소리에 잠에서 깨었다.
덜커덩 소리와 거실에선 부산스런 발소리도 들려온다. 한 개? 두 개? 아니, 가늠이 되질 않는다.
“야! 조심히 들어, 씨! 귀퉁이 상하면 변상이야!”
귀퉁이가 왜? 거기 누구세요?
“반장님! 저기 문 닫힌 방은 어떻게 할까요?”
문 닫힌 방? 내 방? 발소리 하나가 터벅터벅 내 방으로 다가왔다.
나는 혼비백산하며 방문의 잠금장치를 눌러버렸다.
그러자 ‘탕!’ 방아쇠를 당긴 듯 잠금장치의 소리가 울려 퍼졌다.
3초간의 일시정지. 방 밖의 발소리가 멈췄다. 쥐죽은 듯 하던 거실 밖은 금방 다시 활기를 되찾았다.
“야, 안에 사람 있는 거 아니야?”
“몰라? 사람 아무도 없을 거라고 했는데?”
“방금 무슨 소리 들렸는데?”
조금 전에 다가오던 발소리가 내 방 앞까지 온 것을 알 수 있었다.
누군지 모를 이가 방의 문을 노크해왔다.
똑똑, 똑똑똑. 방 앞의 목소리는 “방에 아무도 없어요?” 큰 목소리로 묻더니
방의 문고리를 휙 하고 돌렸다. 덜커덩거리는 내 방문을 양손으로 눌러 막았다.
문 밖의 목소리는 계속해 닦달했다.
“방에 아무도 없어요? 이삿짐센텁니다!”
귀를 의심해야했다. 이삿짐센터? 우리가 이사를 가? 왜? 어째서? 나 아직 여기 있어요.
서둘러 엄마에게 메신저를 다시 보냈다. 엄마!! 이삿짐센터에서 왔데!!! 우리 집 물건 막 가져가나봐!!!!
그 와중에도 문은 계속 덜컹거렸다.
“저기요! 방금 소리 다 들었거든요? 문 좀 열어주세요!”
“뭐 잘못 알고 오신 것 아니에요?! 저희 이사 안 가는 데요!”
“예?! 여기 차 정표 씨 댁 아닌가요?”
맞다. 차 정표 씨. 우리 아빠.
“그럴 리가 없는데요! 저한테는 아무 말도 안 하셨…”
번뜩하고 떠올랐다. 부모님은 정말로 푸켓 여행을 간 것이 맞는가?
엄마에게서 답신이 금방 도착했다. 믿을 수가 없다.
-미안해…
문에 등을 댄 채 몸이 미끄러져 내렸다. 산더미 같이 쌓아놓은 레토르트 식품의 의미를 지금에서야 알 것만 같다.
나는 지금 마치 길거리의 유기견과 같은 것이다. 방에서 안 나오는 바람에 집에다 버리고 떠나는 처치불가의 딸년입니다.
이름은 차 수연이구요. 스물일곱 살입니다. 주워가실 분, 누구라도 좋으니 주워가세요. 하고 노란 박스에 담겨 길거리에 버려진 것과 같다.
다음부턴 엄마에게 무슨 메시지를 보내도 답이 같았다. 미안해…. 나는 버려졌다는 것을 확신했다.
식량이 바닥나고, 물이 다 떨어지면 나는 이곳에서 굶어서 죽는 건가.
생각하니 점점 나의 현재 상황이 명확해 졌다.
유기되었다. 내 방 안에. 내 방이란 노란 박스 안에.
그 후, 며칠이나 지났는지 샘하지 않았다. 창문 밖을 바라보다, 잠을 자다,
그런 일상으로 하루를 무의미하게 보냈다.
시간이 지나고 있다는 압박감이 밀려올 때마다 방문을 나서보았다.
하지만 또 깜빡… 하며 내 방 안일뿐이었다.
엄마는 메신저 답장이 없다. 식량은 점점 줄어들고 있었다. 갑갑할 때면 물을 들이켰기 때문에 생수도 금방 떨어지고 있었다.
때때로 문 밖으로 인기척이 들리는 것 같은 착각도 있었다.
그때마다 “엄마?!” 불러봤지만, 대답은 없다. 도저히 가만히 있는 것만으론 하루를 보낼 수 없었다.
그래서 미친년처럼 내 방을 청소했다. 청소하고, 청소하고. 별반 치울 것도 없지만.
그래도 하루에 열 번은 청소를 하는 것 같다. 화장대 위치를 옮겨보기도 하고, 이불을 접었다가 폈다가….
인터넷은 끊겼다. 누군가에게 SOS를 보내야 할 핸드폰도 끊겼다.
핸드폰은 부모님이 정지시킨 것으로 밖에 생각되지 않았다.
철저하게 유기시킨다는 인상이 들었다. 누구에게도 들키지 않고 죽을 때까지 기다리마. 하고.
왜 이리도 갑자기, 이리도 매몰차게 내게서 돌아섰는지는 알 수 없다.
혹시 몰랐다. 내가 수준 이하의 버러지 같은 딸내미였던 것이었을지도….
심심해서 창밖 밤거리의 사람들을 구경했다. 걸음 느린 할머니, 소란스런 꼬맹이들.
외로워 보이는 가로등 불빛. 그 옆으로 매번 보이는 음식점 간판들. ‘오가네 설렁탕’ 간판을 보며
꿀꺽하고 침을 삼켰다. 설렁탕이 모락모락 김 피우는 광경이 눈에 선하다.
오늘 막 버무린 겉절이 김치 하나 얹어서 한 입에 몽땅 털어 넣었으면,
딱 한 입만. 그러면 소원이 없을 텐데.
저벅저벅.
방 밖으로 또 발소리가 들렸다. 굉장히 선명한 발소리.
반사적으로 “엄마?!” 하고 불렀다. 그러자 밖에서 웬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엄마?”
소름이 끼쳤다. 남자? 모르는 사람이다. 모르는 남자다. 모르는 남자가 집에 들어왔다.
그렇게 인식된 순간 머릿속이 하얗게 질리기 시작했다.
턱턱하고 남자의 뒤꿈치가 거실을 차며 내 방으로 다가오는 소리가 들렸다.
쏜살같이 방문으로 달려갔다. 잠금장치를 누르고 허겁지겁 문을 온 몸으로 틀어막았다.
“거기 누구 있어요?”
콩콩콩 문을 두드리며 밖에서 물었다. 숨이 저절로 멈춰 섰다.
대답이 없자 밖의 남자는 문을 열려고 들었다. 당연히도 잠겨있는 문은 열릴 생각조차 않았다.
달칵달칵하고 잠긴 문고리가 흔들린다. 종잇장만큼 찔끔거리며 문이 앞뒤로 움직였다.
그 때마다 내 몸도 같이 들썩였다. 문의 흔들림이 멈추자 밖에서 쇳소리가 들려왔다.
동전이 샤르르 쏟아지는 소리. 아니, 동전보단 열쇠란 말이 더 맞을 듯싶었다.
곧 문고리로 수욱 하고 열쇠가 들어오는 소리가 들렸기 때문이다.
방문이 찰칵하며 손쉽게 열렸다.
잠겨 있을 때와는 다르게 문을 밀고 들어오는 힘이 괴력적으로 느껴졌다.
당해낼 수가 없다고 생각했다.
“저기요! 저기요! 저 여기 있어요. 들어오지 마세요!”
몸이 밀려버렸다. 열린 문틈이 주먹 하나 정도의 공간을 만들었다.
틈을 따라서 거실의 형광등 불빛이 기어들어 왔다. 나는 소리쳤지만, 밖에선 한참 대답이 없었다.
몸엔 식은땀이 흐르고 있었다. 흰색 티셔츠에 속옷 바람이었다.
속옷도 아래밖에는 입지 않은 상태였다. 이마가 말라 버리는 듯 피가 빠졌다.
빠진 피가 다리로 콸콸 쏠리고 있다는 감각을 느낄 수 있었다.
아찔하게 시선이 멀어지다, 가까워지길 반복했다.
관자노리로 심장이 이동해버린 듯 혈관이 벌떡거리며 뛰는 게 선명히 느껴진다.
한참동안의 침묵을 깨며 밖의 남자가 물었다.
“여기서 뭐하세요?”
여기서? 저는, 저는 여기 사는 사람인데요. 대답이 안 나온다. 대답 대신 사례가 들어 기침만 쏟아졌다.
“저기요?”
다시 남자가 문을 밀었다. 남자의 힘 때문에 몸이 방바닥을 타고 또 스윽 미끄러져나갔다.
나는 뒤돌아 문에 매달리 듯 온 힘으로 문을 밀어붙였다.
“들어오지 마세요! 저 여기 사는 사람이에요!”
남자는 뜸을 드리다 말했다.
“…제가 이 집 주인인데요?”
벌써 팔렸어? 그 짧은 시간동안? 아니, 이미 팔고 떠났을 지도 몰랐다.
방 안에 있는 나는 나 몰라라 하고. 왈칵하고 눈물이 쏟아졌다.
내가 그렇게 귀찮은 존재야? 엄마? 아빠?
“저기요.”
남자는 이내 방의 문을 열어버렸다. 몸이 더 떠밀려 났다.
남자는 열린 문 틈 사이로 손을 내밀어 방의 불을 켰다.
남자의 머리가 들어오려는 듯 머리칼이 문틈으로 불쑥 들어왔다.
젖 먹던 힘을 다해 문을 세차게 밀었다. 남자가 문에 머리를 찧었는지 “아.” 하고 작은 소릴 냈다.
“들어오지 마시라구요!”
“……제 방에 제가 왜 못 들어가죠?”
틀린 말도 아니었다. 집이 팔렸다면, 이곳은 내 집도 내 방도 아니다. 하지만 나는 이 방을 벗어 날 수 없다.
그렇다면 최소한 이해할 수 있도록 주인에게 설명은 할 필요는 있다.
붙박이장도 아니고 방 하나를 통째로 차지한 채 집주인을 무시하면서 살 수는 없는 노릇 아닌가.
“잠깐만 기다려주세요. 저 옷만이라도 좀 입을게요.”
“벗고 있어요?”
벗고 있어요? 바보다. 바보처럼 괜한 소릴 했다. 다시 시야가 아득해졌다.
나는 왜 이토록 당황하고 있는가. 그 이유가 뇌리를 스쳤다. 무섭다.
저 남자는 내게 무슨 짓을 할지 모른다. 나는 저 사람을 몰라. 나는 이곳에 버려졌어.
이 방에서 나갈 수 없는 몸이야. 저 남자가 누구고 어떤 사람이든 그것은 둘째야.
아무리 저 사람이 선량하고 마음씨 좋은 착한사람이라고 해도,
만약에 하나 저 사람이 내게 나쁜 맘을 먹는다면, 나는 저항을 할 수도, 경찰을 부를 수도 없어.
“……그냥 조금만 기다려줘요. 문 열지 마세요. 부탁드릴게요.”
엔진이 가동하는 것처럼 머리가 폭발적으로 회전했다.
남자가 문을 마저 밀고 들이닥치는 장면이 계속해서 떠올랐다.
저 사람이 덤벼든다면, 하고 생각하니 주위에 무기가 될 법한 물건을 서둘러 눈으로 찾게 되었다.
하지만 딱히 날카로운 것도, 그렇다고 몽둥이처럼 묵직한 무엇도 있지 않았다.
절망감이 밀려오는 와중에 남자가 말했다.
“그럼 옷 입고 불러주세요.”
남자가 먼저 문을 닫았다. 닫히는 문을 따라서 몸이 뒤로 넘어졌다. 가볍게 머리가 문에 부딪힌다.
방에서 멀어지는 발소리를 들으며 생각했다. 나는 안심해도 좋은 건가? 지금의 선의를 평면적으로
선의라 받아들여도 좋은 건가? 아무것도 지레짐작 할 순 없다.
그래도 집주인이라면 설명은 해야 했다.
서둘러 옷장 속 청바지를 주워 입었다. 속옷을 꺼내 입기보단 위에 갈색 가디건을 하나 겹쳐 입었다.
나도 모르게 거울을 찾았다. 거울을 찾으려다 흔들린 끈적끈적한 머리칼이 뺨에 달라붙었다.
내가 놀란 만큼, 나의 거지같은 꼴을 봐야하는 집주인도 놀랄 것만 같다. 주눅이 들었다.
거울보다 고갤 내려 내 몸을 보았다. 흘러내린 기름장 머리칼을 매만졌다.
그러자 머리칼의 소름끼치는 감촉이 나를 현실로 불러들였다.
정신이 번쩍 든다. 방심해선 안 된다. 책상을 뒤적이니 모나미 볼펜이 나왔다.
볼펜심이 잘 나오는 것을 확인하고 소매 속으로 펜을 숨겼다.
방문을 열고 문턱 앞에 섰다. 먼저 눈을 사로잡은 건 집주인이 아니었다. 확 변해버린 거실의 풍경이었다.
TV가 새 것으로 바뀌었다. TV선반도 처음 보는 물건이다. 거실 밖 베란다로 가득한 화분들.
거실에도 하나 우뚝하고 자리 잡은 키 작은 나무 한그루.
거실에선 익숙하지 않은 풀냄새와 담배냄새가 풍겼다. 언제 집이 이렇게 바뀌었을까.
“나오셔서 설명 좀 해주실래요?”
집주인은 놀랍도록 담담하다. 그리고 예의바르게 나를 거실 밖으로 유도했다.
사실 나보다도 당황스러워야 하는 건 집주인이다. 기껏 마련한 보금자리에 웬 거지가 붙어있다니.
그의 침착한 태도와 바른 첫인상이 그를 신뢰하게 만드는 것 같다.
신뢰감과 함께 안심도 들었다. 저 사람은 나를 헤치지 않을 것만 같다. 하는 안도감이었다.
소매에 숨겨놓은 볼펜이 살살 팔뚝을 간질였다. 어째해야할까.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르겠다.
어쩌면 긍정적인 방향으로 이야기가 흐를지도 모른다.
하지만 가장 큰 문제는 내가 이 방을 떠날 수 없다는 설명을 어떻게 하는 가였다.
그가 아무리 예의가 바른 사람이라도 이런 날 납득할 수 있을까?
“제가 방을 나서기가 좀 그런데요.”
집주인은 “왜요?” 하고 눈을 동그랗게 떴다.
나는 하는 수 없이 내가 방문을 나서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깜…빡…하고 나니 역시나 내 방이다.
뒤를 돌아 집주인을 바라보았다.
“이해하시나요?”
집주인은 게슴츠레 눈을 떴다. 게슴츠레한 눈 밑으로 입이 아 벌어졌다.
집주인은 아 벌어진 턱을 왼쪽 오른쪽 하며 슬슬 움직였다.
그가 침을 꼴깍 넘기는 소리가 들렸다. 그 소리가 너무 크게 느껴진다. 긴장이 됐다.
나도 그를 따라서 침을 한 모금 삼켰다. 기묘한 시간이 흘렀다. 집주인은 말없이 턱을 돌렸다.
저절로 거실 바닥을 향해 고개가 떨궈졌다. 어찌하면 좋을지 모르겠다. 집주인이 물었다.
“그러면, 이렇게 서서 이야기 할까요? 아니면, 제가 방으로 들어가야 하나요?”
방으로 들어온다는 말에 소매 속 볼펜을 손으로 내려 꾹 쥐었다.
볼펜의 심을 뽑아내고 만일을 대비했다. 손에 땀이 찬다. 땀이 차서 볼펜이 미끄럽다.
“이대로 서서 이야기 할게요.”
목소리가 떨렸다. 염소처럼. 들킬 것 같다. 불안하다. 불안해서 비명이 나올 것 같다.
내가 지금 얼마나 무방비한 상태인지. 내 스스로가 나의 절망적인 처지를 잘 알고 있는 탓일까.
선해만 보이는 집주인이 자꾸만 의심이 들었다.
그가 지금이라도 뛰어오면 얼른 문을 닫아야겠다는 생각이 반복해서 떠올랐다.
손에서 나는 흥건한 땀이 거실 바닥으로 똑 하고 한 방울 떨어질 것만 같다.
볼펜을 손에서 꽉 쥐려고 하면 할수록 볼펜이 미끄러져 내린다.
땀 때문에 마찰력이 없는 것 같다.
이런 상태로 저 남자에게 깨알 같은 볼펜자국 밖엔 남길 수 없을 듯싶다.
다리에 힘이 풀릴 것 같지만, 이를 악물고 버텼다.
“그럼 그렇게 해요.”
그는 다시금 덤덤히 대답했다. 그에 부드러운 말투가 주는 안도감에 몇 번이고 주저앉을 것 같았다. 남자가 불쑥 물어왔다.
“얼마나 살고 계셨죠?”
“그쪽이 이 집 사기 전부터요.”
억울해서 눈물이 터질 것 같다. 억울해. 나는 그냥 버림받은 건데, 왜 이렇게 죄를 진 기분이야? 왜 이렇게 창피해?
“이 집, 전 주인이세요?”
“네….”
전 주인. 전의 주인이다. 더 이상은 내 방도 내 집도 아니다.
남자는 가슴주머니에서 담배를 꺼내더니 “하나 피워도 될까요?” 물었다.
대답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계속해서 말이 떨리며 나왔기 때문이다. 그가 말했다.
“거기서 계속 사시면, 제가 곤란한데요.”
“하지만… 방금 보셨잖아요. 저는 방을 나갈 수가 없어요.”
그는 내 말을 듣고 가만가만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담배를 한 모금 집요하게 빨았다.
시선은 나에게 고정한 채. 독사처럼 긴 담배연기를 뱉는 그를 보니, 그다지 선한 사람은 아닐지도 모르겠단 생각이 든다.
“다시 한 번만 나와 보시면 안 될까요?” 그가 물었다. 다시 거실로 나가는 모습을 보여주자 그는 말했다.
“신기하네…. 가까이 가 봐도 될까요?”
“네?”
별말 아니었지만, 남자는 말을 이으며 갑자기 자리에서 일어났다.
놀랐다. 너무 갑작스러웠다. 섬뜩한 소름에 몸서리가 쳐졌다.
손에 힘이 풀렸다. 아니, 온 몸에 힘이 풀렸다.
그 잠깐의 찰나, 손아귀 속 볼펜이 땀에 미끄러지며 바닥을 굴렀다.
볼펜은 문턱에 코를 박더니 거실 쪽으로 남자를 향해 달려갔다.
마치 고자질 하는 것처럼. 저 여자가 주인님 이거로 찌르려고 했데요. 이르는 것처럼.
나와 볼펜의 거리가 너무 멀었다. 볼펜을 주울 수 있는 거리가 도저히 되질 않는다.
남자는 거실에 멈춰선 볼펜을 내려다 봤다.
“이게 뭐에요?”
그는 거실의 볼펜을 주웠다. 그는 볼펜을 한 번 보고, 나를 한 번 보고하며,
볼펜과 나를 번갈아 쳐다보았다. 그가 볼펜을 손에 쥐고 내게로 다가 올 때,
불안감은 머리끝까지 치달았다. 나는 잽싸게 문을 닫으며 방 안으로 숨어버렸다.
숨을 쉬는 게 고통스러웠다. 숨이 잘 쉬어지지 않는다. 떨려서 숨을 뱉는 것도 내는 것도 간격이 짧다.
“혹시 제가 무서운 거예요?”
그가 물었다. 울음이 터져버렸다. 뻔히 문 밖까지 흐느낌이 전해질 울음이었다.
“네! 무서워요!”
밖에서 움직임이 느껴지질 않는다. 몸이 바들바들 떨렸다. 몸을 납작하게 웅크린 채 문에 붙어있었다.
한참이 지나 문 밖에 ‘틱’하고 탁음이 들렸다.
“저 지금 나갈게요. 겁줘서 미안해요. 그럴 생각 아니었어요…….”
밖의 발소리가 멀어지고 있었다. 그리고 현관문이 열렸다 닫히는 철소리가 거실을 통해 들려왔다.
문에 귀를 붙이고 밖을 엿들었다. 문에 가 들러붙은 내 눈물이 흘러내린다. 밖은 조용했다.
숨소리 하나 들리지 않는다. 혹시 몰라 문고리를 꼭 쥔 채 문을 열어보니 아무도 없었다.
방의 문턱에는 모나미 볼펜만 덩그러니 놓여 있다. 나는 볼펜을 손에 꼭 쥐며 다시 문을 잠갔다.
몸이 녹아내릴 듯 긴장이 풀려버렸다. 그대로 맨바닥에 웅크린 채 눈을 감았다.
집주인을 의심하고 두려워 한 것이 미안하게 느껴졌다. 동시에 내가 너무 미련스럽게 느껴졌다.
잘못은 전적으로 나에게 있다. 그는 그저 이 말도 안 돼는 상황을 설명 받고 싶었을 뿐인데.
나는 그를 강간마나 살인자 취급하고 말았다. 하지만 아직도 몸이 떨렸다.
잠이 들기까지 죄책감과 불안감을 가슴에 부둥켜안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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