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레시안 황준호/기자]
아세안지역포럼(ARF) 의장성명에서 10.4남북정상선언과 관련된 항목이 한국의 요청에 의해 빠지고, 그에 따라 금강산 피격 사건에 관한 항목까지 삭제되는 되는 일이 벌어졌다.
외교부 당국자는 25일 "이용준 외교부 차관보가 오늘 싱가포르 외교차관을 공식 방문한 자리에서 '왜 논의도 안 된 10.4선언을 넣었냐'고 따졌고, 의장이 그 의견을 받아들여 10.4선언 항목을 뺀 의장성명 최종본이 나왔다"고 밝혔다.
그러나 이 당국자는 "싱가포르 외교부는 이 차관보의 말을 듣고 '그럼 금강산 피격 사건도 남북간의 문제니까 같이 빼자'고 해서 금강산 항목도 빠지게 됐다"고 말했다.
이에 대해 "금강산 항목을 포기할 정도로 10.4선언을 빼는 게 그리 중요했냐"라며 "실속 없는 외교를 했다"는 비난이 나오고 있다. 또한 10.4 선언에 대한 거부의 뜻을 국제사회와 북한에 명백히 보여준 것으로 "최악의 대북 시그널이 될 수도 있다"는 평가도 나오고 있다.
의장성명 초안에 대한 엇갈리는 평가
사태의 발단은 24일 ARF 외교장관회의 직후 조지 여 싱가포르 외무장관이 의장성명을 발표하면서부터 시작됐다. 조지 장관은 ARF 주최국으로써 회의에서 나온 의제들을 묶어 20개 항목의 성명을 발표했다.
이 성명에는 한반도 문제와 관련해 "아세안지역안보포럼은 2007년 10월 평양에서 열린 남북정상회담과 10.4남북정상선언을 주목한다. 10.4선언에 기반을 둔 남북대화의 지속적인 발전에 강력한 지지를 표한다"는 항목이 들어갔다.
성명에는 또 "참가국 외교장관들은 금강산 관광객 피격 사건에 관심을 표명하며, 이 사건이 조속히 해결되기를 기대한다"고도 명시됐다.
10.4정상선언과 금강산 문제를 동시에 포함시킨 것인데, 전자는 북측의 요구에 의해, 후자는 남측의 요구에 의해 들어간 것이다.
이같은 결과가 나오자 평가가 엇갈렸다. 일부 언론들은 금강산 사건이 포함됐다는 점을 부각하며 한국이 외교적인 성과를 거뒀다고 긍정 평가했다.
그러나 다른 한쪽에서는 한국이 북한과의 '외교전쟁'에서 패했다는 얘기도 나왔다. 대표적으로 정세현 전 통일부 장관은 25일 1라디오의 '라디오 정보센터 이규원입니다'에 출연, "금강산 문제에 대해선 대화를 통해 해결하는 것까지 밖에 안 갔지만, 북한이 맞불을 지르는 차원에서 제기한 6.15나 10.4선언의 이행문제는 존중한다는 표현까지 나왔다"며 "외교적으로 패배를 당한 셈"이라고 평했다.
비중없는 문서라면서 굳이 왜?
이같은 상황에서 유명환 외교통상부 장관은 귀국길에 올랐고, 이날 이용준 차관보가 싱가포르 외교부를 공식 방문하는 게제에 10.4선언 문제를 제기하라고 지시했다. 이에 이 차관보는 외무차관을 만나 그 이야기를 꺼냈고, 금강산 사건도 같이 빼자는 싱가포르 측의 역제의를 받아들여 의장성명에서 둘 다 빠지게 됐다.
외교부 당국자는 '왜 10.4선언을 빼자고 했냐'고 묻자 "10.4선언에 관한 논의는 (외교장관회의에서) 북한만 했고, 금강산 얘기는 5~6개국이 했기 때문에 그랬다"라고 답했다.
'왜 금강산까지 빼는 걸 받아들였냐'는 질문에 대해서 이 당국자는 "(의장성명에서 삭제돼도) 이미 여러 나라가 우려를 표명했기 때문에 외교적인 효과를 다 봤다"라며 "남북 양쪽의 균형을 잡기 위해 의장국이 같이 뺐나 보다"고 말했다.
그는 또 "ARF 의장성명은 서명도 없고 의장이 알아서 하는 것"이라며 외교적 비중이 그리 크지 않다는 뉘앙스로 말했다. 그러나 이 당국자는 '그렇게 대수롭지 않은 거라면 10.4선언도 굳이 빼라고 할 필요가 있었냐'는 물음에는 답변하지 않았다.
그는 '금강산과 10.4선언이 둘 다 들어가는 것과 둘 다 빠지는 것 중에서 한국 입장에서 무엇이 더 바람직하냐'는 질문에 "우리가 (의장국에) 요청한 게 됐으니…"라며 뺀 게 더 낫다는 식으로 답했다.
"본전도 못찾은 외교 행태"
그러나 어떤 게 더 낫다고 평가하기에 앞서 한국의 그같은 행위는 '금강산 사건이 담기는 걸 포기할 정도로 10.4선언이 들어가는 건 싫다'는 메시지를 보낸 것으로 해석되어 남북관계에 악재로 작용할 수 있다는 평가가 우세하다.
또한 이는 북한과 6.15공동선언과 10.4선언을 협의할 용의가 있다는 이명박 대통령의 국회 시정연설과도 충돌한다는 점에서 금강산 사건으로 인해 대북 강경노선을 본격화했음을 보여주는 신호탄으로도 해석되고 있다.
김연철 한겨레평화연구소 소장은 "10.4선언은 유엔에서 지지결의안을 통과시킬 정도로 긍정적인 것이라서 의장성명에 포함시키기 쉽지만, 금강산 문제 같은 네거티브한 주제는 국제사회의 입장이 갈리는 것이어서 집어 넣기 쉽지 않다"라며 "쉬운 것을 없애기 위해 어려운 것을 포기하는 건 실속없는 외교를 했다. 본전도 못찾았다"고 평가했다. 값어치가 다른 걸 교환하는 우를 범했다는 지적이다.
김연철 소장은 또 "10.4선언에 대한 한국 정부의 부정적인 인식을 국제사회와 북한에 보여준 것"이라고 우려했다.
다른 전문가는 "지난 3월 김태형 합참의장 후보자의 대북 '선제공격' 발언과 '북핵 문제가 풀리지 않으면 개성공단 2단계는 어렵다'는 김하중 통일부 장관의 발언에 이어 가장 안 좋은 신호가 북한에 보내졌다"고 평가했다.
황준호/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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