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다 보면 반가운 사람을 만나기도 하고 아까운 사람과 헤어지기도 한다. 그게 인생이 아닌가 늘 생각하고 스스로를 위로하지만 그중에도 유난히 힘든 때가 있다. 내게는 오늘이 그랬다. 군에서 걸려온 네 전화를 받고 한참을 이야기하다 끊었다. 그리고 새삼 깨닫는다.
나는 너를 좋아하나보다.
참 이상도하지, 그렇게 어울려다녔을 때는 몰랐는데. 문득 돌아보면 그렇게 뚜렷할 수 없게 자리하는 사실들이 있다. 내게는 그게 너다.
우리는 서로의 못볼 꼴을 참 많이도 보았다. 네가 빗길에 비보이 흉내를 내다가 자빠지던 날. 그때 옆에 있던 나는 깔깔거리고 웃다가 육교에서 우산을 떨어뜨렸다. 내가 아무도 안 보는 줄 알고 철퍼덕 다리를 벌리고 주저앉다가 너와 눈이 마주친 적도 있다. 그때 나는 교복 치마를 입고 있었다. 사실 이 정도는 약과다.
사실 네가 넘어지는 걸 보고 웃고 있을 때 속으로는 내심 걱정이 되었다. 아스팔트 바닥에 그렇게 성대하게 엎어졌으니 멍이 들어도 단단히 들었을 것인데.
치마 속을 훤히 보이고 내가 민망해 눈만 멀뚱멀뚱 뜨고 있자 너는 그랬다. 야, 여자애가 이게 뭐냐. 아래로는 시선을 내리지도 못하면서, 손을 뻗어 내 무릎만 툭툭 쳤다.
생각해보면 그렇게나 빤했었다.
그날 이후로도 긴 바지에 가려 보이지 않은 네 멍자국처럼, 네 앞에만 서면 아예 다리를 꼬고 앉아버리는 나처럼. 여름이라 땀이 차서 힘들었을 텐데 너는 그뒤로 이주일은 끝까지 긴바지였다. 웃기지, 그 전날까지만해도 남색 반바지를 입은 네 다리털을 보고 놀린 기억이 선한데. 너만 보면 무슨 조건반사마냥 아래부터 확인하던 나는 어떻고.
참 웃기지.
네가 준 사탕을 아무렇지 않게 받아먹으면서도 초콜릿을 못 준 2월이 미안했었고. 공부 못하는 너를 타박하면서 그래서 서울에서 학교 다니겠냐고, 네 등급컷을 눈으로 훑는 내가 있었다. 조별 과제가 끝나고 데려다준다며 몇 번이고 버스 종점 끝자락 우리 동네까지 온 너의 집은 사실은 그 전 정류장이었다.
너 나 좋아하지, 라고 차마 묻지 못했다. 나는 그저 공부벌레 책벌레. 글쎄 넌.... 그리고 널 그런 대상으로 보는 게 이상하게 힘들었다. 이를테면 우정이 아까웠다. 하나를 얻고자 하면 다른 하나를 버려야만 한다고 생각했었다. 그래서 나 너 좋아하나, 스스로에 묻지도 못했다.
그리고 졸업해서 2년. 나는 여대에 다니고 너는 지금 군대에 있다. 나는 삼학년이 될 것이고 너는 상병, 작대기를 세 개 달 것이다.
연락을 끊는 편이 좋았을까?
여자친구도 없고 남자친구도 없는 서로의 사정을 너무 잘 안다. 세상이 발달해서 SNS가 없이도 카카오톡은 내 상태 남의 상태를 목록으로 나열해 전하고 동창들 다 같이 모인 채팅방에서 웃고 떠들 수도 있다. 그게 참 좋으면서 싫기도 하다.
그때 망가진 우산은 아직도 우리집에 있다. 내 마음도 아직 여기에 있다. 다만 네 마음은 지금 어디에 가 닿았는지 궁금하다. 아니, 아니다. 사실 그건 별 상관이 없다. 다만 궁금하다.
우리가 보낸 시간은 연애라는 이름표를 붙이든 안 붙이든 다른 어떤 이름으로도 내게는 즐거운 때였다. 그러나 한 번 쯤 붙여보는 것도 좋았을까 생각해본다. 장미는 무엇이라 불러도 향기롭고 아름답지만 때로 꽃은 이름 불러준 순간에야 비로소 나에게 다가와 꽃이 되기도 하므로.
너는 내게, 나는 네게 꽃이 되는 날이 올까.
네가 새삼 그립다. 며칠 전까지 오던 비는 그쳤는데 내 마음에는 네가 왔다. 잔잔하게 젖어서 네가 보고 싶다.
다음 휴가에 네가 나를 만나러 올 지는 모르겠지만, 그래서 내가 속내를 털어놓을 수 있을지 알 수 없지만. 적어도 지금 네가 내 옆에 있었으면 좋겠다. 손 잡고 걸었으면 더할 나위 없겠다.
내가 좋아하는 사람아.
졸업하면 미국에 간다던 바보야. 그래 가서 잘 살라고 손 흔들어주던 멍청아. 간 김에 국적 취득해 터잡고 살 것을 왜 한국에 와서, 왜 내게 전화했니. 여기 계신 부모님께 한 통이라도 더 걸지 왜 하필 나였니. 모르는 번호라고 경계했지만 2년 넘은 목소리는 단숨에 알아들어선. 군대 전화 기다리는 사람 많다는 거 들어 아는데도 자꾸만 말을 시키고.
모르겠다, 그냥 네가 보고 싶다. 친구야.
오늘도 이것저것 들어주고 감싸주는 오유 고민 게시판에, 염치도 없이 고개를 들이밀어봅니다. 글쎄요. 글은 이렇게 썼어도 아마 제가 이 친구와 잘 될 일은 없을 거에요. 잘 알아서 이렇게 씁니다. 역시 거지 같은 글로나마 털어놓으면 한결 편해집니다. 손이 떨려서 몇 번을 지우고 다시 쓰고 반복하네요.. 하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