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희는 약 2년 넘게 만난 커플입니다. 저는 일을 하고 있고 여자친구는 이제 대학교 2학년인데 집이 근처라서 2년 넘게 사귀면서 알콩달콩 잘 지내고 있었습니다.
가끔 서로의 집에서 요리도 해 먹고, 맛집도 가끔 찾아가고 영화도 자주 보러 가고 여행도 많이 하는 편이었고 남들이 하는 데이트란 데이트는 거의 다 해 본 것 같아요.
여친은 대학 1학년 때부터 저를 만났고 거의 저랑만 붙어 다녀서 캠퍼스에 친구들이 많지 않았는데 저는 항상 그런 여친이 신경 쓰여서 나는 괜찮으니 친구들 모임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같이 밥도 먹고 술도 마시면서 친해졌으면 하는 바람이 있었어요.
하지만 여친은 학교생활에 적응이 힘들다며 대학에서 마음에 맞는 친구를 사귀기 힘들다고 말하며 수업 후에는 저와 대부분의 시간을 보냈어요.
그런데 제가 최근에 크게 아파서 여기저기 병원이란 병원은 다 다니게 되었고 대학병원 외래 진료를 받게 되었습니다. 최근 5개월 동안 10kg 가까이 살이 빠지고 죽이나 액상 음료 이외에는 아무것도 먹을 수 없었고 일이 끝나고 나면 축 처지고 늘어져 있는 날이 많았어요.
여친도 초반에는 이런 나를 많이 걱정해줬지만, 점점 데이트 횟수도 줄고 제가 기력이 없다 보니 미안한 마음에 제가 먼저 영화도 친구들과 보러 갔으면 좋겠다고 말했고 밥도 같이 먹을 수 있는 게 없어서 저녁도 학교 근처에서 친구들과 같이 먹었으면 좋겠다고 말했어요.
주말에 같이 쇼핑할 때도 빨리 이 시간이 끝났으면 좋겠다는 마음뿐이었어요. 물론 이런 말을 화내면서 하지 않았고 네가 조금만 나를 이해해줬으면 좋겠다고 나름 돌려서 이야기했어요. 하지만 여친도 저와 같이 할 수 있는게 무기력한 대화뿐이라 점점 저희 사이는 소원해져가게 되었어요.
여친은 원래 외향적이고 활동적이고 호감형인 데다 인간관계에 대한 갈망도 있는 친구다 보니 금세 대학에서 친구들을 만들었고 친구들과 보내는 시간이 점점 늘어나기 시작했어요.
학교 끝나면 항상 집으로 와서 근처에서 만나던 시간은 점점 줄어들었고 거의 매일 학교 근처에 약속을 잡아서 막차를 타고 오기도 하고 막차가 끊기는 시간까지 술자리에 있어 제가 데리러 가기도 했어요.
내심 저는 제가 해주지 못한 부분을 친구들이 채워주는 것 같아 다행이라고 생각했지만, 한편으로는 불안한 마음도 같이 있었죠.
어느덧 여친의 말과 행동에 조금씩 변화가 생기기 시작했어요. 친해진 친구들도 많아졌지만 동시에 남사친이 생기기 시작했고 예전에는 친구들의 이름, 그 친구와 했던 일들을 저에게 다 알려줬는데 지금은 그냥 “친구 누구 만났어”라고만 말하더라고요. 카톡에도 잠금이 없었는데 어느 순간 생겨 있었어요.
저는 어느 정도 눈치를 챘어요. 여친이 마음에 들어 하는 다른 남자가 생겼거나 아니면 남사친에게 고백을 받아서 마음이 흔들렸다든가 했을지도 모른다는 것을요. 하지만 저는 그런 부분을 구속하고 싶지 않아서 눈감아줬어요.
저희는 사귀면서 성격이 잘 맞아서 싸운 적이 손에 꼽을 정도로 적었는데 최근에 제가 스트레스를 많이 받은 상황에 크게 욱해서 실수를 한 일이 있었어요. 여친에게 직접 실수 한 건 아니었지만 그런 제 모습에 크게 실망한 것으로 보였고 조금의 다툼이 있고 난 뒤에 더 말을 하지 않았죠.
그날따라 불길한 예감이 들길래 먼저 전화해서 화해해보려 했지만 제 마음을 받아주지 않고 오히려 더 화를 내더군요.
저도 할 말이 많아져서 오랜만에 이메일을 보냈는데 “내가 아픈 동안 네 마음이 많이 변한 것 같아.”가 주된 내용이었어요.
그때는 여친 기말고사 시험 기간이 끝나갈 때 즈음이라 저는 조심스럽게 메일을 보냈고 답장은 시험 끝나고 천천히 보내달라고 했어요.
그런데 여친은 답장하지 않았고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이별을 암시하는 애매한 말을 제게 하더군요. 이별을 직접적으로 통보하지는 않았지만, 아직 헤어져야 할지 잘 모르겠어. 우리 당분간 만나지 말고, 연락도 하지 말고 떨어져 있으면서 서로 생각할 시간을 갖자고 하더군요.
그때부터 저는 혼자가 되었습니다. 아직 정식 이별을 통보받진 않았지만 느낌으로 알 수 있었어요.
기말고사가 시작되기 전 저는 여친을 위해 1월 초에 여행 계획을 세웠고 그때까지만 해도 여친은 흔쾌히 항공권을 결제하며 좋아했어요. 그런데 지금은 이 여행이 이별 여행이 될 것만 같아요.
이미 친한 친구들에게는 남친과 헤어졌다고 말을 한 상태고 얼마전에는 계절학기에 학교 근처에 방을 빼는 친구네 집으로 이사를 하겠다는 걸 제가 방학 동안 만이라도 나와 이야기 할 시간을 갖자고 설득해서 이사는 가지 않았지만 크리스마스도 따로 보냈고 지금은 연락도 하고 있지 않습니다.
이메일을 통해 우리가 미리 계획해 둔 여행은 이별 여행이라고 생각하고 가자고 했더니 그건 허락했습니다.
제 추측은 기말고사 기간에 남사친이 생기게 되었는데 저 때문에 사귀지는 못하는 단계인 것 같아요. 아니면 어쩌면 벌써 사귀고 있을 수도 있다는 생각도 하고 있어요.
그런데도 저는 그 친구가 너무 좋아서 아픈 몸을 이끌고 마지막 여행을 같이 가고 싶어요. 마지막으로 얼굴을 보고 아무것도 묻지 않을 거예요. 같이 시간을 보낼 수 있는 것만으로도 감사하다는 마음이 들어서요.
환승이별을 당한 것 같지만 여친이 하나도 밉지 않은 제가 이상한 건가요? 물론 마음은 찟어들 것같이 아파요. 몸도 아픈데 마음까지 아프다 보니 정말 요즘은 쓰러질 것 같은데 겨우겨우 하루를 버티고 있습니다.
한편으로는 최근에 제가 너무 아파서 여자 친구를 많이 못 챙겨줬는데 저를 대신해 줄 누군가 생긴 것 같아서 감사하는 마음도 들어요. 질투가 없다는 건 물론 말도 안 되는 소리지만 진실을 확인하고 싶지 않네요. 그냥 제가 다시 건강해지고 괜찮아질 때까지 쭉 기다리고 싶다는 생각뿐이에요.
저의 어떤점이 문제일까요?
저에게는 병신이라고 욕해도 좋지만 여친에게는 가급적 돌려서 말씀해주셨으면 좋겠어요.
긴 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