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친듯 헤매도 내 뜻대로 사는 행복을 위해”
입력: 2008년 04월 23일 14:29:30
ㆍ‘대광高 종교자유’ 시위 강의석의 그 후
소년은 세계평화를 꿈꿨다. 자신이 나서서 목소리를 높이고, 하나 둘씩 바꿔나가면 세계평화는 곧 올 것 같았다. 청년이 된 소년은 이제 세계평화를 꿈꾸는 일 따위는 하지 않는다. 띠를 두르고 나섰을 때 사람들은 응원을 보내오거나 간혹 비웃기도 했지만 누구 하나 함께 나서는 사람은 없었다. 이제 청년의 목표는 ‘나 자신’의 평화요, 행복이다.
학내 종교자유를 외치던 투사, ‘대광고 강의석군’으로 이미 유명해진 그는 이제 스물세 살의 청년 ‘강의석씨’가 됐다. 단식으로 핼쑥해진 얼굴을 하고 교복을 입은 채 피켓을 든 모습만 기억한다면 지금의 그를 찾아내기는 힘들다. 때 이른 여름 날씨, 그는 반팔에 반바지를 입고 귀에는 이어폰을 꽂고 나왔다. 서울대 법학부를 휴학 중인 강씨는 지금 행복을 찾고 있다고 했다.
강씨는 늘 언론의 주목을 받았다. 언론의 주목을 받기 위해 튀는 행동만 골라서 했다고 표현하는 게 더 맞을지 모르겠다. 대학생이 되고 나서 인권운동에 본격 투신하는 듯하더니 복싱에 몰입해 화제가 됐다. 강씨는 지금 호스트바에서 일하고 있다. 1주일 전까지는 택시 기사였다. 그 사이에 주연 겸 감독이 돼 두 편의 영화를 만들었다.
법대에 진학했는데 사법시험은. “준비하다 말았다.” 군대. “안 갈 생각이다.” ‘너무 튄다’는 비난은. “신경 안 쓴다.” 언론을 이용하는 것 아닌가. 영악하다는 평인데. “맞다. 내가 하는 일에 도움이 되니까.” 꿈은. “지금은 영화감독을 하고 싶지만 내가 행복하지 않으면 안할 거다. 그냥 좋아하는 사람과 뒹굴거리며 사는 게 꿈이다.” 어느 시의 한 구절처럼 ‘미친듯이 헤매고 있는’ 강씨를 만났다.
-이제 20대 초반인데 정말 튀는 이력입니다. 얼마 전부터는 호스트바에서 일한다고요. 솔직히 놀라운 걸 넘어 충격적인데요.
“궁금했어요. 참 다양한 사람들이 있더라고요. 연예계로 나갈 친구들도 있고, 운동하다가 돈 좀 벌어보려고 온 사람들도 있고, 대학생도 있어요. 저는 지금까지 3번 출근했고요. 손님들 앞에 서서 ‘4번, 의석입니다.’ 인사하고 ‘초이스’도 한 번 받아봤네요. 하는 일은, 아시잖아요. 손님들이 하라는 대로 하는 거예요. 말하자면 노래 부르라면 부르고, 손님들이 시키는대로 해요. 손님들은 그냥 아직 신기해요. 만원짜리 돈을 그냥 종이 뿌리듯이 팁으로 뿌리니까. 아직 알아보는 사람들은 없는데 뭐 그냥 재미있어요. 잘하는 사람들은 하루에 20만원도 벌고 50만원도 번다는데 전 6만원 정도 벌었어요. 두어 달은 해볼 생각이고요.”
-그냥 궁금해서 시작했다고요? 아니, 집에서는 아시나요.
“호기심이 생겨 해보고 싶어지면 저는 망설이지 않고 그냥 해봐요. 어머니도 알고 계세요. 너 하고 싶은 대로 하라고 하시죠. 예전부터 궁금하긴 했어요. 제가 자라온 곳은 청량리 집창촌 근처인데요. 학교에 갈 때마다 거기서 일하는 사람들이 보여요. ‘저 사람들은 왜 저런 일을 할까. 저렇게 예쁘면 TV에 나가면 되지 않을까. 저 안에 있으면 기분은 어떨까.’ 그냥 궁금했어요. 이렇게 살 수도 있는 거구나, 생각해요.”
-얻는 경험에 비해 위험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주변 친구들 반응이 다양했어요. ‘너는 자신을 너무 과대평가 하는구나’에서부터 ‘진짜 상처 많이 받을 텐데….’ 이런 걱정까지요. 물론 수치심이라든가 리스크가 크단 생각은 많이 했어요. 그렇지만 한번 해보고 싶은 마음이 들었는데 안하면 안될 것 같았고요. 학교에 다니면서 내가 사람들을 너무 모르고 있다는 것에 대해서 충격을 받았었고 앞으로 영화를 하고 싶은데, 이런 일을 하면서 도움을 받을 수 있을 거라는 생각도 했죠.”
-바로 지난 3월에 택시 운전을 하면서 언론에 보도되기도 했는데요. 업종 변경이 잦습니다.
“사실 호스트바에서 일해봐야겠다는 생각도 택시 운전 중에 하기 시작했어요. 딱 한 달 택시 운전을 했는데 어느 날 태운 손님이 호스트바에서 일하는 사람이더라고요. 제가 관심을 보이니까 한 번 오라고 했어요. 택시를 관둔 후에 그 사람을 찾아간 거죠. 택시 손님 중 보험회사 다니는 사람도 있었는데 그 사람 얘기 들으면서 보험일도 해봐야겠다는 생각을 했고요. 택시 할 때도 물론 사람이 궁금해서 했어요. 한 달 했는데 사람도 많이 만났고 조금 알겠다는 생각도 들었어요. 그만둔다고 하니까 같이 일하는 분들이 한 여섯 달은 해봐야 되는 거 아니냐고 말씀도 하셨지만요.”
-하고 싶은 일은 뭐예요. 인권운동으로도 유명했고, 정치도 하고 싶다고 했지 않았나요.
“고등학교 때까지는 정치를 하고 싶었고, 대학에 와서는 사법시험을 봐서 변호인이 돼 뭔가 바꿔보고도 싶었습니다. 사법시험 공부는 재미있었어요. 하려면 수석을 해서 나 하는 일에 도움받고도 싶었고. 왜 사람들은 권위, 지위 같은 데 약하잖아요. 내가 그런 사람이 되면 내 말이 더 잘 먹히겠지 이런 거요. 그런데 점점 의미가 없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지금은 영화감독을 하고 싶어요.”
-의미가 없어진 이유는 뭡니까.
“종교자유를 얘기할 때도 그랬고 이라크전 때도 우리 한번 나가보자, 뭔가 해보자 이런 생각을 했어요. 그런데 참 대다수는 무관심하더군요. 참 이상하죠. 응원은 하지만 직접 나서지는 않아요. 점점 더 의문이 들더라고요. ‘내가 이런다고 바뀔 수 있을까’ ‘바뀌면 행복할까’ ‘이 사람들을 위해 뭔가를 바꿔줄 가치가 있나’ 부정적이에요. 개인적으로도 세상을 빨리 바꿔놓고 재밌게 살려고 했는데 이젠 그냥 저만 재밌게 살면 된다고 봐요. 고등학교 때의 제가 세계평화를 꿈꿨다면 지금은 나 개인의 행복을 위해 사는 거죠.”
-영화는 왜 하고 싶은 겁니까. 영화를 직접 찍기도 했나요.
“영상으로 얘기하면 재밌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영화를 지금까지 두 편 찍었는데 처음 찍은 게 ‘아프리카’라는 다큐멘터리예요. 아프리카에 가는 교양수업이 있었는데 영상을 만들고 싶어서 무작정 찍었죠. 어떻게 찍는지만 공부해가고 뭘 찍을지는 생각 안하고 갔어요. 참 잘 안되더라고요. 또 올해 1월에는 멜로 영화 ‘뜨거운 사랑’을 찍었어요. 한계를 알고 시작했고 보라고 말하는 게 부끄러울 정도죠. 뭐 영화감독도 최종 목표인지는 모르겠어요. 영화를 해서 행복할지도 모르겠고요. 사실 좋아하는 사람이랑 뒹굴거리면서 사는 게 제일 좋은 것 같은데 밥 먹을 돈은 있어야 하잖아요. 그렇게 한번 해보다가 행복하지 않을 것 같으면 그만두려고요.”
-그럼, 인생관이 바뀐 건 일종의 허무주의 때문인가요.
“큰 희망에 부풀었는데 회의가 틈을 비집고 들어왔어요. 고등학교 때는 그래도 이런 무관심을 바꾸려면 내가 더 뛰어야겠구나 싶었어요. 그런데 공부할 시간은 없어지고, 한 번 시험을 망쳐보니까 이거 안되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난 착한 사람이라고 생각했는데, 영향력 있는 사람이 돼야 하는데 이러다가 아무것도 안되겠다는 고민. 갈등이 심했어요. ‘내 능력이 모자라지는 않나’하는 생각도 저를 괴롭혔고요. 사람을 너무 모르기도 했어요. 전 웃고 있는 사람들은 다 행복한 줄 알았어요. 하고 싶은 건 하면 되고, 하기 싫으면 안하면 되니까. 그런데 사람들은 웃으면서도 허무해하고 회의하고 있더라고요. 아프리카에 갔을 때도 다들 한국에 돌아가기 싫어해요. 어, 난 가고 싶은데. 한국에 돌아가기 싫으면 안 가면 되잖아요. 행복할 것 같고 하고 싶은 일이라면서도 안해요. 그럼 내가 굳이 이런 사람들을 행복하라고 일을 벌일 필요가 없는 거구나. 나만 행복할 일을 하되 최대한 행복할 수 있게 해보자. 그런데 또 그렇게 마음 먹으니까 행복이 없어져요. 참.”
-혼자 행복하려고 해도 또 사회가 받쳐줘야 할 테니 아이러니컬하네요.
“빨리 안되니까, 조급함 때문에 점점 더 회의에 빠지는 거죠. 대학 때는 철학수업도 듣고 사회학 수업도 들었어요. 이런 고민을 가지고 선생님들을 찾아뵙고 상담을 받기도 했고요. ‘선생님, 저는 모기를 죽일 때 죄책감을 느껴요. 제가 세상을 바꿀 수 있을까요. 선생님은 행복하신가요.’ 선생님들은 일단 조급하게 생각하지 말라고 조언해 주셨어요. ‘네가 회의를 느끼는 것도 알지만 응원해 주는 사람도 많다’고 하시면서요. 내가 앞으로 어떤 지향으로 살아야 할까에 대해서 답을 듣고 싶었지만 그런 답은 못 들었네요.”
-대학 생활은 어땠습니까. 과도한 관심이 부담스러웠을 것 같은데.
“치열하게 살고 열심히 할 수 있는 좋은 기회라고 생각했어요. 공부도 할 수 있는 좋은 환경이고, 남는 시간은 인권 캠페인도 하면서 24시간을 좀더 활용하려고 생각했죠. 대학 생활 초기에는 재미있었어요. 수업도 좋았고, 법대 노래패도 하고 복싱도 했고요. 그런데 내가 내 자신에게 거는 기대가 너무 컸나봐요. 날 키우기 위해서 다 쏟아야 하는데 벅찼어요. 하루에 서너 시간 자고, 매일 적어도 책은 세 권씩은 읽어야겠다고 생각했는데 하루에 한 권 읽기도 벅차고. 사회를 빨리 바꿔버리고 편안하게 지내려고 했는데 그것도 힘들고. 휴학에는 뭐 그런 이유도 있어요.”
-군대도 가지 않겠다고 선언했죠. 복싱하다 다친 이후로 공익 판정을 받았는데요.
“네. 군대 안갈 거예요. 필요성이 잘 느껴지지 않아요. 예를 들면 경찰은 꼭 필요하다고 생각하는데 군대는 글쎄요. 다른 사람들 말로는 우리가 일제시대 경험도 있고 나라가 없으면 설움을 당하니까 나라 지키러 가야 한다고 하죠. 그런데 군대가 지금 그런 식으로 가지 않는 거 같아요. 대부분은 가서 삽질을 해요. 윗사람들이 아랫사람들 함부로 굴리고. 제가 택시 태웠던 군인들 얘기 들어보면 그래요. 삽질하고 할 일이 없을 때는 쥬얼리 ET춤 배우고 그러다 나갈 때 되면 영어공부 같은 취업준비 시작하고요. 어떻게든 하기 싫어서 십자인대 끊으려고 밟아달라고까지 한다고 해요. 의미 없잖아요. 다들 하기 싫잖아요.”
-그럼 양심적 병역거부 대열에 들어가는 건가요.
“일단 방법을 생각 중이에요. 사실 그냥 갔다 오는 게 편하죠. 군대 갔다온 사람들에게 상대적인 박탈감 같은 것도 안 느끼고, 감옥 가는 것보다 군대 가는 게 낫죠. 그런데 이게 잘못된 제도라는 생각이 드니까 정말 못하겠어요. 군대는 건강한 남자들이 갑니다. 건강하지 않거나 대다수 여자는 안 가죠. 나라 지키는 게 국민의 의무라면 어떻게든지 모두에게 의무를 부과해야죠. 군가산점 제도 같은 걸로 해결하려는 것도 정말 좀 웃겨요. 군대 가는 게 군가산점 얻으러 가는 것도 아니고 모두가 군가산점이 필요한 것도 아닌데 피해를 그런 식으로 보상하려고 하는 거잖아요. 잘못된 제도를 막으려다 보니 잘못된 제도가 계속 만들어지는 거죠.”
-얘기대로라면 본인이 하고 싶은 일은 무작정 하고, 하기 싫은 일은 절대 안해서 그런가요. 너무 튀려고 하는 거 아니냐, 영악한 거 아니냐 하는 비판도 많습니다.
“뭐라고 할 말이 없어요. 물론 저를 싫어하는 사람도 많고 응원해주는 사람도 있지만 별로 신경쓰지 않아요. 언론에 나가면서 제가 하는 일에 더 힘을 받을 수 있으니까 제가 이용한 면도 있지요. 고등학교 때 튀었던 이유는 고3인데 퇴학을 당한다 어쩐다 하면서 튀었던 거 같은데. 좋은 기회라고 생각했어요. 튀면 발언할 기회도 많아지고 교류할 기회가 많아지니까. 대학교 1학년 때 복싱하면서 언론을 많이 탔는데 그때는 의도적으로 이용했어요. 보도가 되면 곧 있을 공익소송에도 참여를 많이 해줄 수 있을 테니까. 물론 저도 부정적인 이미지가 생기는 건 싫어요. 내가 하는 모든 말, 많은 행동이 비호감으로 변하지 않을까. 그래도 노력한다고 될 것은 아니니까, 같은 편을 만들기 위해 노력했죠. 개인적인 비방 같은 건 신경쓰지도 않고요.”
-고등학교 때부터 ‘참여’를 많이 해본 사람으로서 총선이나 대선에서 20대들의 참여율은 왜 그렇게 낮은 것 같습니까.
“얘기를 해봤자 달라지는 게 없으니까. 사실 관심은 많아요. 고등학교 때 봐도 다들 관심이 많았어요. 고2 무렵에는 교육행정정보화시스템(NEIS) 문제가 있었고, 노무현 대통령 탄핵이 있었고요. 얘기해보면 다들 의견이 많아요. 그런데 청소년의 정치적인 참여에 대해서는 너희는 아무것도 아니다, 아무것도 모른다 이러니까 그게 쌓이는 거죠. 실업률도 높아지고 그냥 대학 가라는 분위기니까요. 또 개인주의적인 경향도 큰 것 같고요. 그런데 이게 뭐 20대만의 문제인가요.”
〈 글 김다슬·사진 김세구 선임기자
[email protected] 〉
멀 하든 다 좋은데
군대는 댕겨왔으믄 하는
자그마한 소망이 있넹
(설마 군대 가서도 위헌이라고 단식하려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