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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무서운이야기
건물 앞에는 승합차가 기다리고 있었다. 소령과 일행은 승합차 뒷좌석에 올라탔다. 운전석에는 부사관 한 명이 운전대를 잡고 있었다. 승합차는 다시 꼬불꼬불 바리케이트 사이를 뚫고 도로로 빠져나갔다.
혜주를 비롯한 네 명은 말이 없었다. 각자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는 알 길이 없었지만, 아마도 혜주의 머릿속과 별반 다르진 않을 것이었다. 과연 지금 하고 있는 일이 잘하고 있는 일인가? 여기서라도 그만 빠지겠다고 해야하는 것은 아닌가? 혹시라도 감염이 되어 죽어버리는 것은 아닌가? 이 길이 이승을 달리는 마지막 길이 되는 것은 아닐까?
그러나 그 반대편에는 사태의 원만한 수습 뒤에 주어질 엄청난 보상에 대한 기대들로 가득할 것이었다. 부검팀장이라면 경찰 고위 간부직으로 승진할 수도 있을 것이요, 보건부 관리는 좀더 편한 부서의 장으로 승진이 될 수도 있을 것이었다. 혜주 역시 보건부의 폐암연구소에 평생 연구직을 보장받을 수도 있는 일이었다.
하지만 과장은? 과장은 무엇 때문에 그토록 선뜻 이 일에 자원한 것일까? 혜주는 궁금증이 일었다. 과장 정도라면 이제 더 이상 뭔가를 얻기 위해서 팔을 걷어붙이고 나서지 않아도 충분한 정도의 명성과 지위를 가지지 않았는가?
혜주는 과장이 자신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대단한 사람일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했다. 그렇다면 아마 히포크라테스 선서를 지키는 몇 안되는 진짜 의사일 수도 있을 것이었다. 하지만 혜주는 이내 속으로 고개를 절래절래 저었다. 이 나라에서 그런 희생 정신에 불타는 의사가 저토록 높은 지위까지 오른다는 것이 가당키나 한 일인가.
혜주는 언젠가 허준의 이야기를 읽은 생각이 났다. 혜주의 고향 밀양에 있는 얼음골에서 허준이 스승 유의태를 해부하였다는 이야기는 유명했다. 정사에 따르면 사실은 아니라고 하지만, 암을 연구하는 데 자신의 몸을 제자에게 맡겼다는 허준의 스승 유의태. 그리고 스승을 해부한 제자 허준. 그런 의사들이 요즘 세상에도 있을까.
어릴 적 진규와 함께 의사의 꿈을 키우던 시절, 둘은 허준의 이야기를 담은 소설을 읽고 몇 번이나 이야기를 했던 기억이 있었다. 우리도 커서 꼭 암을 고치자고. 그 때는 그런 순수한 열망만으로도 학문적인 성공뿐 아니라 사회적인 성공도 얻을 수 있을 거라고 믿었다.
생각해보면 천진난만했다고도 할 만 했다. 사회적으로 기반이 닦여있지 않으면 연구를 할 여유도 찾을 수 없는 게 혜주가 경험한 현실이었다.
혜주는 차를 타고 가면서 조금은 자 두려고 생각했지만 이런저런 생각에 도무지 잠이 오지가 않았다. 나머지 사람들도 마찬가지였다. 과장은 무슨 생각을 골몰히 하는지 팔짱을 낀 채 내내 말이 없었다. 부검팀장은 몇 번이고 창 밖을 내다보면서 어디로 가는 중인지 가늠을 하는 것처럼 보였다. 창밖에 어둠이 짙어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아도 그는 습관적으로 창밖을 보았다. 아무래도 경찰 출신이라 경계심이 많은 듯 했다. 보건부 관리는 코트에 손을 찌르고 고개를 앞으로 약간 숙인 자세로 꼼짝하지 않았다. 눈이 작아 눈을 감고 있는지 뜨고 있는지 알 수는 없었지만, 상체가 꼿꼿한 걸로 봐서는 조는 것 같지는 않았다. 어쩌면 그 역시 혜주처럼 잠을 청해보려 하지만 잠이 오지 않는 것일 수도 있었다.
소령은 모자를 푹 눌러쓴 채로 앉아있었다. 마치 나머지 넷을 감시하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혜주는 어쩐지 이 기묘한 정적을 깨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혹시 가는 길에 읽을 만한 보고서 같은 거라도 준비해오지 않으셨어요?"
소령을 향한 말이었다.
"아직 상황이 초기 단계라 아까 제가 브리핑 한 내용 이외에는 보고된 바가 거의 없습니다. 죄송합니다."
"아뇨, 뭐 죄송할 것까지."
혜주는 딱 잘라 말하는 소령의 말투가 어쩐지 미덥지가 못했다. 어쩌면 막무가내로 일에 끌려들어올 때 자신을 데려왔던 두 사내 역시 군대식 말투였기 때문인지도 몰랐다. 군인은 모두 거짓말쟁이라는 느낌마저 들었다. 의도적으로 거짓말을 하는 것은 아니겠지만, 다들 각자가 맡은 부분에 관한 정보밖에 알지 못하므로 자연적으로 자신의 업무가 아닌 부분은 감추어지는 것이었다.
오르막을 한참 꼬불꼬불 올라가던 차가 비포장으로 들어섰다. 어차피 눈을 붙이는 것이 어렵다고 판단한 혜주였지만 이제는 아예 잠을 잘 수가 없게 되어버렸다. 수시로 엉덩이가 의자에서 들썩거렸다. 승합차로 이런 포장도 되지 않은 산길을 올라가다니.
앞 유리 멀리 희미한 불빛이 보이는 듯 했다.
'이제 도착한 걸까?'
혜주는 오른손으로 안경을 치켜올리며 전방을 주시했다. 어둠 속으로 아까 본 것같이 생긴 노란 바리케이트가 보이는 듯 했다. 차가 속력을 줄이며 다가가자 바리케이트 앞에는 초병이 총을 들고 서 있고, '정지'라는 램프가 켜져 있는 것이 보였다. 차가 바리케이트 앞에 서자 램프는 '라이트 꺼'라고 바뀌었다. 승합차의 라이트가 꺼지자 형광조끼를 입은 초병의 모습이 선연히 드러났다.
초병은 뚜벅뚜벅 차 쪽으로 걸어왔다. 운전석에 있던 부사관은 운전석 창문을 내렸다.
"충성!"
초병은 부사관을 보자 먼저 경례를 붙였다. 영화에서처럼 총을 겨누고 암호를 교환하는 모습은 없었다.
혜주는 초병이 혼자 뿐인데 저 거대한 바리케이트를 어떻게 치우고 차가 들어가나 하는 생각을 했다. 물론 혜주가 상관할 일은 아니었지만, 함께 내려서 바리케이트 치우는 일을 도와야 하는 건 아닌가 하는 쓸데없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그때 소령이 승합차의 옆문을 열었다.
"내려서 차를 갈아타시죠."
'아, 차를 갈아타는 구나.' 혜주는 자신이 잠시지만 정말 쓸데없는 고민을 했다는 걸 깨달았다. 하긴 이 산길을 승합차를 타고 계속 들어간다는 발상도 웃긴 것이었다.
네 명은 별 말없이 차에서 내렸다.
"보안을 위해 휴대폰과 같은 외부와의 연락 수단을 압수하겠습니다."
초병은 군인다운 말투로 말했다. 소령이 내내 넷을 감시한 것도 혹시 외부로 전화를 할까봐서 그랬건 것이었을까?
"이해해 주시죠. 여기부터는 작전지역입니다."
넷 중 누구도 불평하지 않았지만 소령은 그렇게 거들었다. 과장과 혜주 일행은 군말 없이 핸드폰을 꺼내 끄고는 초병에게 주었다. 초병은 바지에 달린 건빵주머니에서 천으로 만들어진 주머니를 꺼내 넷의 휴대폰은 담았다. 그리고는 주머니를 바닥에 조심스럽게 내려놓았다.
"죄송하지만 확인을 위해 몸수색을 하겠습니다. 양팔을 들어올려 주십시오."
초병은 다시 한 번 넷에게 말했다. 혜주 일행은 멋쩍은 듯 서로를 쳐다보았다.
"이해해 주십시오." 소령이 다시 한 번 거들었다.
혜주는 자신이 여자라는 생각을 하면서 약간은 불쾌해졌다. 과장과 부검팀장, 그리고 보건부 관리의 순으로 몸수색을 마친 초병이 혜주의 앞에서는 약간을 망설인 것도 같은 이유였을 것이었다. 초병은 혜주가 불쾌해하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몸수색을 마쳤다.
"협조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초병은 딱딱하게 자신의 임무를 마쳤음을 보고했다.
소령은 몸수색을 끝낸 네 명을 이끌고 바리케이트를 옆으로 돌아서 지났다. 그러자 약간 멀리의 어둠 속에 군용 지프차가 대기하고 있는 것이 보였다. 넷은 습기 찬 산 특유의 밤공기를 뚫고 지프 쪽으로 갔다. 지프에는 따로 운전병이 있는지 승합차를 운전해 온 부사관은 내리지 않았다. 그러고 보면 승합차를 다시 왔던 곳으로 운전해 갈 사람이 필요하기도 했다.
지프차는 6인승이었다. 얼룩덜룩한 위장무늬가 칠해지긴 했지만 시중에서 판매되는 국산 지프차 그대로였다. 과장을 비롯한 혜주 일행은 모두 뒤쪽으로 탔다.
"그럼 수고하십시오."
소령은 타지 않고 말했다. 다들 약간 놀라는 눈치였다. 그들은 소령도 당연히 함께 가는 것으로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소령도 함께 가시는 것 아니었소?" 과장이 물었다.
"아닙니다. 제 임무는 여기까지입니다. 여기부터는 '붉은손 하나'의 지휘를 받으실 겁니다. 그럼 무사히 일을 끝마치시기를 빌겠습니다."
소령은 대답도 듣지 않은 채 문을 닫아버렸다. 혜주는 어이없다는 생각과 함께 군인은 다 거짓말쟁이라는 생각을 다시 한 번 했다.
소령과 짜기라도 한 듯 운전석에 앉아있던 상병의 계급장을 단 병사는 차를 출발시켰다. 이별의 말도 나누지 못한 채 헤어지는 소령의 모습이 뒷문 너머로 보였다. 그는 어둠 속으로 들어가는 차를 향해 경례를 붙이고 있었다.
자신보다 계급이 높은 군인이 탄 것도 아닌데 그는 도대체 무엇을 향해 경례를 한 것일까?
6.
지프차는 한참을 달렸다. 넷은 소령의 감시가 없어졌어도 서로 말이 없었다. 보건부 관리와 과장은 서로 안면이 있을 법도 했지만 서로 말하기가 서먹한 듯 했다. 혜주와 과장 역시도 서로 무슨 말을 할 법도 했지만 아무 말이 없었다. 물론 혜주가 먼저 말을 꺼낼 수도 있었지만 그렇게 하지 않았다.
혜주가 묻고 싶은 말은 이런 거였다.
"과장님, 왜 저를 끌어들이셨어요?"
하지만 그 말을 이 자리에서 할 수는 없었다. 어쩌면 앞으로도 영원히 물어보지 않게 될지도 모를 일이었다. 물론 과장이 먼저 혜주에게 설명을 할 법도 했지만 과장은 입을 꾹 다물고만 있었다.
차 앞으로 희한한 형상이 보였다. 우주인 같은 복장을 한 군인들이었다. 그들은 화생방 차단복을 입고 있었다. 그리고 그 옆에는 이상한 기계가 놓여있었다.
지프차는 그 앞으로 와서 섰다. 그러자 화생방이 다가와서 경례를 붙였다. 운전석에 앉아있던 상병은 차의 네 개 문을 모두 열었다. 혜주는 무슨 일인지 궁금했지만 곧 알게 되었다.
화생방은 조수석 쪽으로 다가왔다.
"잠시 실례하겠습니다."
화생방은 무엇을 실례하는지 말하지도 않고 막무가내로 차안에 호스의 끄트머리 같은 것을 집어넣었다. 옆에 있던 이상한 기계에서 뻗어 나온 호스였다. 그리고는 그 끝에서 흰 연기가 뿜어져 나왔다.
콜록콜록. 네 명은 기침을 했다. 별로 독하지 않은 소독연기였다. 하지만 예고도 없이 차안에 연기를 뿜어버리자 순식간에 눈앞이 하얗게 변하면서 기침이 쏟아져 나왔다. 혜주는 아무런 통보도 없이 연기를 뿜어버리는 군인들이 너무나 무례하게 느껴졌다.
"뭐하는 짓이오!"
부검팀장의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그러나 아무런 해명도 사과도 없이 연기만이 서서히 사그라 들었다. 연기가 어느 정도 가시고 나자 덜컹하고 차가 출발하는 것이 느껴졌다.
차가 속력을 내면서 운전을 하는 상병은 연기가 다 사라지지도 않았는데 창문을 닫았다.
"죄송합니다. 대대장님 명령이라 어쩔 수 없습니다. 작전지역에서는 누구나 구역을 통과할 때마다 소독을 해야합니다."
네 명은 별다른 이의를 제기하지 않고 그대로 차에 몸을 맡겼다.
"저기 보이는 저 건 뭡니까?"
습관적으로 창 밖을 기웃거리던 부검팀장이 입을 열었다. 그가 가리키는 곳을 보니 검은 밤하늘에 희뿌연 연기가 치솟고 있었다.
"뭐 말씀하시는 겁니까?" 운전을 하느라 한 눈을 팔 수 없는 상병이 되물어왔다.
"왼편에 보이는 연기 말이오." 과장이 부검팀장 대신으로 설명을 했다.
"아, 그건 시체를 소각하는 연기입니다."
"소각? 아직 원인이 구명되지도 안았다면서 막무가내로 소각을 하는 겁니까?" 과장이 인상을 찌푸리며 되물었다.
"대대장님 명령입니다."
상병은 속 편하게 대답했다. 그리고 아마 그것이 그가 할 수 있는 최선의 대답일 것이었다.
"그 대대장이라는 사람 좀 만나야겠군."
과장은 불편한 심기를 드러내며 혼잣말을 했다. 그러자 상병이 그 말을 들었는지 대꾸를 해왔다.
"그렇지 않아도 지금 대대장님께서 주무시지 않고 기다리고 계십니다. 지금 그리로 가는 중입니다."
네 명은 궁금증과 안도가 섞인 표정으로 아무 말이 없었다. 대대장이라면 이른바 '붉은손 하나'를 말하는 것이었다. 그는 과연 어떤 사람일까? 이런 위험한 지역을 관할하고 있는 사람이라면 투철한 군인정신을 가진 사람일까? 아니면 그 역시 사태수습 이후에 뭔가 엄청난 보상을 약속 받은 것일까? 아마도 차에 타고 있는 네 명처럼 그런 심정들이 복잡하게 섞여있는 상태일 것이었다.
차가 몇몇 천막 막사가 마련되어있는 공터에 이르렀다. 군용천막으로 만들어진 막사라 어둠에 섞여 잘 보이진 않았지만 분명 너댓개 정도 되는 것 같아 보였다. 차는 막사가 모여있는 입구에 정차하고 시동을 껐다.
총을 든 군인 한 명이 다가왔다. 젊은 중사였다. 그는 과장의 옆에 있는 뒷좌석의 문을 열었다.
"어서 오십시오. 대대장님께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일행은 차에서 내려 중사를 따라갔다. 중사는 두 번째 막사 쪽으로 걸어갔다. 막사 앞을 지키고 있던 초병이 경례를 붙여왔다. 중사는 경례도 받지 않고 막사의 문을 열었다.
"충성."
"어, 그래. 왔나?" 안쪽에서 약간 칼칼한 목소리가 들렸다. 평소에 고함을 많이 치는 사령관이라는 인상이 풍겼다.
"들어오시라고 해."
"네."
중사는 일행을 향해 뒤쪽으로 돌아섰다.
"들어오시죠."
과장을 선두로 일행은 막사 안으로 들어섰다.
막사 안에는 중령 계급장을 단 대대장이 서서 그들을 맞았다.
"어서 오시오. 거기 의자에 앉아요."
한 쪽에 마련된 테이블과 의자를 가리키며 대대장이 말했다. 중간키에 약간 마른 듯한 그는 딱히 날카로운 인상을 풍기지는 않았지만 눈매만은 날카로웠다. 나이는 50대 정도로 보였지만 얼굴이 검게 탄 까닭에 늙어 보이는 것뿐이지 실제로는 더 젊을 수도 있다는 생각도 들었다.
일행은 테이블 쪽으로 가서 각각 의자 하나씩을 차지하고 앉았다. 대대장도 남은 의자 하나에 앉았다. 테이블까지 마련된 막사는 사령관의 그것답게 나름대로 잘 정돈되어 있었다.
"소각을 지시하신 것이 중령입니까?"
다짜고짜 과장이 물었다. 원래부터 직설적인 성격이긴 했지만 혜주는 약간 놀랐다. 딱딱한 병영의 분위기에 혜주는 어느 정도 압도되어 있었던 까닭이었다. 역시 과장은 남다른 면모를 지니기는 했다.
"아, 그것 말이오? 그렇소. 내가 지시했소. 마침 버섯 재배하던 건물이 소각하기도 좋고 해서." 약간은 공격적인 과장의 질문에 대대장은 아무렇지 않다는 듯 대답했다.
"아직 사태의 원인도 밝혀지지 않은 마당에 그렇게 아무렇게나 처리해도 되는 겁니까?"
과장은 다시 한 번 말했다. 아까보다 훨씬 공격적인 질문이었다. 마치 문책을 하는 듯한 인상마저 풍겼다. 혜주는 '아직 사태의 원인도 밝혀지지 않았는데 그렇게 처리해도 괜찮을까요?'하는 식으로 좀 더 공손하게 물어야 하는 것이 아닐까 싶기도 했다. 하지만 어차피 내뱉어진 말이고, 게다가 넷 중의 팀장은 과장이니까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전염병이 퍼지는 데에는 소각하는 게 최상이오. 사람을 묻어놓으면 들쥐가 파먹어서 병균을 옮긴단 말이야."
대대장은 역시 아무렇지 않게, 심지어는 얼굴에 웃음마저 띠면서 대답했다. 사실 대대장의 말이 틀린 것은 아니었다. 물론 전염병이라는 가정 하에 말이지만.
"하지만 전염병인지 어떤지도 아직 모르지 않습니까."
"이렇게 사람이 죽어나가는데 이게 전염병이 아니면 뭐겠소? 하루에 사람이 하나씩 죽어나가고 있단 말이야. 시체는 발생하는 즉시 소각시키라는 명령이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이오."
대대장의 퉁명스런 대답이었다.
"그럼 군이 이 곳을 관할한 게 이틀 밖에 되지 않는 건가요?"
혜주가 과장과 대대장의 다툼을 끊을 겸해서 다른 쪽으로 말을 돌렸다.
"거의 일주일이 되었지."
"하지만 죽은 사병은 둘 뿐이라고 하던데요?"
"그럼. 사병 둘. 내 피 같은 부하들이 죽었지. 그리고 일차로 왔던 붉은손 네명."
넷은 자신들의 귀를 의심했다. 일차로 왔던 붉은손? 분명 소령은 자신들이 처음으로 투입되는 것이라고 하지 않았던가?
"우린 우리가 처음인 줄 알고 왔는데. 어떻게 된 겁니까?"
과장이 놀라운 침착성으로 물었다.
"그래요? 허, 거 참. 나야 외부에서 일을 어떻게 처리하는 지 알 수가 있나. 어쨌든 그랬다니 유감이오. 뭔가 본부에서 행정상의 착오가 있었나보지."
대대장은 아무렇지 않게 대답했다. 마치 혜주 일행을 놀리는 듯한 느낌마저 들었다.
"우릴 속였어!" 부검팀장이 참지 못하고 소리쳤다.
"이제 와서 어쩌겠소." 보건부 관리가 체념하듯 부검팀장을 달랬다.
"부검을 할 시신은 남겨두시고 소각하신 겁니까?"
과장의 입에서는 의외의 말이 나왔다. 혜주는 다시 한 번 과장의 과감성에 놀랐다. 이 사람은 자신이 속았다는 사실이 분하지도 않은 걸까? 아니면 혹시 과장은 이미 모든 걸 알고 온 것이 아니었을까? 혜주는 과장이 이런 사실을 미리 알고 있었으면서 자신을 끌어들였을 리는 없다고 믿으려 했지만, 마음 한 구석에는 약간의 의심이 남았다.
"글쎄. 남아있는 시신이 있을까? 아마 없을 꺼요. 희생자가 생겨나는 족족 태워버렸으니."
"그런 무책임한 대답이 어디 있소!"
과장은 격앙된 목소리로 말했다. 거의 화가 폭발하는 듯 한 수준이었다. 실지로 무책임한 대답이기는 했으나 과장을 제외한 혜주와 나머지 둘은 과장의 따끔한 말에 더욱 놀랄 수밖에 없었다. 그들은 자신들이 속았다는 생각에 이미 자신들의 임무는 잊어버리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마치 과장의 질책이 혜주 자신에 대한 질책인 듯 느껴졌다. 혜주는 다시 자신의 막중한 임무를 상기했다.
'그래, 우린 생명을 구하러 여기에 온 거다.'
혜주는 속으로 되뇌이는 순간 자신이 좀 덜 계산적으로 바뀌었다고 느꼈다.
대대장은 과장의 언사에 기분이 틀어졌는지 미간을 찌푸리며 과장을 노려보았다. 그러더니 이내 자신의 감정을 수습하는 듯 입을 아래위로 다물었다. 그리고는 군인 특유의 냉정함을 되찾고 대답을 했다.
"내가 무책임하다고 했소? 아무도 내게 무책임하다는 말을 할 자격은 없소. 알겠소? 아무도. 왜냐고? 내가 아니면 아무도 여기 이 자리에 있지 않을 테니까. 아무도 자신의 목숨을 내놓고 자신의 조국을 수호하려고 하지 않을 테니까. 야전이 뭔지, 전쟁이 뭔지, 조국을 위해 목숨을 바친다는 게 뭔지도 모르는 기생 오래비 같은 젊은 장교들은 하나같이 몸을 사리고는 도망쳐버리고, 나만 여기 지휘관으로 남아서 바로 이 곳을 지키고 있는 거요. 알겠소? 내가 목숨을 걸고 이 곳을 지키고 있는 거라고! 내가! 하루에 한 명씩 죽어나가고 있는 이 곳을 내가 지키고 있어!"
말을 하는 동안 대대장은 감정이 폭발해 버렸다. 과장을 포함한 혜주 일행은 대대장의 말에 아무런 대꾸도 하지 못했다. 대대장도 자신의 감정을 추스르는 듯 다른 곳을 쳐다보며 말을 하지 않았다. 막사 내에는 일순간 정적이 감돌았다.
"대대장의 말 알겠습니다. 제가 말실수를 했군요."
과장이 조심스럽게 사과의 말로 정적을 깼다. 대대장은 어느 정도 냉정을 되찾은 상태였다.
"괜찮소."
"제가 드리고 싶은 말은 어쨌든 체계적인 대처가 필요하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그러기 위해서는 부검을 통해 병의 원인을 알아낼 필요가 있구요."
"부검은 걱정 마시오. 곧 희생자가 생길 꺼요. 하루에 한 명씩 죽어나가고 있으니까. 일단 오늘은 마련된 숙소에서 쉬도록 하시오. 숙소는 원래 폐가이던 곳을 치워놓았소. 나야 군인이니까 이런 천막 막사에서 지내도 과장 일행은 숙녀 분도 끼어있으니 잘만한 데서 자야지 않겠소."
혜주는 자신을 위해 숙소를 마련했다는 말에 어쩐지 자신이 남자들만의 세계에서 짐이 되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들어올 때 몸수색을 할 때도 그렇고.
그때 전화벨이 울렸다. 내선 전화의 벨소리는 귀청을 때릴 정도로 컸다. 대대장은 일어나서 뒤쪽에 있는 책상에서 전화를 받았다.
"그래. 무슨 일이야? ........ 어디? 3중대? 알았어. 잠깐."
대대장은 전화를 끊지 않은 채 한 손으로 수화기의 송화구를 막고 일행에게 물었다.
"희생자가 발생했소. 지금 부검을 할거요?"
일행은 서로를 쳐다보았다.
"지금 합시다. 그래야 정확한 사인을 알 수 있지 않겠소." 과장이 먼저 말했고 다들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 할겁니다." 과장이 대대장을 향해 알려주었다. 막 죽은 시신의 부검이라. 혜주는 어쩐지 소름이 돋았다. 의과대학을 다니면서 죽은 시신의 해부도 수없이 해보았고, 살아있는 사람의 수술도 많이 해 봤지만 이제 막 죽은 시신의 해부를 해보기는 처음이었다.
"그 놈 태우지 말고 놔둬. 부검해야 하니까."
대대장은 전화를 끊었다. 그리고는 밖을 향해 크게 소리쳤다.
"이봐!"
"상병 최정태!"
문 앞에 서 있던 초병이 크게 관등성명을 대고 안으로 들어왔다.
"이 분들 7구역으로 이동시켜."
"네 알겠습니다."
대대장은 혜주 일행을 향해 입을 열었다.
"일어나셔서 제 7구역으로 이동하시죠. 그리고 내일 아침에 다시 뵙겠습니다."
과장과 일행은 일어나서 머뭇거리며 초병을 따라 막사를 나섰다. 대대장은 밖으로 배웅조차 나오지 않고 그들을 보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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