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도착증
황당하다. 곽노현 교육감 사태 때는 진보진영의 거의 대부분이 그를 일방적으로 옹호한 바 있다. 하지만 이정희 후보 사건 때는 진보진영의 거의 대부분이 그녀를 일방적으로 비판하고 나섰다. 둘 다 후보 단일화를 위한 과정에서 벌어진 일인데, 왜 사안을 처리하는 방식이 이처럼 다른 것일까? 도덕성은 보수에게 내다버리라고 외치던 그 사람들이 이제는 서슬퍼렇게 이정희의 도덕성을 비난한다. 그 사이에 진보진영이 진중권이라는 떠벌이의 주장을 받아들여 도덕재무장이라도 한 걸까? 물론 그럴 리 없다.
두 사안을 비교해 보자. 곽노현 교육감 사건은 1심 재판에서 돈을 받은 박명기 교수에게는 3년 형이 내려졌다. 돈을 준 곽 교육감은 구속 기소되어 같은 재판에서 5천 만 원의 벌금형을 받았다. 여기서 볼 수 있듯이 그 사안은 사법적 처벌을 요하는 중대한 범죄였다. 반면, 이정희 캠프의 여론조작 사건은 어떤가? 사실 이건 사법적 사안이라기보다는 도덕적 사안이다. 일각에서 문자를 보낸 이를 검찰에 고발했다 하나, 마땅히 처벌할 법조항조차 없다고 한다. 잘 해야 ‘업무방해’ 정도를 걸어 입건하려나?
그런 의미에서 두 사안을 대하는 진보진영의 태도는 어떤 면에서는 도착적이었다고 할 수 있다. 즉 그들은 사법적 처벌이 요구되는 ‘범죄’는 옹호를 하고, 윤리적 비난이 요구되는 오류는 비난을 했다. 뭔가 뒤집힌 것 같지 않은가? 그렇다면 캐물어야 할 것은 이런 것이리라. ‘무엇이 이 두 사안에서 이른바 진보진영’의 태도를 도착적으로 만들어 버린 것일까?’ 두 사안에 대해서 이른바 진보진영의 태도는 180도로 달랐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두 사건을 대하는 그들의 태도에는 어떤 일관성이 있다.
정치는 다 그런 것?
곽노현 사건 때는 그를 옹호하는 것이 선거 국면에서 유리하다고 판단한 것이다. 물론 이 판단은 어리석은 것이었다. 왜? 그때 곽 교육감을 사퇴시키고 재선거를 치렀다면, 진보진영은 도덕적 정당성을 잃지 않고, 지금쯤 새로운 진보적 교육감을 갖고 있을 테니까. (10.26 선거에서 드러난 유권자의 성향으로 보건대, 재선거를 했어도 진보적 교육감은 무난히 당선됐을 것이다.) 아무튼 당시에 진보진영을 이루는 대부분의 세력은 그 어리석은 판단이 진영의 '공동의 이해'에 부합한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하지만 이정희 사건에서는 그런 ‘공동의 이해’가 존재하지 않았다. 먼저 진보신당을 지지하는 세력은 통합진보당 자체를 바라보는 눈이 곱지 않다. 그들에게 이번 사건은 통합진보당에 합류하지 않은 자신들의 판단이 옳았음을 보여주는 명확한 증거로 여겨졌다. 유시민의 당무 거부 사태로 이미 드러난 바 있듯이, 통합진보당 내의 국민참여당 계열 역시 이정희가 속한 계파의 횡포에 당한 아픈 추억을 갖고 있다. 게다가 민주통합당은 당연히 경선지역에서 자당 의원의 수를 하나라도 더 늘리는 데에 이해관계가 있다.
이렇게 엇갈리는 이해관계 속에서 이정희는 삼각파도를 맞아야 했던 것이다. 상황이 이렇게 돌아가다 보니, 반MB 전선의 대의마저 이정희에게 불리하게 작용할 수밖에 없었다. 즉 그녀가 사퇴를 해야 위기에 처한 야권연대를 구할 수 있었던 것이다. 결국 민주통합당과 통합진보당의 지도부가 만난 자리에서 이정희의 사퇴가 결정되고, 그 답례로 백혜련씨가 안산 단원갑에서 출마를 포기함으로써 사태는 가까스로 수습의 국면을 맞는다. 보도에 따르면 문재인씨의 지도력이 거기에서 결정적 역할을 했다고 한다.
한 마디로, 곽 교육감의 사퇴를 반대하는 것이나, 이정희 후보의 사퇴를 주장하는 것이나, 어차피 정치적 필요에 따른 전략적 판단이었다는 점에선 동일하다.
과연 잘한 결정일까?
하지만 문제를 꼭 이렇게 풀어야 했는지는 의문이다. 결국 이정희 후보의 자리를 이상규 후보가 물려받음으로써, 어느 세력도 원하던 것을 얻지는 못했기 때문이다. 이상규 후보가 과연 이정희 후보보다 나은 선택일까? 이정희가 문제가 된 경기동부연합의 ‘얼굴’이라면 이상규는 차라리 ‘몸통’에 해당한다. 한 마디로 사건은 연합이 쳤는데, 책임은 이정희가 지고, 열매는 다시 연합이 따먹은 셈이다. 그렇다고 후보를 안 내자니, 그것은 사실상 경선에 불복하고 탈당계를 낸 인물을 야권단일후보로 선언하는 것이나 다름없어 진다.
이정희가 사주했다는 증거가 없는 한, 그에게 캠프의 관리책임만 물어 페널티로 경선의 무효를 선언하고, 재경선을 하는 게 합리적이었다. 그것이 또한 양당이 함께 만든 경선관리위원회의 권고이기도 했다. 진보진영 내의 모든 세력이 이 권고에 따랐다면, 또 엉뚱하게 곽감 사태 때 보여줬던 그 숭고한(?) 연대의식의 절반이라도 보여줬더라면, 문제는 그렇게 수습이 될 수 있었을 것이다. 물론 김희철이야 거기에 응하지 않겠지만, 경선에 이어 재경선마저 불복한 그는 독자출마를 해도 별 장애가 되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진보진영의 각 세력들은 각자 자기들의 정치를 했고, 그 결과 그 누구도 원하지 않는 결과를 갖게 됐다. 물론 ‘사퇴를 해야 한다’는 주장도 ‘재경선을 해야 한다’는 주장 못지않게 논리적 정당성을 갖고 있다. 하지만 ‘돈을 주었다.’고 자백한 곽 교육감을 한 목소리로 옹호하던 그 사람들이 ‘문자를 보내라.’고 사주한 증거도 없이 한 목소리로 이정희의 사퇴를 요구하는 것은 아무리 생각해도 이상한 일이다. 게다가 이 사건은 사법적 사안이라기보다는 도덕적 사안에 가깝지 않은가.
더 이상한 것은 새누리당이다. 그들은 통합진보당을 향해 ‘관악을’을 무공천 지역으로 하라고 요구한다. 물론 거기에는 나도 동의하는 편이다. 하지만 여론조작의 시도는 새나라당에서 더 광범위하게 일어났다. “전화 오면 2~30대라 캐라.”(대구 수성을) “당원이나 공무원이라 물으면 아니라고 해라. 그건 불법이 아니다.”(경북 영주) 그 밖의 다른 지역에서도 이와 비슷한 사례가 있었다는 보도가 있었다. 새누리당은 다른 당에 요구를 하기 전에, 자기들이 옳다고 생각하는 그 요구를 스스로 실천할 의무가 있다.
추기
왜 이정희 후보를 일방적으로 옹호하냐고 말하지 말라. 나처럼 이정희를 신랄하게 비판해온 사람도 없을 것이다. ‘연합’의 오류를 상대화 하는 게 아니냐고도 말하지 말라. 그 사람들 하는 짓이 싫어서 열성을 바쳐서 함께 만들었던 당에서 튀어나온 사람이다. 그들을 비난하려면, 실제로 그들이 한 짓만큼 비난을 하면 된다. 아울러 이정희를 동부연합과 동일시하지도 말라. 그녀가 그 세력의 영향 아래 있을지는 모르나, 이제까지 그 세력이 보여줬던 것과는 다른 행보를 해왔기에 오늘날의 대중적 인기를 얻을 수 있었던 것이다.
출처 :
http://blog.ohmynews.com/litmus/176416 많은 생각을 하게 하는 글이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