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석간판이 나올 시간쯤은 지난 거 아닌가?’뒤를 돌아보자, 남푸른 밤하늘과 시커먼 산의 경계,어렴풋 달빛에 반짝이는 아스팔트,좌우로 끝도 없이 이어진 논밭만이 펼쳐지고 있었다.그 흔한 바람 한 점 조차 불지 않자, 마치 세상은 멈춰있는 듯 보였다.어찌, 풀숲이 이렇게 펼쳐졌는데, 벌레새끼 한 마리 없는가.봄기운 냄새 맞은 개구락지며, 뱀들은 밤잠을 청하고 있나?‘어떻게 이렇게 조용하지.’앞으로도 뒤로도 똑같기만 한 풍경은 내가 마을 초입에서 좌측을 돌아서나왔었는지, 우측을 돌아서 나왔었는지 조차 애매모호하게 만들어 놓았다.이대로 앞으로 가면, 마을을 지나 입석간판의 반대방향이라 손 치더라도,어딘가가 나올 것이다. 그래도 사람 사는 곳이다. 어떤 마을이건 번화가건연결이 되 있을 법도 하다.시대가 어느 때인가.90년대만 같았어도, 미래 예상도 그리기 대회에서하늘 나는 자동차를 그리기 바쁘던 2013년도다.어딘가로는 이어졌을 것이다.긍정적인 생각으로 차분함을 되찾고 싶었다.어딘가로 이어진 것이 더 깊은 산 속이나, 강변이라는생각이 떠오르기 전까지는 차분해 질 수도 있을 듯 했다.왜, 기대하지 않기로 마음먹은 자동차는 정말로몇 시간 동안 단 한 대가 지나가질 않는 것일까.매달려오지 않는 지연이 때문에 한참을 구부정하게 걸었다.허리 근육이 끊어질 것처럼 아픈 것이, 혹여 이미 끊어졌는지도모른다는 착각마저 들게 했다.“선배, 저 내려줘요.”“뭐?”“선배, 저 내려줘요.”“너 정신이 들어?”“잠깐만 내려줘요. 선배, 저 내려줘요.”지연이의 목소리가 들리면서부터 주변의 들풀이며 산자락이 부산스레 나풀거렸다.풀잎이 서걱거리는 소리에 대비하여 큰 바람이 날아들까, 몸이 움츠러들었지만,먼 곳에서 분 바람 이었는지 차가운 밤바람에 얻어맞지는 않았다.“선배, 저 내려줘요.”지연이의 정신이 돌아왔다고 하나, 멈춰서는 안 될 일이었다.아직 지연이의 몸은 식을 대로 식어 있었고, 방향까지 잃어버린 상황이었다.시간이 얼마나 더 지체될지 모르는 마당이었다.휴식을 취하는 것은 치명적인 결과를 초례할 지도 모르는 일이었다.치명적, 지연이, 잃어버린 길, 시간. 잡스런 단어들이머리를 맴 돌면서도 나는 흙바닥에 지연이 엉덩이를 살살 내려놓았다.핑계를 찾은 듯, 마치 나중에 무슨 일이 생겼을 지라도“네가 내려달라고만 하지 않았으면.” 하고, 대꾸할 핑계를 손에 쥔 듯.지연이를 땅으로 내려놓았다.“너 언제부터 정신이 들었어?”차가운 몸의 지연이와 매듭을 지어 놓은 이불을 풀었다.마침 또 바람이 한 번 일어 난 듯 사방의 풀잎들이 나부껴 춤을 추었다.지연이와 몸을 때자, 밤기운이 등으로 달라붙었다.분명 쌀쌀할 것이라 예상하던 봄밤의 기온이었으나,지연이의 몸이 떨어져 나가자, 난로불을 쬐는 듯 금방 따땃하게 등짝이 달궈져 갔다.“지연아.”“….”“지연아?”“선배, 저 내려줘요.”“뭐?”뒤를 돌아보자, 퍼런 이불이 형체를 잃은 채 널부러져 있었다.이불을 감싸고 있어야 할 지연이를 찾아 고개를 바쁘게 돌렸지만,지연이의 흔적이 전혀 남아있질 않았다.“선배, 저 내려줘요.”마치 귓가에 대고 직접 속삭이는 듯 지연이의 목소리가 들렸다.그리고 또 한 차례 풀잎이 요동을 치더니, 밤 그림자에 숨어있던들 고양이 한 마리가 풀숲에서 슬그머니 머리를 내밀었다.“선배, 저 내려줘요.”온통 검을 털의 들 고양이는 어둠에 몸을 섞으며 유유히 내게로 다가왔다.고양이의 눈빛이 아스팔트길을 초록빛으로 도배할 만치 선명하게 보였다.그리고.“선배, 저 내려줘요. 커억! 컥! 선배, 저 내려줘요. 컥!”고양이는 목을 길게 빼며, 목이 막혀버린 듯 토악질을 시작했다.고양이가 목을 뺄 때마다 헛바람이 통하는 소리가 들렸다. 헛바람이통하는 소리가 들리는 동시에 지연이는 “선배, 저 내려줘요.” 하고 나를 불렀다.그 소리가 너무 명확해, 귀에 입을 대고 말하는 듯 마치지연이의 입 바람까지 귓불에 와서 닿는 것처럼 생생했다.“선배, 저 내려줘요.”고양이는 고통스럽게 입을 벌리며 고개를 땅으로 하늘로 젖히고 박기를 반복했다.이내 고양이 입에서는 차가운 은빛 깔의 네모반듯한 쇳덩이 같은 것이 반짝이며흘러나오기 시작했다.“선배, 저 내려줘요.”언제 저것을 삼켰을까. 아니 어떻게 삼켰을까.고양이는 자기 머리통보다도 곱절은 긴 녹음기를 힘겹게 땅으로 내려놓고 있었다.“아, 진짜. 선배 잠깐만, 잠깐만 내려줘요. 선배, 저 내려줘요.”“헛소리 할 생각하지마. 형도 인내심에 커트라인 있어.”녹음기에선 낮 동안 향나무 앞에서 있었던 대화가 재생되고 있었다.고양이는 목젖을 괴롭히던 녹음기를 게워내 속이 시원해졌는지,새침하게 돌아서선 풀숲 사이로 냉큼 뛰어들었다.“선배, 저 내려줘요.”녹음기에선 지연이의 목소리가 계속해 반복 재생되고 있었다.“지연아.”“선배, 저 내려줘요.”“지연아!”“선배, 저 내려줘요.”자리에서 벌썩 일어난 순간, 검은 색 거대한 운영이 내 앞을 순식간에 지나쳤다.눈에 보이지도 않는 그림자에 놀라 몸을 움츠러들었지만, 금방 정신이 말짱하게 돌아왔다.“선배, 저 내려줘요.”눈앞에 지연이가 보였다.지연는 초승달에 매달린 듯 밤하늘 허공에 걸린 채 팔을 주욱 늘어트리고 있었다.늘어진 팔이 마치 날개라도 되는 냥, 지연이의 몸이상하로 올랐다 떨어졌다를 반복하며 힘없는 날개 짓을 했다.또 한 번, “선배, 저 내려줘요.” 소리가 귓가에 울렸을 때는시야에 지연이 외에는 아무것도 들어오질 않았다.도로를 따라 지연이가 부양하는 방향을 쫓아 박차를 가하는 동안할머니의 불길한 이야기가 뇌리를 스쳤다.“저 향나무에서는 열매가 맺어져요. 총각. 사람 열매.”- 6부 끝 7부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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