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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ritten by 무명논객
주권의 시대 : 주권은 어디에 있는가?
주권 국가에 살고 있으며, “주권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라고 헌법에 명시된 곳―소위 “자유민주주의 국가”라고 불리는 곳―에 살고 있지만, 정작 그 주권이 어디에서 발현되고 어떻게 효력을 발휘하며 어느 곳에서 ‘정지’되는지에 대한 관심은 찾아보기 어렵다. 필자의 질문은 여기서 기원한다. 명백히 우리는 ‘주권’을 지니고 있으며 주권자로써의 지위가 명백히 헌법에 보장되어 있고, 권력의 정당성 역시 이러한 주권자들의 동의로부터 기원하는 것이 분명한데 어째서 우리의 ‘힘’은 이토록 나약한가? 대체 ‘주권’은 어디에 있으며 어떻게 발휘되는 힘인가?
주권에 대한 논의는 일찍이 근대 유럽에서, 홉스-로크-루소로 이어지는 소위 ‘사회계약론’ 3인방으로부터 기원하였다고 보는 것이 일반적이라고 볼 수 있다. 특히 홉스의 유명한 저서 『리바이어던』에서 홉스는 주권의 ‘양도’라는 개념을 사용하여 권력의 성립과 그 정당성에 대해 말한 바 있으며, 루소의 경우는 홉스보다도 더욱 급진적으로, 결코 양도할 수 없는 고유의 것으로써 ‘주권’을 이야기한 바 있다. 이로부터 알 수 있듯, 주권에 대한 가장 고전적인 논의는 주권의 성격이 어떠하며, 그것이 권력과 어떠한 관계를 지니고 있는지에 대한 것이라고 말할 수 있겠다. 다시 말해, ‘주권’은 필연적으로 정치와 연관된 것이며, 정치가 ‘가능한 곳’에서 주권이 ‘가능’해지는 것이다.
아감벤은 “인간이란 무엇인가?”라는, 다소 뜬 구름 잡는 것처럼 보이는 이 질문이야말로 현대 정치철학이 가져야 할 가장 중요한 근본적 물음이라고 주장한다. 그 전까지 정치의 역할은 인간의 삶의 한 부분으로써, 부수적인 어떤 것으로 간주되었지만 이제 소위 “근대성의 문턱”을 넘어선 이상, 인간 존재에 대한 실존적 물음은 그 자체로 ‘정치적 질문’으로 기능하게 되었다. 우리는 “인간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정치적’으로 답변할 준비가 되었는가? 말하자면, 이제껏 “인간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여러 가지 해명과 답변이 존재해왔지만―예컨대, ‘인간은 망각의 동물이다.’ 따위의 말들―정작 그것을 ‘정치적’으로 해명하는 답변은 완수되지 않았다. 단 한 가지 명제만 빼고 말이다.―“인간은 주권을 가진 동물이다.”
호모 사케르의 등장
주권의 등장을 근대의 시작이라고 볼 수 있다면, 현대 정치철학이 다룰 수 있는 가장 보편적 범주의 논의는 바로 이 주권과 법의 관계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주권의 등장은 법과 함께 정치를 가능하게 하는 조건들을 만들어내었다. 이를테면, 우리는 헌법에 써져 있는대로, “대한민국은 민주 공화국이다.”, “대한민국의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 등등의 조항들과 함께 소위 ‘민주정치’의 가능성을 획득한다. 그러나 주권이라는 추상적 개념은 법이라는 언어 체계에 등록됨으로써 그 힘을 과시하지만, 법이 ‘정지’된 곳에서는 어떠한가?
‘주권을 가진’ 인간 개체는 법이라는 언어적 상징체계에 의해 통제를 받기 시작하였지만, 동시에 법이 정지된 곳에서는 정치적으로 죽음을 맞이할 수 밖에 없다. 이렇게 ‘법이 정지된 곳’에서는 주권을 가진 개인으로써 법적 지위를 보장받지 못하기 때문에 ‘시민’이 될 수도 없고, 나아가 또다른 주권 국가에 의해 통제되는 것도 아니므로 ‘적’이라 부를 수도 없다. 나아가 이들은 자연적 산물이 아니라 법 자체가 만들어낸 인위적 산물이며, 법에 의해 관리되는 영역이지만 정치의 가능성은 전혀 존재하지 않는 공간이다. 통념적으로 ‘범죄자들의 공간’ 내지는 현대 정치가 의도하지 않았던 일탈의 공간으로 인식되는 이러한 공간들을 두고 이탈리아 정치철학자 조르지오 아감벤은 “호모 사케르(Homo Sacer)”라고 명명하였다.
본래 ‘호모 사케르’는 고대 로마법에 등장하는 단어로써, ‘신성한 인간’이라는 뜻이었다. ‘신성한 인간’이란, 종교적 질서와 세속적 질서 그 어느 쪽에도 속하지 않은 ‘배제된 자’들을 뜻하는 말이었다. 신성한 인간은 우선 종교적 질서로부터 배제되었기 때문에 신과의 어떤 관계도 없으며 따라서 종교적 의미의 ‘희생’의 대상이 될 수 없다. 동시에, 세속적 질서로부터도 배제되었으므로 이들을 살인하는 것은 세속적 살인법에 의해 규제되지 않는다. 신성한 인간은 희생될 수 없음과 동시에 여전히 살해될 수 있는, 법으로부터 완전히 배제된 존재인 셈이다.
호모 사케르의 역설
근대 정치, 나아가 현대 정치는 모두 ‘호모 사케르’의 기반 위에서 이루어진다고 보아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법은 스스로의 존재를 위해 의도적으로 법의 진공 상태를 창출해내야만 했으며, ‘법에 의한 법의 중단’이라는 일견 모순 같은 명제는 일찍이 많은 법학자들이 해명하고 정당화해야만 했던 딜레마 중 하나였다. 저명한 사회학자 막스 베버의 경우 근대 국가의 특징을 “폭력의 배제”임과 동시에 “폭력 수단의 독점”이라는 모순된 명제를 제시한 것도 같은 맥락이라 볼 수 있을 것이다. 바꿔 말하자면 법은 이러한 딜레마를 통해 정치가 가능한 공간을 만들어낼 수 있었다.
‘정치가 가능한’ 공간이 의미하는 바는, 변증법적 논리에 따르면 ‘정치가 불가능한’ 공간을 전제해야만 하는 것이며, 정치가 불가능한 공간은 법에 의해 의도적으로 구성된 공간이라고 말할 수 있다. 바로 이 공간, ‘호모 사케르’들이 있음으로 인하여 정치적 존재로써 우리의 주권이 보증 받게 된다.―이 말은, 호모 사케르의 존재와 정치적 존재 양 자 사이의 공존을 지칭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이는 근대 이후 등장한 인민의 이중적 모습, 즉 정치적 주체로써의 특권적 지위와 박탈당하고 배제된 다중으로써의 모습 양 자 사이의 긴박한 투쟁 관계를 말하는 것이다. 종종 우리는 중요한 명제를 망각하곤 한다. 우리는 단지 ‘살아 있음’만을 말하는 존재가 아니라 정치적 주체로써 우리가 ‘권리가 있음’을 말하는 존재라는 사실을 말이다.
우리는 끊임 없이 호모 사케르와 투쟁한다. 그것은 첫 째, 우리가 법의 테두리 안에 있기 때문이며 둘 째, 법에 의해 박탈된 자들의 존재로부터 기원하는 공포, 즉 “나 또한 저렇게 될 수 있다.”라는 근원적 공포에서부터 비롯하는 투쟁이다. 이런 점에서 우리는 모두 “잠재적 호모 사케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쟈크 데리다는 일찍이 법과 폭력의 관계에 대하여 법은 단지 두 가지 폭력만을 행사한다고 밝힌 바 있다. 그것은 법을 보존하기 위한 ‘법 보존적 폭력’과 새로운 법질서를 수립하기 위한 ‘법 정립적 폭력’으로써, 법과 폭력은 상호 지시 관계에 있다는 것이다. 법의 폭력 앞에 인민은 무력하다. 단지 인민은 법의 폭력 앞에 ‘배제되지 않기 위해’ 끊임 없이 투쟁할 뿐이다. 일찍이 주권자로써 가장 강력한 힘을 가진 인민이 가장 처참하게 추락하는 순간이다.
통합진보당 해산 심판? : ‘정치적 자유’를 허하라
장황한 서론과 함께 거창하게 소개한 ‘호모 사케르’는, 요약하자면 우리 모두를 ‘잠재적 호모 사케르’로 호명함과 동시에 일종의 언표 행위라고 말할 수 있다. 그것은 일종의 기괴한 존재이면서 우리가 일상적으로 접하는, 너무나도 당연한 존재라는 말이다. 그들은 법에 의해 ‘지배’되지만, 법에 의해 ‘배제’된 자들이면서, 법의 외부에 있음과 동시에 내부에 있다고 말할 수 있다. 배제됨으로써 포함될 수 있다는 모순적 존재라는 점은 실로 기괴하지만, 그것이 말하는 바는 명확하다. “나도 이렇게 될 수 있다.”라는 가장 근원적인 공포야말로 호모 사케르의 가장 근본적인 기반이다. 일상적 공포 조장을 통해 지배를 획책하는 공포 정치와는 다르게, 호모 사케르는 법에 의한 아주 자연스러운 통제와 지배를 꾀한다는 점에서 일견 세련된 지배 방식이다. 달리 말하면 호모 사케르의 존재야말로 법치를 가능하게 하는 필요조건이라 말할 수 있겠다.
이런 맥락에서 볼 때, 통합진보당 해산심판은 호모 사케르의 전형이라고 읽기에 무리함이 없다. 그들을 법 밖으로 추방하는 행위는, 그들이 내세우는 거창한 명목―‘자유민주적 기본 질서를 수호하기 위한 것’ 등등―들을 이루기 위함이 아니라 “너희도 이렇게 될 수 있다.”라는 언표에 가깝다. 법 앞에 무력한 인민, 그리고 주권자로써 유일한 힘을 가진 인민이라는 모순된 조건을 가진 우리들에게, 통합진보당 해산심판이 던져주는 질문은 다음과 같다. 대체 정치적 자유란 무엇이며, 그것을 올바로 구현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일견 통합진보당과는 전혀 관련이 없어 보이는 이 질문들이야말로 통합진보당 해산심판이라는 정국을 맞이하여 우리가 던질 수 있는 가장 유효한 정치적 질문이다.
통합진보당 해산심판에 대해 필자는 전적으로 동의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들의 존재가 제기하는 문제는 ‘정치적 올바름’과 더불어 ‘정치적 자유’에의 문제로 환원되어 담론화 되어야 할 문제이다. 그들을 해산시키면 과연 ‘자유 민주적 기본 질서’가 지켜지는가? 그들을 해산시키는 행위야말로 그들을 ‘호모 사케르’로 만듦으로써 ‘정치적 자유’에 관한 모든 논의를 차단하는 것은 아닌가? 그토록 떠들어대는, ‘자유 민주적 기본 질서’를 지키는 선에서 이야기할 수 있는 정치의 가능성은 대체 무엇인가? 자유 민주적 기본질서의 토대를 이루는 주권을 해체하는 것이 대안이라 이야기하는 아감벤을 말하고 있는 필자는 ‘자유 민주적 기본 질서’를 위협하는 존재란 말인가?
필자는 통합진보당에 동의하지도 않거니와 그들의 노선이 옳다고 생각하지도 않는다. 그러나 그들을 정치적으로 ‘싫어함’의 문제와, 그들을 정치적으로 ‘박탈’하는 것은 전혀 다른 차원의 문제이다. 통합진보당의 ‘정치적 자유’는 보장되어야 한다. 그들을 싫어하는 것과는 별개로 말이다.―우리 모두는 잠재적으로 ‘호모 사케르’다. 우리의 자유는 법에 의해 보장되지만 역설적으로 우리는 철저히 정치적으로 자유롭지 못하다. ‘정치적 자유’가 불가능한 곳에, 정치는 존재하지 않으며 따라서 그곳에 민주주의 역시 자리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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