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가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인 배복남 할머니가 12일 별세했다”고 14일 밝혔다. 향년 89세. ▲3일 전인 9일에는 다른 피해자인 윤금례 할머니가 90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두 할머니의 별세로, 현재 정부에 공식 등록된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는 61명으로 줄었다.
두 떨기의 꽃이 또 졌다. 이제 남은 꽃은 61송이뿐이다. 지난해는 열여섯 송이가 사라져갔다.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들 이야기다.
고 배복남 할머니는 경남 하동 태생이다. 18세 되던 해에 중국으로 끌려가 위안부 생활을 강요받았다. 이후 인도네시아 수마트라 섬으로 끌려가 모친 고초를 겪었다. 배 할머니는 최근 경남 양산의 한 요양병원에서 암투병 중에 운명을 달리했다. 배 할머니는 귀국 후 부산에서 거주해 왔으며 2달 전 암판정을 받았다. 빈소는 가족들의 뜻에 따라 마련되지 않았다고 한다. ‘아무 흔적 없이 가고 싶다’는 고인의 뜻에 따라 14일 시신을 화장했다고 정신대대책협의회는 전했다.
배 할머니의 별세 3일 전인 3월 9일. 또 다른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윤금례 할머니도 90세를 일기로 세상과 작별했다. 고 윤금례 할머니는 충북 충주 태생이다. 꽃다운 21세가 되던 해 만주 길림으로 끌려가 일본군 위안부 생활을 강요받았다. 1994년 귀국해 충북 청주에서 지내오다 노환으로 별세했다. 청주의료원 장례식장에 차려졌던 빈소에는 이시종 충북지사가 조문하기도 했다. 윤 할머니는 천주교 공원묘지에 안장돼 종교의 품에 안겼다.
1992년부터 시작된 수요집회 1013차 맞아
1992년 1월 8일 수요일. 서울 중학동 주한 일본대사관 앞. 20년 전 이 날은 이른바 수요집회가 첫걸음을 떼던 날이다. 그러나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다. 이렇게 길어지리라고는.
2011년 12월 14일. 그 수요집회가 1000회를 맞았다. 위안부 피해 할머니들은 일본 정부에 일본군 위안부 강제동원에 대한 사죄와 진상 규명, 책임자 처벌 등을 요구하는 뜻깊은 1000번째 수요집회를 개최하면서 평화비를 제막했다. 소녀상이었다. 한복을 입고 손을 무릎 위에 모은 채 의자에 앉은 위안부 소녀의 모습. 옆자리의 빈 의자는 소녀를 위로하는 사람들을 위해 비워뒀다.
의자 옆 바닥에는 ‘1992년 1월 8일부터 이곳 일본 대사관 앞에서 열린 일본군 위안부 문제 해결을 위한 수요시위가 2011년 12월14일 1000번째를 맞이함에 그 숭고한 정신과 역사를 잇고자 이 평화비를 세우다’라는 문구가 한국어, 영어, 일본어 3개 국어로 새겨져 있다.
지난 2월 14일 이 소녀상 앞에 80대 한 일본인 목사가 섰다. 1970~80년대 서울 청계천에서 빈민구제 활동을 했던 노무라 모토유키 목사다. 일본의 위안부 행적을 사과하며 플루트로 홍난파의 ‘봉선화’를 연주했다. 그는 “이번 일로 일본 정부의 블랙리스트에 오를지도 모르겠다”고 했다. 일본인들의 이런 개인적인 사죄와는 별도로, 이 긴 세월 동안 일본정부를 향한 위안부 피해자들의 항의 목소리에 돌아온 건 묵묵부답 뿐이었다.
한달 뒤인 3월 14일. 1000회에 13이란 횟수가 더 붙었다. 1013차 수요집회가 열렸다. 이번 수요집회는 남다른 의미를 지닌다. 위안부 피해자 이용수 할머니가 정치 입문을 선언했기 때문이다. 이 할머니는 더 이상 기다릴 수 없다는 안타까운 심정을 담아 민주통합당 비례대표 후보를 신청했다.
이용수 할머니 민주통합당 비례대표 신청
이용수(83) 할머니는 이렇게 말했다. “밤마다 세상을 떠난 친구들이 찾아와 한을 풀어달라고 울부짖는다. 아무도 해결을 안해주니 나라도 국회로 들어가야겠다고 다짐했다”라고. 서울신문 15일자는 이용수 할머니가 “누구보다 위안부 피해자들의 아픔을 잘 안다"며 "위안부와 일제강점기 피해자 문제 해결에 진정성이 있다면 나를 비례대표로 뽑아야 한다”고 말했다고 했다.
14일 경향 인터넷판도 이용수 할머니 소식을 전했다. “조선왕조실록과 조선왕조의궤 등 강탈당한 문화재 환수에 중심 역할을 했던 혜문 스님은 ‘제가 일본에서 문화재를 찾아오려고 할 때 일본 국회의원을 만나게 해준 사람이 이용수 할머니라고 했다. 그 어떤 국회의원도 일본 국회의원들을 그렇게 움직이게 할 수 없었다’며 ‘이 할머니가 비례대표 1번이 되는 것은 역사적 상징성이 있다’고 말했다”는 것이다.
이용수 할머니는 15세에 일본군 위안부로 대만으로 끌려갔다가 1945년 고향 대구로 돌아왔다. 이 할머니는 2004년 서울행정법원에서 외교통상부 장관을 상대로 한 ‘한일회담 문서공개 소송’에서 원고 대표를 맡아 승소를 이끌어냈다. 2007년 미국 하원 청문회에 출석, 위안부 역사를 증언 하면서 위안부 결의안이 채택되도록 하는데도 힘을 썼다.
일본만 탓할 일이 아니다.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들에 대한 대한민국의 시선과 배려 또한 차갑다. 사회적 인식이 여전히 바뀌지 않고 있다. 윤미향 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정대협) 대표는 1000회 집회를 앞두고 가진 지난해 12월 11일자 머니투데이와의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영화계의 몇 분에게 위안부 문제를 영화화해 줄 것을 요청했지만 돈이 안 된다고 판단했는지 어렵다고 했다. 위안부 문제에 대해 자신감을 갖고 뛰어들 수 없는 사회적 인식이 너무나 안타깝다.… 최근 할머니들이 타고 다니는 승합차가 낡아 자동차 회사들에 후원을 요청했지만 기업 이미지와 맞지 않는다며 거절했다.”
(2011년 12월 14일 '미디어 몽구'를 비롯한 시민들이 후원금을 모아 승합차 한 대를 마련, 위안부 할머니들에게 기증했다. 2012년 3월 1일엔 특임장관실과 현대자동차도 승합차 한 대를 기증했다.)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들의 수요집회는 3월 14일로 1013회를 찍었다. 2000회까지 가도록 팔짱만 끼고 보고만 있어야 하는가? 대한민국 정부, 사회단체, 국회 모두가 운명을 달리한 배복남, 윤금례 할머니에게 고개 숙여야 할 것이다.
두 분의 명복을 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