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단 제목부터 죽이지 않습니까? [건축학개론]. 최근 몇 년 동안 나온 한국 연애영화들 중 이처럼 자기 개성 확실하게 보여주고, 정확하고, 기억하기 쉽고, 인상적인 제목을 가진 작품이 있었던가요. 말이 나왔으니 하는 말인데, '사랑' 어쩌구로 시작되는 긴 제목들을 제대로 기억하거나 구별하는 사람들이 몇이나 되겠어요. 제목 구실 못하는 글자 다발들일 뿐.
비유적인 제목이 아닙니다. 이 영화의 두 주인공인 음대생 서연과 건축과 학생 승민은 모두 건축학개론을 들어요. 이들의 이야기는 정확히 건축학개론 첫 강의에서 시작되어 종강으로 끝납니다. 그리고 15년 뒤, 시니컬한 30대가 되어 건축주와 건축가로 다시 만난 이들은 제주도에 집을 짓습니다. 이 두 이야기는 15년을 오가면서 느긋하게 병행진행됩니다.
이야기 재료는 평범하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대학생들의 첫사랑 이야기이고, 첫사랑을 다시 만난 30대 어른들의 이야기예요. 이런 이야기들에 나올 법한 거의 모든 단계들이 총동원됩니다. 이건 예고편만 봐도 알 수 있는 사실이죠.
영화의 차별점은 이 익숙한 재료들이 모두 건축이라는 필터를 통해 제시된다는 것입니다. 단순한 집짓는 일만이 아니라, 그 과정 중 숙고해야 하는 지리적 편의성도 중요하고 공간의 개인적, 문화적 의미도 중요합니다. 그리고 대학생 서연과 승민의 모든 이야기는 건축학개론 강의의 친절한 가이드라인을 통해 전개됩니다. 그리고 그들의 교육 과정은 15년 뒤, 승민을 통해 서연의 집이라는 구체적인 결과물로 완성됩니다. 이 과정을 통해, 영화는 거의 고루하기까지 한 이야기를 하면서도 새로운 의미를 얻죠. 이야기를 묶어주는 통일감은 당연하고.
건축의 비유를 계속 연장하는 것은 감독이 던진 미끼를 순진하게 무는 것일 수도 있는데, 영화의 구성 역시 건축물을 닮았습니다. 과거와 현재를 오가며 만들어지는 이 두 사람의 이야기는 물처럼 흐르는 대신 차곡차곡 쌓여 있죠. 이건 영화의 매력이고 개성이지만 늘 장점은 아닙니다. 감독의 계산 하에 구분되고 잘려나간 시공간 연속체들 안에 갇혀 주인공들의 심리묘사가 종종 막히거나 끊기는 때가 있죠. 특히 90년대 이야기의 결말은 그렇습니다. 90년대 중반은 그렇게까지 옛날이 아니에요. '그 때는 그랬지'라는 말을 들을 정도로 사람들이 다르지는 않았습니다. 이건 순전히 계획 하에 결말을 맺기 위한 인위적인 선택입니다. 계획이 늘 조금씩 사람들을 앞서는 겁니다.
보통 이런 이야기에서, 어린 시절의 이야기는 성인 이야기의 떡밥입니다. 하지만 [건축학개론]에서는 성인 시절의 이야기가 대학생 시절 이야기에 종속되어 있습니다. 당시의 이야기가 스스로 움직이는 주체이고 15년 뒤의 이야기는 열린 채 끝났던 이야기를 봉합하는 기능적 이유로 존재하는 거죠. 고맙게도 이 봉합과정은 멜로드라마의 불필요한 과장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영화는 딱 끝나야 할 때 끝나요.
영화의 관심은 엄태웅/한가인 커플보다 이제훈/수지 커플에 쏠립니다. 특히 실질적인 주인공이라고 할 수 있는 이제훈은 연기할 거리가 많아요. 하지만 작품의 전체적인 의미를 고려해보면 연기 밸런스는 좋은 편입니다. 거의 한국 남자애들이 간직한 첫사랑의 이상처럼 보이는 수지나, 건들건들 냉소적인 엄태웅이나, 딱 부러지고 예민한 한가인이나, 모두 자기 역할이 있죠. 대학생 시절과 30대 시절 배우들의 외모가 전혀 연결되지 않는 것도 큰 문제가 되지는 않는 거 같습니다. 반대로 새로 생각할 거리를 제공해주죠. 15년이면 충분히 사람 하나가 통째로 바뀔 수 있는 기간이니까.
과거의 이야기가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는 영화이니, 90년대의 회고는 영화의 중요한 부분을 차지합니다. 물론 저는 여전히 꿋꿋하게 "90년대가 무슨 옛날이야! 인터넷도 됐는데!"라고 주장하렵니다. 하지만 과거의 모든 특정 시기는 이런 말을 들었겠죠. 특히 시대를 촘촘하게 구분해줄 수 있는 문화적 지표들이 많은 요새엔 과거의 회상은 더 세밀해지는 것 같습니다. 이런 것들로 인해 우리가 과거를 그리는 방식 또한 바뀌어가는 거겠죠. (12/03/14)
★★★☆
기타등등
1. 영화의 구성과 회고적 분위기 때문에 은근슬쩍 넘어갈 수도 있는데, 솔직히 승민은 진짜 나쁜 놈입니다. 멍청하고 나쁜 건지, 그냥 나쁜 건지는 잘 모르겠어요. 전 후자 같습니다. 승민을 타자화하면 전혀 다른 이야기가 나올 수 있어요.
2. 음악이 조금 더 좋았다면 좋았을 텐데. 영화의 구성과 성격을 생각해보면 단순히 말랑말랑 로맨스의 분위기를 내는 것으론 부족해요. 그리고 [기억의 습작]은 기능적으로 조금 걸리는 구석이 있습니다. 화면이 무엇이 깔리건, 노래가 나오는 순간 그냥 주인공이 되어버리거든요. 90년대를 지나온 아이들의 감수성을 자극하는 좋은 곡인 건 여전히 사실이지만요.
3. 관객들은 승민의 재수생 친구로 나오는 조정석을 좋아할 겁니다.
4. [말하는 건축가]와 동시상영하면 근사할 텐데 말입니다.
출처
http://djuna.cine21.com/xe/37129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