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의원은 "제가 다른 무엇이 아니라 내란음모 혐의로 이 자리에 서 있는 것 자체가 무척 낯설고 참으로 어울리지 않는 풍경이라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면서 "이 사건 피고인으로서 이 부조리한 풍경이 바로 잡히고 이 사건으로 인해 진보당에 새겨진 주홍글씨가 벗겨지길 간절히 희망한다"고 말했다.
이어 이 의원은 대학 시절 학생운동을 시작할 때부터 국회의원 출마까지의 과정을 소상히 밝히며 내란음모와는 거리가 멀다는 것을 강조했다.
그는 "80년대 초 대학 입학 이후 운동권으로 살아왔다. 국회에 처음 들어왔을 때도 스스로 운동권 마음으로 살겠다고 다짐했다"면서 "제가 운동권이라고 표현한 것은 20대 홍안의 청년이 갖는 깨끗함, 첫 마음처럼 그 어떤 기득권에도 물들지 않고 또 어떤 도그마에도 갇히지 않겠다는 다짐이었다"고 말했다. 이어 "20대 청년기 정점에서 87년 6월 항쟁과 7, 8, 9월 노동자 대투쟁을 경험했다"며 "억압이 있는 곳에 민중의 저항이 있으며 하나로 뭉친 민중의 힘 앞에는 이 세상 막을 자 없다는 체험적 각성은 평생의 신념으로 각인됐다"고 소회했다.
이 의원은 "저의 30대는 20대와 사뭇 달랐다. 90년대는 동구가 몰락하고 북의 경제적 어려움이 알려지면서 운동권에는 큰 변화의 바람이 불었다"며 "많은 사람들이 더이상 진보운동에 희망이 없다고 좌절했다"고 회고했다. 이어 그는 "그러나 저는 애초부터 소련이나 북을 보고 운동을 한 것이 아니었다"면서 "내가 서있는 이 땅 우리 민중 현실에서 진보는 출발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라고 밝혔다.
그러면서 "오히려 저는 1997년 정권교체에 큰 감명을 받았다. 선거라는 평화적이고 합법적인 방법으로도 사회적 진보에 큰 발을 내딛을 수 있다고 봤고, 진보정당으로 사회변화 큰 기여를 할 수 있다고 생각해 진보정당 건설을 일관되게 지지해왔다"고 강조했다.
이어 이 의원은 정치전략컨설팅 회사인 CNP를 창업하게 된 과정을 밝혔다. 그는 "2003년 출옥 이후 진보정당을 지원할 수 있는 가장 필요한 일이 무엇인가 찾았다. 그래서 설립한 게 여론조사 기관이었고, 그것을 발전시켜 선거전략을 기획하고 홍보하는 회사를 만들었다"며 "솔직히 그때까지는 진보운동은 과거에 해왔던 집회와 시위에는 능하지만 선거는 이른바 '부르주아 민주주의'라면서 아예 관심을 두지 않은 경우가 많았다"고 설명했다.
그는 "그러다 보니 주먹구구로 그냥 '선전'의 장으로만 보는 시각도 있었다. 반면 기성의 정치권은 여전히 돈의 힘으로 선거를 치르고 있었다"면서 "진보진영이 선거를 기성 정치권과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돈으로 표를 모으는 정치가 아니라 아래로부터 민중의 마음을 모아가는 정치적 실천이 절실하다는 결론을 스스로 찾았다"고 밝혔다.
이어 "민심을 과학적으로 읽고 유권자가 필요로 하는 정책 개발로 돈 선거와 지역주의를 극복할 수 있을 거라 확신했다"며 "진보진영에서 과학적인 선거를 처음 만들어내고 능력있고 참신한 정치인들이 선거에서 당선되는 결과를 냈다는 좋은 평가를 들었다"고 전했다.
이 의원은 이후 "대중적 진보정당 노선을 보다 직접적으로 책임져야 한다고 생각해 작년 총선에 비례대표 후보로 출마했다"며 국회의원 당선된 뒤 일어난 일련의 사태에 대한 입장을 밝혔다.
그는 총선 당시 "국가보안법 위반 전력이 당에 누가 될까 걱정도 했다. 하지만 우리 사회가 그 정도도 안 되는 후진적 사회라고 보지 않았다"며 "그래서 용기를 냈다. 그런데 선거 운동이 시작되기도 전에 보수언론의 표적이 됐다"고 지적했다.
이 의원은 지난 총선 당시 비례대표 경선에서의 부정시비에 대해 "검찰이 당원명부는 물론 모든 투표결과를 열어보며 대대적적인 수사를 벌이고 경선부정의 몸통처럼 여론을 몰고갔지만 저를 기소도 못했다"며 "종북 색깔 공세와 경선부정이란 멍에와 함께 시작한 국회의원이지만 저는 진보정당의 의정활동에 최선을 다 했다"고 밝혔다.
이 의원은 그동안 국회 의정 활동을 통해 김종훈 미래창조과학부 후보자가 미국 CIA와 연계됐다는 점을 폭로한 것과 종합편성채널에 대한 문제, 방위비분담 문제 등을 제기해온 것을 거론하며 "정치현실을 바꾸고 싶었다"고 밝혔다.
그러면서 이 의원은 재판부를 향해 "지금까지 저에 대한 있는 그대로, 편견없이 바라봐달라"며 "언론에 나온 이미지처럼 어떤 주의에 매몰되어 외눈박이로 살아오지 않았다"고 호소했다.
그는 특히 "북한 공작원을 만난 적도 없고, 지령을 받은 적도 없다"며 "검사 기소조차 이걸 적시하지 않고 있다. 그럼에도 제 행동과 말이 모두 북한의 지령을 받은 것처럼 되고 있다"고 지적했다.
이 의원은 검찰이 내란음모 등 혐의의 근거로 제시한 '5월 12일 모임'에 대해서도 "당시 경기도당 임원들의 요청을 받아 강연을 했다. 당시 저는 이 땅에 드리워진 전쟁의 그림자를 강하게 의식하고 있었다. 제가 북이 남침을 할 경우에 이에 호응해서 그 무슨 폭동을 일으키려 했다는 게 저에게 제기된 공소요지로 알고 있다. 그러나 이는 전제부터 틀렸다"며 "북한이 남침하는 상황을 예상한 게 아니라 미국이 북을 공격하는 상황을 우려한 것"이라고 반박했다.
그는 "탈냉전 이후에 일어난 전쟁에서 가장 두드러진 특징은 모든 전쟁이 미국이 다른 나라를 침공한 것"이라며 "북과 미국의 군사적 대결 이어지고 있지만 북이 미국을 침공하여 항복을 받아내는 일은 누구도 상상하고 있지 않다 . 만일 이 땅에서 전쟁이 일어난다면 미국이 북을 침공하는 일이 될 가능성이 높다"고 진단했다.
이어 "제가 우려하는 것은 그런 상황에서 우리 사회가 과연 어떻게 할 것인가라는 점"이라며 "위기는 전환의 시기의 특징이다. 낡은 시스템이 더 이상 유지될 수 없을 때 위기가 찾아오기 때문이다. 근근이 평화를 지탱해왔던 정전체제가 위기를 맞고 있다면 이것은 역으로 과거와는 다른 새로운 체제, 한반도의 영구적 평화체제로 갈 수 있는 하나의 기회로 될 수 있다는 게 저의 판단이었다"고 설명했다.
또한 "지난 4월 25일 대정부질의 통해 밝힌 전쟁위기 해소와 항구적 평화를 위해 '남북미중 4자회담'을 하자는 제안도 이 같은 맥락"이라며 "대전환기에 진보정당이 무엇을 해야할지 깊이 있게 토론해고 준비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것이 강연의 진실이고 배경"이라고 강조했다.
이 의원은 마지막으로 "현 정부의 역사 후퇴에 대한 우려가 들려온다. 이번 사건을 포함해 많은 점에서 우려의 근거가 있다. 하지만 저는 역사는 후퇴하지 않는다는 믿음을 갖고 있다. 비록 잠시 그렇게 보이더라도, 한번 민주주의를 경험한 민중이 있는 한 독재시대로 돌아가는 것은 불가능하다"며 "역사는 정의의 편이고 정의는 민중에 의하여 실현되기 때문"이라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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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의원은 검찰이 내란음모 등 혐의의 근거로 제시한 '5월 12일 모임'에 대해서도 "당시 경기도당 임원들의 요청을 받아 강연을 했다. 당시 저는 이 땅에 드리워진 전쟁의 그림자를 강하게 의식하고 있었다. 제가 북이 남침을 할 경우에 이에 호응해서 그 무슨 폭동을 일으키려 했다는 게 저에게 제기된 공소요지로 알고 있다. 그러나 이는 전제부터 틀렸다"며 "북한이 남침하는 상황을 예상한 게 아니라 미국이 북을 공격하는 상황을 우려한 것"이라고 반박했다.
그는 "탈냉전 이후에 일어난 전쟁에서 가장 두드러진 특징은 모든 전쟁이 미국이 다른 나라를 침공한 것"이라며 "북과 미국의 군사적 대결 이어지고 있지만 북이 미국을 침공하여 항복을 받아내는 일은 누구도 상상하고 있지 않다 . 만일 이 땅에서 전쟁이 일어난다면 미국이 북을 침공하는 일이 될 가능성이 높다"고 진단했다.
<==내란 음모죄에 관련해선 이 변론 내용을 곰곰히 생각해 봐야 할듯 싶습니다...
항상 그렇지만 인혁당 사건처럼 메카시즘 광기에 희생된 사람들이 있는 역사를 가진 나라에선 양쪽의 말을 다 들어 봐야 한다고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