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명 vs 소신? 사라진 본질
119 구급대가 철수네 집에 도착했습니다. 거실에 들어선 구급대장이 환자를 찾습니다. 울고 있던 어머니는 작은 방을 가리킵니다. "상태가 심각해요. 얼른 좀 옮겨주세요" 구급대원 서너 명도 따라 들어왔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구급대장이 대원들을 불러 세웁니다. 그리곤 심각한 표정으로 철수 어머니 손가락을 쳐다봅니다. 손끝에 갈색의 뭔가가 묻어있습니다. 대장이 묻습니다. "저게 똥이야 초콜릿이야?"
철 수 어머니는 집에서 요리도 하고 청소도 합니다. 손에 똥이 묻었다면 음식에도 빨래에도 병균이 옮을 수 있습니다. 가족들이 병에 걸릴 수도 있으니 자못 심각한 일입니다. 구급대장은 손가락 이물질의 실체를 확인하기로 합니다. 대원 중 일부에겐 음식과 빨래를 확인시켰습니다. 그러자 이 광경을 지켜보던 할머니가 한 마디 합니다. "염병들 하고 있네. 환자가 죽어 가는데…."
며 칠 전 서울중앙지검 국정감사가 있었습니다. 국정원 사건을 두고 윤석열 여주지청장과 조영곤 서울중앙지검장이 법사위 국회의원들에게 추궁을 당했지요. 감사가 아니라 거의 취조 수준이었습니다. 서로 거짓말을 하고 있다고 핏대를 높이더니, 한 명은 눈물도 쏟아냈습니다. 그걸 보고 있던 검사도, 기자도, 국민들도 허탈함을 넘어 참담함을 느꼈습니다.
윤석열 지청장의 행동이 항명이냐를 두고 격론이 벌어졌습니다. 항명이라 평가하는 쪽은 정치적으로 민감한 사건을 수사하면서 왜 절차를 어겼느냐며 지적했고, 소신이라 보는 쪽은 상관의 위법한 지시를 거스르면서까지 진실을 밝히려 한 용단이라고 추켜세웠습니다. 특수통과 공안통의 대결로 분석하는가 하면, 더러는 검찰의 항명史를 정리했습니다. '위기의 검찰'에 해법을 제시하는 사설도 줄을 이었습니다. 뭐. 틀린 말들은 아니었습니다. 본질이 아니라는 게 문제지요.
윤 지청장 행동이 항명이냐 용단이냐를 따지는 것은, 철수 어머니 손에 묻은 게 똥이냐 초콜릿이냐를 논하는 것과 같습니다. 물론 윤 지청장 행동에 대한 시비를 가릴 필요는 있습니다. 하지만 구급대에 가장 우선인 것이 환자 이송이듯, 언론이 우선해 봐야하는 것은 사안의 본질입니다. 모든 일에는 중요도와 우선순위라는 게 있는 법입니다.
검찰은 범죄를 수사해 재판에 넘기는 기관입니다. 범죄 혐의를 발견하면, 검찰은 무조건 수사를 해서 결론을 내려야 합니다. 그게 검찰의 본업입니다. 언론은 검찰이 <죄 지은 놈에게 죄가 없다고 하거나>, <죄 없는 사람에게 죄가 있다고 덮어씌우는> 지를 가장 우선해서 살펴야 합니다. 국정원이 선거법을 어겼는데 아니라고 하거나, 선거법을 어기지 않았는데 위반했다 하는지를 봐야 한다는 말입니다.
우리는 <검찰의 내분>이 아니라 <국정원 사건의 실체>에 주목해야 합니다. 국정원이 정말 선거에 개입하려고 조직적으로 움직였는지, 원세훈 전 국정원장이 이를 지시하고 지휘했는지, 이 사건을 수사하던 경찰은 이를 은폐했었는지, 김용판 전 서울경찰청장이 이를 주도했는지 등이 사안의 본질입니다. 검찰 조직의 위상이 무너졌다고 걱정해 주는 건, 그 뒤에 해도 되는 일입니다.
선거 개입? 그게 뭐? 검 찰은 국정원이 조직적으로 선거에 개입했다고 결론 내렸습니다. 물론 국정원은 '그런 적 없다'고 맞서고 있습니다만 지난 6월 검찰은 수개월의 수사 끝에 국정원이 선거법을 위반했다고 판단했습니다. 그리고 사건의 실체를 밝히기 위한 재판이 진행 중입니다. 그 와중에 수사팀이 증거를 추가로 찾아냈습니다. 국정원의 선거법 위반 혐의를 보다 확실히 입증할 증거들입니다. 수사팀은 증거가 워낙 중요해서 빨리 확보하지 않으면 국정원 직원들이 증거를 없앨 거라고 봤습니다. 그래서 국정원 직원들을 체포하고, 증거물을 압수하자고 나섰지요. 윤 지청장과 조 지검장의 싸움은 이 지점에서 발생했습니다.
선거법 위반이 뭐 그리 대단한 일이기에, 나라를 이리 시끄럽게 하냐고 물으실지 모르겠습니다. 국정원 직원들이 댓글 좀 달고, 트위터에 글 좀 썼다고 그게 선거에 뭐 그리 대단한 영향을 미쳤냐고 할 수도 있습니다. 또, 아무리 그게 잘못이라고 해도 검사가 자기 상관을 국민들 앞에서 저리 볼썽사납게 들이 받아야 하느냐고 할 수도 있습니다. 이런 질문에 답하기 위해서는, 우선 선거가 얼마나 중요한가부터 살펴야 합니다.
대한민국은 민주주의 국가입니다. 우리가 표방하는 민주주의는 귀족제나 군주제, 독재체제와 반대되는 개념입니다. 민주주의는 우리와 북한을 구분하는 가장 핵심적인 요소입니다. 민주주의에는 다음의 6가지 조건들이 반드시 있어야 합니다.
1) 국민에게 선거권이 있고
2) 2개 이상 정당이 후보를 내고
3) 민권(언론,출판,결사)이 있고, 법에 의해서만 체포·구금하고
4) 정부 시책이 국민의 복리증진을 위하고
5) 책임 있는 비판을 보장하고, 국민들이 독립된 사법권의 보호를 받고
6) 정권교체가 평화적인 방법으로 이뤄진다.
선 거제도는 민주주의의 뼈대로, 선거제가 망가지면 민주주의 자체가 붕괴될 수 있습니다. 때문에 민주주의 국가들은 선거 훼손 사범을 아주 엄하게 처벌하고 있습니다. 범행이 선거에 실제 영향을 미쳤는지 아닌지는 따지지도 않습니다. 그럴 <의도로 범행을 했느냐>면 족합니다. 그럴 의도로 범행은 했는데 영향을 별로 못 미쳤다면, 처벌 형량이 조금 줄어들 수 있을 뿐입니다.
손가락 그만 보고 환자부터 옮겨라 국 가조직인 국정원이 선거에 영향을 미치려고 움직였다면, 그 자체로 대단히 중대한 범죄입니다. 영향이 있었느냐 없었느냐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민주주의를 고수할 요량이라면, 국가기관인 국정원이 선거에 개입한 경위를 분명해 따져야 하고, 책임자를 처벌하고 재발을 방지해야 합니다. 검찰 수사가 시작된 이상, 실체와 진위를 밝혀야 할 책임은 오롯이 검찰에 있습니다.
따라서 언론의 관심 역시도, 수사가 제대로 되는지에 있어야 합니다. 여당의 입장이나 야당의 입장, 검찰의 집안 사정 등은 나중 일입니다. 언론 뿐 아니라 검찰과 법무부, 청와대와 국회 모두 이번 사건의 <실체>를 제대로 밝히는 데 총력을 기울여야 합니다. 대한민국 국민에게 가장 중요한 민주주의가 무너질 수도 있는 문제인데, 그래야 정상 아닌가요? 우리가 독재국가인 북한을 따를 생각이 아니라면 말이죠.
민주주의의 근간인 선거 제도가 흔들린다면, 그래서 우리가 그토록 자랑스럽게 여기는 대한민국이 위태로워진다면, 피해를 보는 사람은 누구입니까. 득을 보는 사람은 또 누구입니까. 검찰이 이미 수사에 착수한 사건의 실체를 제대로 밝히지 못한다면, 그에 따른 혼란과 부작용은 불 보듯 뻔 한 일입니다. 그리 된다면, 그에 대한 책임은 누구에게 물어야 하나요.
모두들 직시하십시다. 정말로 중요한 건, 어머니 손가락에 묻은 이물질이 뭔지를 확인하는 일이 아닙니다. 상태가 위중해 방에서 헐떡이고 있는 환자를 살리는 일입니다. 손가락을 잡을 일이 아니라 환자를 옮겨야 합니다.
김요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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