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집 명절이 다른 집과 다르다고 생각해본 적은 중학교에 들어갔을 때 쯤이었던 것 같다.
친구: 명절 힘들어서 싫어. 친척들도 많이 오고.
나: 그래도 용돈 좀 벌지 않아?
친구: 야, 용돈 보다 전부치는게 더 힘들어.
나: 그걸 왜 니가 부치는데?
우리 집은 남자들이 부치는데.
우리 큰오빠로 말할 것 같으면 제일 잘하는 음식 빈대떡.
우리 작은오빠로 말할 것 같으면 제일 잘하는 음식 각종 부침음식.
손목 스냅을 중요하게 생각하고 후라이팬을 자신의 신체 일부처럼 부드럽게 다루며
비오는 날은 부르스타를 가지고 나와 거실에서 전을 부쳐주곤 한다.
일이 어떻게 된거냐면 집에 식구가 많다보니,
할머니나 고모들이 아빠 집에서 설이나 추석을 보내다보니 엄마가 혼자 준비하기는 버거웠고
그래서 머리가 제법 컸던 당시 중학생 오빠 둘에게 도움! 을 요청했던 것이
습관처럼, 전통처럼 그렇게 유지되고 있다.
그래서 우리 집 남자들은 명절 증후군을 앓는다.
이번 추석 즈음 운전을 맡은 막내는 길이 막히면 어쩌지? 라는 걱정을 했고 (멀지 않거든?)
오빠들은 엄마랑 통화를 하며 이번에 뭐 부칠건데? 뭐 할건데? 라고 질문을 쏟아냈다.
나: 나 그 깻잎 전 좋더라.
작은오빠: 이게 뚫린 입이라고 잘도 말한다.
집에 도착해서 옷 갈아입고, 손닦고 나면 오빠들은 아빠의 지휘 아래 전을 부치기 시작한다.
부침개 머신처럼 온 가족이 먹고 싸갈만큼의 전을 부치는데, 그 모습을 보고 막내가 말한다.
막내: 부침개 머신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작은오빠: 험한 소리 하기 전에 가라. 딴데 가서 놀아.
막내: 막무룩.
전을 부치고 나면 오빠들은 온갖 기름에 찌든 몸을 이끌고 누워 핸드폰만 본다.
그리고 상에 올라온 전에는 손도 안댄다.
나: 오빠 이거 동그랑땡 먹어봐. 맛있어.
큰오빠: 하루종일 기름 냄새 맡아서 쳐다보고 싶지도 않아. 토할 거 같아.
몇 해 전, 작은오빠는 개미지옥같은 부침개지옥에서 벗어나기 위해,
추석 전에 친구들과 약속을 잡아 나간적이 있었는데, 대신 막내가 부침개지옥에 소환이 됐다.
그리고 몇 시간 지나지 않아 작은 오빠가 집에 돌아와서 부침개를 부치고 있는 게 아닌가?
나: 어? 이번엔 안 한다며?
작은오빠: 저 식빵새끼가 삼초에 한 번씩 문자 보내는데 내가 진짜 돌아 버릴 거 같아서 왔다.
나: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작은오빠: 기분 안좋으니까 웃지마라.
그렇게 장정들이 부침개를 실컷 부치고 남은 계란을 모아 계란말이를 부치면
부침개 지옥이 문을 닫는다.
그 계란말이는 엄마랑 내가 먹는데, 뜨거울 때 오빠들을 보면서 먹으면 그렇게 맛이 있다.
엄마는 그 모습을 흐뭇하게 보며 말씀하셨다.
엄마: 나중에 장가가면 사랑 받을 거야. 짜식들, 누구 새낀지 엄청 잘 하네.
아빠: 진짜 남자는 각종 부침개를 부칠 줄 알아야 해.
이번 명절에도 아빠의 지시에 따라 각자 맡은 바 소임을 다 한 오빠와 막내는 상에 올라온 동태전에 손도 대질 않았다.
갑자기 그런 생각이 들었다. 쟤네 손은 닦았나...
엄마랑 같이 설거지를 끝내고, 어김없이 다들 둘러 앉아 과일을 깎아먹는 시간이 제일 좋다.
제일 예쁘게 깎인 부분을 먹으려고 서로 경쟁할 때가 좋다.
과일을 잘깎는 막내가 제일 맛있는 부분이라며 엄마나 내게 먼저 줄때가 좋다.
작은오빠가 나를 보고 보름달이 떴다며 소원을 빌었다. 망했으면 좋겠다.
우리 집에는 부침개를 잘 부치는 남자 셋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