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년 이맘때쯤 아버지가 간암 말기 선고를 받았다고 글을 쓰고 베오베 간적 있었는데
그로부터 약 일년이 지나 세상을 떠나셨습니다.
정말 조심스럽게 말하지만 제 솔직한 심정은 후회없이 잘 보내드렸습니다.
우선 마음의 준비를 하고 있었고 임종까지 곁을 지켜드렸습니다.
다만 환갑도 못 지나서 아들 장가가는 것도 못보고 떠나보낸 아쉬움이 너무나 크네요.
아... 먼저
전 필력이 좋지 않습니다.
하고 싶은 말이 많아서 두서없이 쓸게요.
1.
흔히들 간은 침묵의 장기라고 하지요.
간 질환은 말그대로 상태가 막장까지 가야 겨우 몸에 증세가 보일 정도로 겉으로는 표시가 안 납니다.
처음 아버지가 간암 선고를 받으셨을때도 그 주까지 어머니랑 테니스를 치실 정도로 건강하셨습니다.
그렇게 멀쩡하신 분이 난데없이 간암말기 선고를 받았으니 그 당시 쇼크는 정말 컸습니다.
그 진단의 6개월전만 하여도 간경화가 있었을뿐 암은 없었는데 말이죠.
당시 의사 선생님이 말씀하시길 기대수명이 4개월이라고 하더군요.
치료를 안 받으면 2개월 치료가 잘되면 1년 이상.
지금 생각해보면 그 당시의 슬픔이 지금보다 훨씬 컸던거 같아요.
못 해드린게 너무나도 많은데 얼마 못 계신다는게 너무 억울하더군요.
2.
아버지가 생전에 바둑이랑 테니스를 좋아하세요.
그래서 중딩때 아버지가 바둑학원 다니게 한적 있었는데 1~2주 다니다가 귀찮아서 포기했고
테니스는 배울 생각 없냐고 자주 권하셨는데 그것도 귀찮아서 안했죠.
아버지가 얼마 못 산다는 얘기를 들었을때 처음 들었던 생각이 테니스였습니다.
내가 진작에 좀 배웠더라면 아버지랑 테니스라도 칠 수 있었을텐데
다시는 아버지랑 그럴 기회가 없을거란 생각이 너무 후회가 되더군요.
평소에는 전혀 생각도 안하고 있던것들인데 잘 생각해보면 제 불효의 흔적들이 많더군요.
3.
암 투병하시는 분들 참고하실만한 것. 혹은 미리 알아두면 좋을 것들
암투병은 보통 크게 2가지 테크로 나뉘어진다고 볼 수 있습니다.
정식의학에 의존하는 방법과 민간의학... 대충 뭔지 감 잡히시죠?
암튼 혹시나 읽으시는 분들 주변에 간암 투병하시는 분이 계실까봐
조금이라도 보탬이 되고자 어쩌다보니 치료내용을 길게 쓰게 되었습니다.
3-1.
병원가서 치료받는 정식의학에 의존하는 경우 진행 상태에 따라서 여러가지 방법이 있습니다.
대충 생각나는게 수술을 받거나 방사선치료, 항암제 사용 등등..
우리 아버지 같은 경우 암세포가 이미 혈관에 자리잡고 있어서 수술이 불가능한 상태였답니다.
그래서 방사선치료를 받고 항암제를 복용하였죠.
일단 방사선치료는 환자가 많이 받을 수 없습니다. 저희 아버지도 딱 한달정도 받았던거 같네요.
그래서 항암제에 의존을 많이 하게 되었습니다.
3-2. 골때리는건 실제 암에 효과가 있는 항암제가 개발된게 몇 종류가 많이 없다는 겁니다.
약이란게 원래 처음에는 효과가 있더라도 계속 복용하다보면 내성이 생겨서 효과가 없어져요.
간암에 그나마 검증된 항암제는 넥사바란 제품이 유일하죠.
그 넥사바란 제품도 들을 확률은 40%밖에 안된다고 하던데
그나마 아버지가 1년가까이 사신것도 운좋게 넥사바 약이 효과가 있었기 때문이죠.
처음 약을 복용하고 한두달 지나니 암세포가 꽤나 크게 줄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그것도 몇달이 지나니깐 내성이 생기더군요.
3-3. 항암제 개발이 어려운 이유는 암세포가 신체의 일부가 되면서 잠식해나가는데
암세포를 파괴하는 약을 만들자니 신체에도 타격이 가해져 부작용이 많이 생기게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항암제로 상용이 되려면 부작용이 적으면서 암세포만 효율적으로 파괴하는 약을 개발해야하는 것이지요..
그래도 항암제의 부작용을 완벽이 없애기란 거의 불가능합니다.
넥사바도 꽤나 좋은 제품임에도 불구하고 아버지 머리가 다 빠지고 발의 껍질이 벗겨지고
손이 갈라지고 힘이 없어지고 등등등 여러 부작용으로 고생을 하셨습니다.
3-4. 어느 시점(대충 8월쯤?) 부턴가 항암제 부작용으로 쇠약해진 아버지가
다시 기운을 차리시고 머리가 다시 나기 시작합니다.
어머니랑 누나는 좋아하셨죠. 아버지가 다시 건강해진다고.
저는 오히려 좀 불길하더군요.
분명 항암제 부작용으로 고생을 하셔야하는게 정상인데 부작용이 점차 사라지고 있다니.
아니나 다를까 병원가서 검사해보니 암세포가 좀 더 커졌다고 하더군요.
어쩔 수 없이 약을 바꿔야하는 상황이 왔는데 아까 말했다시피 검증된 약이 없네요..
3-5. 사용할 약이 없을때 많은 환자들이 선택하는 방법 중 하나는 신약 임상 프로그램에 참여하는 것입니다.
간단히 말해서 개발중인 신약을 테스트하기 위한 샘플집단에 속하게 되는 것입니다.
단, 여기서 중요한 것은 임상 프로그램에 참여하더라도 본인이 개발중인 신약을 받으리란 보장은 없습니다.
무슨 말이냐면 약을 검증하기 위해서는 동일한 조건을 가진 대조군(가짜약)의 진행상황과 비교하여
이 약이 진짜 효과가 있는지 판별하게 됩니다.
즉 환자는 일정확률(아버지가 참여한 프로그램의 경우 75%)로만 신약을 받고 나머지는 가짜약을 받게 됩니다.
좀 비인간적이기도 하죠. 선택의 여지가 없는 환자가 신약개발을 위한 샘플로 취급된다는게..
한편으로는 신약개발을 위해선 다른 방도가 없다는게 이해가 되기도 합니다.
3-6. 아무튼 아버지는 신약 임상 프로그램에 참여하셨고 운이 좋게도 효과가 있는 신약을 받게 됩니다.
여기서 효과가 있다는 말은 암세포가 실제로 많이 줄었다는 것을 말합니다.
다만 부작용이 너무 심해서 오래 복용은 못하셨네요.
넥사바 약이랑은 비교가 안될정도로 부작용이 심해서 계속 토하고 설사하고 엄청 고생하셨습니다.
한달 정도 복용한 후 의사는 약이 그래도 효과가 있으니 잠깐 쉬고 양을 좀 줄인 후 복용하자고 처방합니다.
하지만 양을 줄여도 부작용은 마찬가지 더군요. 또 한달후에 잠깐 쉬고 양을 좀 줄이자고 합니다.
3-7. 그렇게 올해 설날까지 약 복용을 쉬게 되었는데 갑자기 상황이 변했습니다.
설날 지난 후 아버지가 몸이 이상하다고 느끼고는 새벽에 서울에 있는 누나집으로 출발합니다.
(집은 대구, 누나집은 서울, 병원은 일산 국립암센터)
잠을 자려는데 갑자기 뭔가가 계속 불편하다고 잠을 통 못 주무셨다네요.
그래서 막상 새벽에 올라가서 병원을 가봤지만... 병원에서는 바로 안 받아줬습니다.
3-8. 큰 병원을 선택했을 때의 문제점이랄까요.
국립암센터면 암에 관해선 국내에서 제일 우수한 선생님들만 계시고 치료도 최고라고 보면 됩니다.
한편 큰병원에서는 기다리고 있는 환자들이 너무 많은 관계로 어지간한 일로는 일정변경이 힘듭니다.
아버지의 경우도 약 일주일 뒤에 예약이 잡혀있는 상태였는데 아버지가 상태이상을 얘기했음에도 불구하고
병원측에서는 예약된 시간까지 기다리라면서 진통제만 제공하고 다시 돌려보냈습니다.
3-9. 그때부터 하루하루 상태가 더 나빠지시더군요.
한번도 없던 황달증세가 나타나고 배가 불러왔습니다. 배에 복수가 찬다는 거죠.
기다리다 기다리다 안되겠다 싶어서 병원에 다시 얘기했더니
이번에는 정 급하다면 응급실을 통해서 입원을 하라고 합니다ㅡㅡ;
3-10.
그렇게 입원을 하시고 다시 검사를 받아보니 항암제를 쉬는 사이에 암세포가 커져서 담즙을 막아버렸다네요.
황달증세도 담즙이 안빠져서 나타나는거구요. 그것때문에 복막염도 생기고 복수가 차고 배가 더부륵해지고..
하지만 그것보다 중요한 사실은 암세포가 너무 많이 커졌다는거...
그때 의사 선생님이 이제는 정말 아버지 삶이 얼마 안 남았다고 하시더군요.
그게 딱 돌아가시기 1주일 전 지지난 화요일이었습니다.
3-11. 아버지가 고통스러워하시니 황달이랑 복막염이라도 치료를 하려고 했는데
그 마저도 암이 너무 커져버려서 손쓰기 어려운 상황이라네요.
결국 수요일쯤 되니 암센터에서는 더 이상 할 수 있는게 없다고 GG를 선언하더군요.
그리고는 자칫하면 현 병원에서 세상을 떠나실지도 모르니 고향에 호스피스 병원으로 옮기라고 합니다.
3-12. 수속처리를 마치고 금요일에 고향 호스피스 병원으로 옮겼습니다.
사설 응급차량을 불러서 모셔다드렸습니다.
그리고는 그 다음 월요일 아침에 숨을 거두셨습니다.
3-13. 치료방법을 선택할 때 민간요법도 완전 배제했던건 아닙니다.
실제로 조사하다보면 완치되었다는 사례도 제법 많았고
주변 분들에게 묻다보니 제 아는 사람의 아는 사람이
식이요법으로 간암말기를 극복하고 몇년째 살고 있다는 얘기도 듣고...
사실 처음 몇개월 선고를 받았을때 그런 얘기에 솔깃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적으로 병원치료에 의존할 수 밖에 없었던 이유는
온갖 쓰레기 정보가 넘쳐나기 때문이죠........
책을 보던 인터넷에서 무슨 사례를 보던간 결국 읽다보면 무슨 식품을 먹어야하는데 어디에서 얼마에 팔고있더라..
결국 약장수들이 자기들 식품 팔아먹으려고 만든 거짓정보 투성이란거죠.
정말 안타까운게 민간요법이 100프로 틀렸다고 볼 수 없거든요.
제 지인의 지인이라는 분의 사례만 들어도 그렇고...
다만 믿을만한 객관적인 사례들을 모아서 볼수가 없는게 아쉬울 뿐이고
그로인해서 환자로서 선택할 수 있는 가능성 중 하나를 포기해야한다는게 좀 안타깝네요.
4. 처음 암 선고를 받았을때의 목표는 임신한 누나의 애기는 보고 떠나실 수 있게 하는거였는데
다행히도 1년이나 더 사셔서 애기를 보고 같이 많이 놀아주셨네요.
좀만 더 오래 계셨다면 말도 배우고 할아버지라고 부르면서 뛰어오는 손녀 모습을 볼 수 있었을 텐데...
5. 처음에도 조심스럽게 말했지만 후회없이 잘 보내드렸습니다.
어떤 분들은 급작스런 사고로 사랑하는 이를 준비없이 보내기도 하죠.
그런 의미에서라면 임종까지 자리를 지킨 저는 좀 복 받은 걸지도 모르겠네요.
다만 우리곁에 오래 못 계시고 떠났다는 아쉬움... 아쉬움이 많이 남았습니다.
6. 고향 호스피스병원으로 오고나서 날씨 좋은날
건물 지붕에 마련되어있는 정원을 걸으면서 아버지랑 대화했습니다.
살아오면서 후회되거나 아쉬운거 없냐고 물으니
짧게 "없다"고 대답하시더군요.
아버지는 살면서 좋았던게 뭐냐고 물으니깐
대답은 "너희들 키운거"
7. 6의 대화에서 보면 아시듯이 아버지는 죽음에 대해 내내 초연해하시더군요.
겉으로만 그러하셨는지도 모르겠지만...
8. 작년에 한 일중 제일 잘한거라고 생각되는 일
아버지가 평소에 나보고 여자는 안 만나냐고 자주 물어보셨습니다.
하나있는 아들이 가문의 대를 못 이을까봐 걱정하셨는지...
물론 아버지 성격이 쿨해서 그런 것에 연연하실 분은 아닙니다만
암튼 어쩌다보니 작년에 처음 여자 친구를 사귀게 되었는데
어버이날 부모님한테 친구한명 데리고 간다고 말하고 불쑥 여자친구랑 같이 찾아갔었죠.
어머니는 그때 입이 귀에 걸리셨고 아버지는 내색을 별로 안하셨을테지만 좋아하셨을거라 생각되네요.
안타깝게도 여자친구랑은 100일도 못되서 헤어졌습니다.
9. 6에서 대화 뒤에 말한 내용 중
아버지가 아들의 남자로서의 능력을 의심할 것 같아서 여자친구 데리고 인사드렸다고 말씀드리니
아직도 여전히 의심이 하고있다고 하시더군요...
10. 그리 길지는 않았지만 아버지 임종 전에 병원에서만 일주일 정도 있었는데
그나마 삭막한 분위기를 살린게 누나 애기였습니다.
원래 병원에는 애기를 데리고 가는게 아니라고 흔히들 말하지만
아버지 가시는 길에 손녀 한번이라도 더 보여드리리라는 의도도 있었고
우리들끼리만 있으면 너무 침울할거 같아서 애기를 병실에 데리고 다녔습니다.
물론 애를 챙기는데 누나가 좀 더 피곤하고 고생한 면은 있지만
애기가 있어서 그런지 병실 분위기가 어둡지만은 않았었네요.
11. 아버지는 과일을 좋아하셨습니다.
임종 전까지 치료를 한다고 일주일간 아무것도 못 드셨는데
임종하루전 의식을 잃기 불과 두세시간전에
아버지가 난데없이 사과가 먹고싶다고 하셨답니다...(그때 제가 잠시 자리를 비웠음)
어머니는 알겠다고 사과 한조각 작게 잘라서 드렸다네요.
12. 간암으로 돌아가시는 분들 대부분 의식 잃기 전에 정신이 혼미해진다고 합니다.
의식잃기 전부터 하나 둘씩 증세가 보이더군요.
갑자기 아버지 당신을 찾는 방송을 들었다고 하던가.
뜬금없이 우리 어린시절 전세집에서 청소 당번인데 청소해야 한다. 라는 생각이 든다든지
지갑이 어딨냐고 물으시길래 왜 찾냐고 여쭤보니 갑자기 생각난다고...
13. 그러다가 밤 9시 10시쯤해서 아버지가 화장실을 가려고 하는데 몸을 못 가누시더군요.
그러고 눈을 감고 호흡이 거칠어 지셨습니다.
난 뭔가 예감이 안좋아서 새벽 12시쯤 되서 애기 때문에 먼저 집에간 누나를 오라고 불렀죠.
아버지는 혼수상태로 혼자서 알아들을 수 없는 입으로 중얼거리십니다.
그러다가 갑자기 우리들 이름을 겨우 부르고 어머니를 부르시더니
뭔가 한마디 남기셨는데 잘 알아듣기 힘들었습니다.
아마 "잘 있어라"라고 추정하고 있습니다.
14. 아버지 곁을 지키다 지쳐서 돌아가면서 누워있었는데
어머니가 갑자기 번쩍 일어나시더니 아버지랑 어머니 본인 지갑을 꺼냅니다.
그리고 어머니 지갑에서 아버지 지갑으로 20만원을 넣으시더니 아버지 주머니에 넣어드립니다.
왜 그러냐고 물으니 아버지 아까전에 지갑 찾으셨는데 가시는 길에 노잣돈하라고 넣어드렸다고
15. 그렇게 아침까지 조금씩 자면서 지세우다가 갑자기 밖에 눈이 옵니다.
그 눈은 아버지 임종 순간 전후에만 잠깐 내리다 그쳤습니다.
16. 밤새 아버지의 현재 맥박, 호흡상태를 볼 수 있는 기계를 보고 있었습니다.
밤새 아버지의 신음섞인 호흡은 점차 일정한 단조로운 호흡으로 바뀌고 혈압은 조금씩 떨어져 갔습니다.
아무튼 밤새 똑같은 형태의 호흡 파형만 계속 지켜보고 있었는데
어느 순간 그 파형이 일직선으로 변합니다. 그게 아버지 임종이었습니다.
17. 임종 후 떠나시는 분과 작별인사하기 위한 시간이 주어집니다.
대략 십여분간 마지막으로 아버지에게 하고 싶은 말을 하였죠.
의사 선생님이 사망진단서를 작성하신 후
장의사분이 흰천이 깔린 침대를 가지고 들어오십니다.
고인의 시신을 침대로 옮긴고 그 흰천으로 감싸서 동여맨 후 안치실로 이동합니다.
안치실에는 왠 냉장고 같이 생긴 기계가 있습니다....
영화 '아저씨'에 나온 시신을 넣는 그것과 똑같이 생겼습니다.
여러개의 문 중 하나를 열어서 아버지의 시신을 안으로 옮겼습니다.
이 과정을 저와 장의사 분 둘이서 같이 하였습니다.
18. 아무튼 그때부터 장례절차를 진행하였습니다.
사실 임종에 가까웠다는 의사쌤 말 듣고는 미리 조금씩 조사해두었는데
병원 장례식장에서 대부분 알아서 해주더군요.
19. 장례절차에서 유족들이 제일 먼저 결정지어야 하는것은
고인의 시신을 어떻게 안치할 것인가입니다.
그것만 결정되면 나머지 절차는 장례업체에서 알아서 해줍니다.
하지만 아버지 살아계실 적에 이에 대한 구체적인 언급이 없어서 결정하기 쉽지 않았죠.
단지 화장에 대한 언급만 가끔씩 하셨죠.
한번 겪어보고 느낀건데 평소 살면서 내가 어떻게 죽을지에 대해선 생각 좀 해보고
주변사람들한테 미리 말해두는게 좋을거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20. 결국 화장에 유골을 납골당에 안치하는 방향으로 진행하였습니다.
요즘 많이들 선택하는 방법입니다.
혹은 화장에 자연장을 선택하는 분들도 많다고 하더군요.
자연장은 온갖 방법이 다 있죠. 바다에 뿌리거나 땅에 묻거나. 나무를 사서 거기에 묻거나...
21. 상이 시작되고 손님을 받는데 장례식장 세팅이 마무리가 안되었는데 오는 손님들이 몇분 계십니다.
상주로서 많이 난처했습니다. 장례식장은 임종후 최소 6시간 이후에 방문하는게 예의라고 하더군요.
22. 아버지가 대기업에서 20살쯤부터 35년 넘게 근무하시다보니 회사 손님이 많이 오셨습니다.
많은 직장동료분들을 뵙고 말씀을 들어보니
아버지가 제 생각보다 훨씬 훌륭하셨던 분이라는 생각이 들더군요.
23. 이틀째되던날 오전에 입관식이 있었습니다.
친지분들을 모시고 입관실이 진행되는 곳으로 향하였습니다.
테이블에는 수의를 입은 사람처럼 생긴 뭔가가 뉘어져 있고
전에 왔었던 장의사와 다른 한분이서 뭔가 분무기로 액체를 뿌려가며 작업을 하고계십니다.
얼굴 위에 천이 덮혀 있었는데 잘 가려져있지 않아서 얼굴 윤곽이 대충 보입니다.
아버지 얼굴입니다.
한참 작업하신후 장의사 분이 고인께 마지막으로 인사드리는거라면서 흰천을 벗깁니다.
역시나 아버지 얼굴입니다. 뭔가 현실감 없어보이는 장면이었습니다.
장의사분이 아버지 잘 떠나보내시라면서 제 손목을 붙잡고 아버지 얼굴에 가져다 댑니다.
손에 아버지 얼굴이 닿았는데 싸늘합니다.
이런 말 쓰기 진짜 이상하지만... 마치 냉장고 안에서 막 꺼낸듯한 고기와 같은 온도였습니다.
얼굴은 아직 그대론데 싸늘한 아버지 얼굴을 만지니 눈물이 납니다.
그렇게 저부터해서 다른 친지분들까지 아버지 육신을 마지막으로 막져보았습니다.
다들 그 자리에서 오열합니다.
진짜 마지막으로 한마디씩 남기고 장의사분이 다시 아버지 얼굴을 천으로 덮습니다.
24. 얼굴까지 수의를 입히고 뭔가 큰 봉투같을걸 올려놓으신 후 하시는 말씀이
고인 마지막 가시는 길에 노잣돈 챙겨주실분 드리라고 합니다.
생각해보니 평생 아버지 용돈 한번 드려본 적이 없었기에 챙겨드리고 싶었는데 마침 지갑이 없었습니다.
장의사분께 아버지께 용돈 드리고 싶다고 잠시만 기다려달라고 부탁드리고 황급히 지갑을 챙겨와서
만원짜리 몇장을 챙겨서 넣어드렸습니다.
그리고 고인의 시신을 같이 들어서 옆에 준비된 관으로 안치시킵니다.
관은 다시 지난번에 시신을 넣었던 기계로 넣었습니다.
전 장례절차를 통틀어 입관식때 가장 많이 울었던거 같네요.
25. 이틀에 걸쳐서 아버지 손님도 많이 오셨지만
그 동안 연락 자주 못했던 제 지인분들도 엄청 많이 오셨습니다.
주변 분들의 소중함을 알게 되었고 평소에 연락이 뜸했던게 죄송스럽더군요.
많은 분들에게 큰 은혜 입었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26. 부조할때 주의사항
본인 이름과 소속을 부조 봉투에 기입하셔야 상주가 나중에 부조금을 정리하는데 도움이 됩니다.
어차피 부조금도 다 언젠간 갚아야할 빚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나중에 부조 내역을 꼼꼼히 정리해두었습니다.
27. 혹시 상가집에 늦게 방문하게 되실 경우
상주에게 몇시에 몇명이 갈거란걸 미리 알려주면 좋습니다.
첫날 밤12시 넘어서 제 지인분들 20여명이 오셨는데 음식이 거의 떨어져서 크게 낭패를 보았습니다.
어쩔 수 없이 근처 국밥집에 급히 연락을 취해서 음식을 급히 공수해오게 되었는데
같이 일하고 있는 친지분들에게 죄송스럽더군요.
내가 진작 몇시에 몇명이 오는지 파악을 하였다면 그런 고생 안하였을텐데 말입니다.
28. 마지막날 아침에 화장터로 떠나기 위해 아침일찍 발인 식을 시작하였습니다.
첫날부터 아버지 임종을 지키기위해 거의 밤을 지새운터라
4일연속 거의 잠을 못 자서 몸이 많이 지친 상태였습니다.
상 치우기 전에 제사 한번, 그리고 발인식장에서 제사 한번 치룬후 운구 차량으로 관을 옮겼습니다.
아침부터 아버지 발인식에 참석하기 위해 많은 직장 동료분들이 오셨더군요.
29. 떠나는 길에 아버지 생전 살던 집을 방문하는 간단한 노제를 치뤘습니다.
버스를 잠시 집 앞에 대기시키고 아버지 영정사진을 가지고 집 안으로 들어왔습니다.
살아 계실적에 병원 대신 집에 가고 싶어하셨다는게 많이 걸리더군요.
돌아가신 후에야 겨우 영정사진만 집으로 모셔다가 다시 보내드렸네요.
30. 그렇게 간단하게 집을 들린 후 다시 화장터로 출발하였습니다.
화장터에 와서 친구들이 관을 들어다 주었습니다.
사실 발인때부터 화장을 할 때까지 관을 볼때면 뭔가 와닿지가 않았습니다. .
입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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