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군정-이승만 시절
1. 미군정이 세운 사법부
1945년 11월 정동과 서소문에는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광복 이후 몇 달간의 사법 공백을 깨고 서울에서 처음으로 재판이 열린 것이다. 일제 강점기시절에 있었던 옛 황실재산의 횡령사건에 대한 재판이었다. 한복을 입은 조선인 법관이 우리말로 재판을 진행한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사람들이 구경을 나올 만큼 새로운 사법부에 대한 기대는 컸다.*
그러나 현실은 만만치 않았다. 신생 사법부는 일제에 협력하지 않은 사람들로 채워야 하건만 법률지식을 갖춘 사람이 많지 않았다. 해방 당시 조선총독부 재판소 판사는 250명이고, 검사는 138명이었는데, 그 대부분은 일본인이었다. 변호사는 모두 420명이었는데, 그중 한국인은 250명으로 38도선 이남에는 150명만이 있을 뿐이었다. 미군정은 인력 부족을 이유로 친일 법조인을 걸러내기는커녕 무자격자들에게 허겁지겁 변호사 자격을 부여했다. 일제하의 마지막 변호사시험은 1945년 8월14일부터 시작하여 민법, 형법, 상법 세 과목만 치른 상태에서 해방으로 중단되었다. 일본인들은 본국이 무조건항복하자 관련 서류를 모두 불태워 버렸는데, 응시자들은 집단으로 전원 합격을 요구했다. 응시자 200명 중 남쪽에 있어 연락이 된 106명이 변호사시험 합격 증서를 교부받고 판검사로 임명**되는 코미디(...)가 벌어졌다.
2. 김용무 대법원장에 대한 불신임
미군정은 1945년 10월11일 김용무 변호사를 대법원장에 임명하였는데, 그는 임명된 지 불과 넉 달여 만에 판검사 40여명에 의해 불신임안이 제출되는 불명예를 겪었다. 대법원장 자신이 재판에 부당하게 간여하려 했던 때문이었다. 김용무는 1946년 서울지방심리원 오승근 부장판사가 담당한 민사사건에 대해 잘 보아 달라는 내용의 쪽지를 보냈는데, 오승근 부장이 덜컥 대법원장을 직권으로 증인으로 채택해 버린 것이다. 대법원장으로서는 망신도 이런 망신이 있을 수 없었다. 대법원장 자신이 스스로 재판의 독립성을 침해했으니 누구를 탓할 일도 아니었다. 김용무는 사표를 제출했으나 미군정은 이를 반려했다.
3. 초대 대법원장 김병로***
1) 대통령과 불화하는 대법원장 : 대한민국 정부 수립 후 대법원장에는 요즘 식으로 이야기하면 인권변호사 출신의 김병로가 임명되었다. 김병로 대법원장은 반민특위 특별재판장도 맡았는데, 민족적 양심을 가진 보수파로서 친일잔재 청산의 의지를 가진 김병로는 친일파에 의존하려던 이승만과 대립할 수밖에 없었다. 김병로는 이승만의 비호 아래 경찰이 반민특위를 습격하고 특경대를 해산하자 이를 맹비난했지만 역부족이었다. 마음고생이 심했던 그는 지병이 도져 한쪽 다리를 절단하는 아픔을 겪었다. 대수술을 받고 병석에 누운 그에게 이승만은 사표를 종용했지만, 그는 응하지 않았다.
2) 서민호 의원 사건 : 이승만 정권이 행한 사법권 침해의 대표적인 사례로는 1952년의 서민호 의원 사건을 들 수 있다. 서민호는 야당의원으로, 이승만정권과 극렬한 대립관계에 있었다. 서민호는 술 취한 현역 육군 대위와 시비가 붙었다가 다툼 도중 호신용 권총으로 육군대위를 살해하였다. 정당방위에 해당하는 사건이지만, 당국은 서민호를 살인죄로 구속했다. 국회는 5월14일 서 의원에 대한 석방결의안을 통과시켰다. 국회에서 석방 결의안이 통과되면 지체 없이 석방되어야 마땅한 것이지만, 검찰은 석방지휘를 하지 않았다. 결국 석방결의안 통과 닷새 후인 5월19일 안윤출 부장판사는 친지들이 “만약 석방조치를 하면 너는 귀신도 모르게 죽는다”는 충고를 하였음에도 구속집행정지 결정을 내려 서 의원을 석방했다. ‘백골단’, ‘땃벌떼’, ‘민중자결단’ 등 정체불명의 단체가 이끄는 시위대가 다시 법원으로 몰려와 “안윤출을 죽여라”라고 외쳤고 안 판사의 하숙집도 습격 받았다. 이후 안윤출 부장판사는 1958년에 실시된 법관 재임용에서 1호로 탈락했다. 이승만은 이 사건과 관련하여 김병로 대법원장에게 불만을 표했다. 이에 김병로는 “판사가 내린 판결은 대법원장도 이래라저래라 할 수 없는 것으로서 판결이 잘못되었다고 생각하면 절차를 밟아 상소하면 된다”고 답변했다.
3) 정년퇴임 : 사법부는 어려운 여건 속에서도 정부가 무리하게 기소한 국가보안법 사건이나 정치적 이유로 옭아 넣은 뇌물사건 등에 대해 연거푸 무죄를 선고했다. 만 70살이 된 김병로는 1957년 12월 자신보다 13살이나 많은 이승만을 두고 정년퇴임을 했다. 후배 판사들에게“굶어죽는 것을 영광”으로 알라고 늘 강조해 온 그는 국회에서 행한 퇴임인사에서 사법부의 독립성 유지를 위해 법관들의 ‘최저생활 보장’을 간곡히 호소했다.
*일제시대에는 조선인 판사가 없었다. 조선인 변호사나 법원직원, 수사관 등은 있었지만 무엇보다 조선인이 아닌 일본인에게 민형사 사건을 재판받아야만 했던 것이 조선인들에게는 불만이었고, 일제통치의 본질을 엿볼 수 있는 단면이기도 하다.
**일설에는 이 때 변호사자격증을 발급받은 사람 중에는 변호사시험에 응시조차 하지 않았던 사람이 있다는 풍문이 있다.
***김병로에 대해서는
http://todayhumor.co.kr/board/view.php?kind=search&ask_time=&search_table_name=&table=bestofbest&no=66192&page=1&keyfield=subject&keyword=%B4%EB%B9%FD%BF%F8%C0%E5&mn=&nk=&ouscrap_keyword=&ouscrap_no=&s_no=66192&member_kind= 를 참조하면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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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체불명의 단체가 법관에 대한 테러를 가한다거나,
정권의 눈에 거슬리는 판사가 재임용에 탈락하는 것은,
50년대에나 있어야 할 일인데도 불구하고 불과 며칠 전에도 발생하는 것을 똑똑히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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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마광은 저서 <간원제명기>에서 다음과 같은 말을 남겼다.
"뒷날 사람들이 장차 그 이름을 낱낱이 손가락질하며 논할 것이다. 누구는 충성했다, 누구는 속였다, 누구는 곧았다, 누구는 굽었다
(某也忠, 某也詐, 某也直, 某也曲)."