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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친구는 패션피플이다. 녀석은 유행을 따르고 때로는 유행을 앞질러 가기도 하고 가끔은 새마을운동 시대에나 입을법한 복고풍 의상을 입고
나타나 아버지의 젊으셨을 때는 저러셨겠구나 하는 생각을 한다. 물론 녀석이 패션피플이라는 것은 녀석 혼자만의 생각이다. 이십여 년 동안 녀석을
지켜본 나와 다른 친구들은 녀석을 이제는 "저렇게 살다 죽겠지." 하며 포기한 지 오래다. 그리고 제발 길을 걸을 때 우리랑 거리를 두고 좀 걸었으면
하는 마음뿐이다.
교복을 벗고 처음으로 만난 녀석은 오리엔테이션 때부터 다른 동기들보다 눈에 띄는 편이었다. 나를 비롯한 동기들이 아직 고등학생 티를 벗지 못하고
수수한 예비 새내기의 복장으로 오리엔테이션을 찾았는데, 녀석은 아래위로 보라색 슈트를 입고 나타났다. 선배들은 유독 눈에 띄는
아니 자연스럽게 시선을 집중시키는 녀석의 복장을 보고 "이번 신입생 중에 조커가 있다.", "아니다 신바람 이 박사님의 수제자다." 등의 의견이
분분했다. 물론 결론은 "뭐야.. 쟤 무서워.." 였지만..
녀석과 함께 다니면 분명 눈에 띌 것이 분명해 거리를 두고 싶었지만 과에서 전능하신 패션왕, 패션 대제, 패션 황제 등으로 군림했던 녀석은
대학 시절 아니 인생의 절친한 친구로 옷을 지질히도 입지 못하는 나를 안쓰럽게 여겨 친히 수하로 간택했고, 난 패션왕의 충직한 수행원이 되었다.
그리고 녀석은 평소 불만이 많던 나의 복장에 대해 본격 지적질이 시작되었다.
"성성이 네가 왜 여자친구가 없는 줄 알아? 얼굴이 못생겨서? 아니면 말주변이 없어서? 물론 얼굴, 말발 모두 중요하지 하지만 넌 딱 보면
구려. 그냥 구려. 너를 보면 마치 시골에서 어제 상경했슈~ 하는 거 같단 말이다."
"무슨 소리야. 우리 고향에서는 생긴 건 안타깝지만 옷 잘 입는다는 소리 들었는데."
나는 신입생 시절 가슴에 브랜드명이 크게 새겨진 티셔츠에 청바지를 즐겨 입었다. 사실 입대한 작은형 (그래도 우리 집안의 유일한 패션 피플이다.)
이 입대 전 소중히 아꼈던 옷들을 입고 다니긴 했다.
"그러니까 네가 딱 네 고향에서나 먹히는 촌놈 티가 너무 팍팍 난단 말이다. 꼭 논에서 모내기하다 온 아저씨 같아."
농업을 우습게 생각하는 녀석에게 농자천하지대본 펀치를 날리며 녀석의 광대뼈가 단단한지 아니면 나의 농번기 기운을 듬뿍 받은 주먹이 강할지
한 번 실험하고도 싶었다.
"내가 봤을 때 너는 키도 큰 편이고, 옷만 잘 입어도 아마 여자들에게 먹힐 수 있을 거 같아."
녀석의 여자들에게 먹힐 수 있다는 말에 난 소외당하는 일차 산업의 응어리를 담은 주먹의 힘을 풀고 녀석에게 조심스럽게 물었다.
"정말? 나도 옷만 잘 입으면 여자친구가 생길까?"
"그럼! 당연하지. 나만 믿고 동대문으로 한번 원정을 떠나자. 내가 너를 변신시켜줄게."
그날 나는 단순히 여자친구가 생길 수 있다는 녀석의 말에 녀석과 동대문 원정을 떠났다. 하지만 그날의 가장 큰 실수는 녀석도 여자친구라는 게
없었다는 것이었다. 그동안 엄마가 사주시던 옷 또는 형들이 입던 옷을 대물림해서 입던 내가 옷을 사러 직접 나선 건 그날이 처음이었다. 최신 유행
의류가 즐비한 동대문 상가는 촌놈이었던 내 눈을 휘둥그레지게 만들었다. 그리고 근사하게 꾸며놓은 마네킹 앞에서 감탄하고 있을 때 녀석은
내게 말했다.
"진정한 멋쟁이는 저렇게 마네킹이 입고 있는 옷을 입지 않아. 잘 생각해봐. 너랑 똑같은 옷을 입은 사람을 지하철에서도 학교에서도 심지어
술집에서도 보고 싶어? 그럼 넌 네가 가진 장점을 잃어버리는 거라고.. 뭔가 너랑 맞는 그런 너만의 아이템을 내가 찾아줄게."
녀석과 두 시간이 넘게 동대문 패션타운을 헤매고 다녔다. 녀석은 귀여운 여인의 리처드 기어처럼 내게 이 옷 저 옷을 입혀보고 심각한 표정을 짓다가
녀석은 어떤 복장을 입혀보고 드디어 만족한 듯한 표정을 지었다. 내게 골라준 옷은 녀석의 표현대로 하면 밀리터리 룩이었다.
집에 돌아와 녀석이 골라준 옷을 입어봤다. 드디어 내가 시골이 아닌 다른 곳에서 온 사람의 느낌이 들었고, 바지에 주머니가 많이 있어 이것저것
넣을 수 있는 것도 마음에 들었다. 다음날 나는 설레는 마음으로 녀석의 표현대로는 강한 도시 남자 풀세트로 입고 등교했다.
모든 학우가 나의 강인함을 동경하는 눈빛으로 바라보는 것 같았다. 사람들의 주목을 받는다는 이런 기분은 대학 아니 태어나서 처음인 것 같았다.
과의 동기들에게 "오늘 나 어떠냐?" 라고 물었을 때 동기들은 씁쓸한 표정을 지으며 "멋지네." 라고 칭찬해줬다. 그리고 유일하게 내 인생에
여자들과 대화를 편하게 나눌 수 있고 과에 비해 월등히 여자들이 더 많이 상주하고 있는 동아리 방에 자신만만하게 들어갔다.
동아리 방에 있는 선배와 동기들 역시 나를 보고 놀라는 등 예상한 반응이었다. 그때 동아리 방 한쪽 구석에 있던 친한 여자 선배가 깜짝 놀란
표정으로 나를 불렀다.
"성성이. 너 뭐냐..?"
"네?"
"아니 옷이 그게 뭐냐고?"
"이게 요즘 앞으로 유행할 밀리터리 룩이라고..."
"니가 무슨 1억의 사나이냐? 옷이 그게 뭐야?"
"네? 1억이요?"
"야..인마.. 지금 네 모습을 봐.. 딱 봐도 좀 전에 북에서 내려온 간첩이지. 그게 평범한 남한사람이 입는 옷이냐."
나는 그 뒤 동아리에서 간첩, 1억의 사나이, 113, 내레 고조 등으로 불렸다. 하지만 잠시나마 이제는 촌놈 소리는 듣지 않겠구나 라며 기뻐했다.
그리고 바로 동아리방을 뛰쳐나가 내게 간첩이란 칭호를 만들어준 고마운 은인을 포획한 뒤 북조선 어버이 수령님 펀치를 날렸다.
"이 새끼야.. 너 때문에 간첩 소리 듣게 됐잖아! 이게 뭐냐고.. 뭐? 밀리터리 룩? 인민의 주먹 맛 좀 봐라! 이 부르주아 자식아!"
고개 숙인 채 녀석은 내게 등짝을 맞다가 갑자기 "잠깐!!"을 외치며 말했다.
"이 병신아! 밀리터리 룩의 완성은 신발인데 누가 밀리터리 룩에 흰 운동화를 신냐! 당연히 군화를 신었어야지!!!"
그 날 자본주의 상징 같던 패션 프론티어는 그 말을 마지막으로 성난 프롤레타리아 패션 고자 촌놈에게 신나게 두들겨 맞았다.
출처 | 외모보다는 마음이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대머리독수리 아저씨와 옷 잘 입는 친구 이야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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