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험 기간만큼 사람이 쓸데 없이 창조적으로 되는 때는 없을 것이다.
이제 막 핀 문제집에 그린 낙서가 희대의 역작이 되고
노트 정리 중에 대충 끄적거린 구절이 인생의 명언이 되는 것이 바로 그 예라 할 수 있겠다.
내가 지금 이 글을 쓰는 것도 바로 시험 기간이기 때문이다.
수업을 끝내고 좀 쉴 겸 동아리방에 들어갔을 때 후배들은 한창 열띤 토론 중이었다.
대충 들어보니 어떻게 하면 힘을 낼 수 있을까에 대한 이야기였다.
아직 시험이 한창 남았는데 벌써 저런 걱정을 하는 새내기들이 가엽게 느껴져
'음료수라도 하나씩 사줄까' 라고 생각하던 참이었다.
그런데 자세히 들어보니 후배들의 대화는 단순히 힘을 내는 방법에 관한 게 아니었다.
그것은 다름 아닌
<'오빠'라는 호칭은 정말로 남녀를 가리지 않고 모두를 힘내게 하는가?>였다.
아마 한창 SNS에서 유행했었다는 것 같다.
나는 생전 처음 들어보는 주제에 당황했지만,
이내 시험 기간이라는 것을 깨닫고 다들 창조적으로 변한 것이라 생각했다.
이 토론은 의외로 쉽게 결론이 나는 것으로 보였다.
남자애들 몇몇이 여자애들에게 '오빠'라고 불러보는 실험을 한 것이다.
먼저 한 명이 '오빠'라고 말하자 여자애들은
"다시는 나를 그렇게 부르지 마라, 더러운 것아."
"너에겐 정말 멋진 재능이 있구나, 아름다운 말을 쓰레기로 만드는 재능."
"너의 말은 정말 금성 같아. 아주 그냥 황폐하네."
"당신의 그 역겨운 입이 무고한 단어를 끔찍하게 만들고 있는 게 안 보입니까?"
라며 그 남자애의 멘탈을 박살내 버렸다.
다른 애의 이어진 '오빠' 호칭에도
"와, 나 사람 얼굴 근육이 저렇게 역겹게 움직이는 거 처음 봤어!"
"네가 남자라 다행이야, 오빠를 말할 일이 없어서. 하마터면 죽일 뻔."
"차라리 스컹크가 오빠라고 부르는 게 더 귀엽겠다."
"내 '오빠'가 더럽혀졌어!! 엉엉..."
라며 다시 한 번 남자애의 인격을 말살해 버렸다.
이쯤 되자 다른 남자애들은 매우 쓸 데 없는 일임을 깨닫고 그만하자고 했다.
여자애들도 현자타임과 자괴감이 온 것인지 쉽게 수긍했다.
그렇게 끝났어야 했다. 그런데 이놈의 방정맞은 입이 가만 있지 않은 게 화근이었다.
"그렇게 국어책 읽듯이 하면 어떡하냐, 좀 더 생동감 있게 말해야지. 진짜 오빠 부르듯이."
내 말에 시체처럼 죽어 있던 애들이 갑자기 고개를 돌리고 나에게도 '오빠'를 요구했다.
뭐, 별 거 아니라는 듯이 말할려 했는데, 막상 말하려니 입이 쉬이 떨어지지 않았다.
하긴 남자가 '오빠'를 말할 일이 얼마나 있겠는가!
그래도 후배들이 저렇게 원하니,
숨을 한 번 고르고
여자애들을 똑바로 쳐다보다가
고개를 살짝 기울이면서
끝을 약간 높여
"오빠↗?"
라고 해주었다.
그러자 여자애들이 소리를 지르며 난리를 치기 시작했다.
"미쳤다, 미쳤어! 난 이걸 듣기 위해 살아온 거구나!"
"선배가 내 눈 보고 '오빠'라고 해줌! 내가 선배 오빠다!!"
"와, 오빠, 세상에.... 제 여동생 할래요?"
"그래, 우리 애기! 뭐가 필요해? 오빠가 다 해줄게!!"
그것은 지금껏 보지 못한 광경이었다.
'오빠'라는 한 마디가 확실히 사람을 미치게 하는 것 같았다.
물론 남자애들은 경멸과 한심의 눈초리로 나를 보고 있었다.
복수할 거다.
그러는 도중에 갑자기 한 여자애가 다가와 어깨에 손을 얹었다. 그리고
"오빠, 없는 게 선다는 게 이런 느낌인 거 같아요."
동아리방은 순식간에 초토화됐고
그 아이는 바로 격리되었다.
난 아직도 그 아이를 피해 다닌다.
이제는 '오빠'를 넘어 '언니'라고 불러달라는 요구도 생겼다.
이러다 분명 무슨 일이 벌어질 것만 같다.
특히 내 정체성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