슈퍼맨처럼 하늘을 날아다니거나 헐크처럼 신을 떡실신시키는 괴력을 가지고 있지는 않지만 내 눈에 와이프는 슈퍼히어로 그 자체다.
내가 처음으로 그녀에게서 슈퍼 히어로의 모습을 발견한 건 결혼 전 그녀와 함께 고추밭에서 일했을 때인 것 같다. 호미를 들고 깨작거리며
밭을 갈고 있을 때 선크림으로 가부키맨처럼 위장하고 나타난 (그녀는 햇볕 알레르기가 있어 장시간 햇볕을 받으면 얼굴에 각종 트러블이
일어나는 체질이다.) 그녀의 오른손에는 괭이가 들려져 있었다. 뜨거운 여름 햇살 아래 서 있는 그녀의 모습은 "술이 식기 전에 돌아오겠소!"
라고 당당하게 허세를 부리던 관우의 모습 그 자체였다. 그리고 기개 넘치게 괭이질하는 모습은 우리 형제들이 결코 따라 할 수 없는 아니 우리
시골에서 그동안 보지 못하던 농업의 신, 인간 트랙터의 모습 그 자체였다.
그리고 내가 그녀를 우리 고향에 파견 나온 슈퍼 히어로라고 느낀 것은 밭일을 마치고 돌아갈 때 역시 마찬가지였다.
"오빠 나 경운기 운전할 줄 아는데 내가 해도 돼?"
"경운기도 운전할 줄 알아? 이게 생각보다 쉬운 게 아닌데.."
그날 경운기 뒤에 탔던 우리 형제들은 그녀의 기아를 때려 부술 듯한 기세의 기아 변속과 좁은 밭고랑을 질주하는 장발의 빈 디젤의 모습을
보며 우리 집안에 드디어 보기만 해도 풍년의 여신, 농업 마스터, 고추밭의 헐크 등을 상상하며 드디어 신의 가호가 내렸다는 것을 직감했다.
결혼 후에도 그녀는 어린이집 고장 난 놀이기구를 완력으로 수리하고, 구멍 난 타이어를 직접 교체하며 손잡이가 고장난 문짝을 부숴버리고
탈출하는 등 (임신했을 때 갑자기 삼겹살이 먹고 싶다며 동네 고깃집에 갔을 때 그녀가 화장실에 갇혔는데 주말이라 문을 고치는 아저씨 연락이
안 돼는 상황에 감귤을 넣어줘야 하나 하며 어떻게 하나 발을 동동거리고 있을 때 와이프는 직접 쇠문을 부수고 나왔다. 와이프 말로는 뱃속의
삼삼이를 생각하니 괴력이 솟았다고.. 그리고 배속의 삼삼이도 함께 도와줬다고 내게 뻥을 쳤다.) 면목동에 강림한 슈퍼 히어로의 모습을 계속
보여줬다.
그리고 지난 금요일 한동안 잠잠했던 와이프의 슈퍼 히어로 본색이 드러나는 사고가 발생했다. 출장을 갔다 일찍 서울에 도착해 와이프와 함께
삼삼이를 데리러 어린이집에 갔다. 그 시간대가 아이들이 귀가하는 시간이라 그런지 아이들을 데리러 온 어른들과 부모를 기다리는 아이들로
말 그대로 인산인해였다. 어린이집 현관문은 자동문인데, 우리가 삼삼이를 데리고 가기 위해 밖에 있을 때 자동문을 안쪽에서 열어줘 문이 서서히
열릴 때 갑자기 문 근처에 서있던 한 아이가 "악~" 하며 소리 지르며 울기 시작했다. 그 아이의 손이 자동문 사이에 낀 것이었다. 아주 짧은
순간이었지만 그 모습을 바라본 어린이 집 선생님도 놀랐는지 어떻게 할지 몰랐고, 다른 아이들도 겁에 질려 소리 지르고 울기 시작했다.
그리고 아이의 엄마로 보이는 분은 아이를 잡고 "어떡해! 어떡해!" 만 외치고 있을 때 "어라! 이거 어떻게 하지.." 하며 바라보고 있던 나를 밀치고
와이프는 서서히 닫히고 있는 자동문을 양손으로 잡았다. 그리고 그 아이 어머니에게 와이프는 소리쳤다.
"제가 반대쪽으로 천천히 끌 테니까 어머니는 아이 손을 살살 빼주세요. 갑자기 빼면 아이가 다칠 거에요!"
문에 낀 아이의 어머니는 그제야 아이를 달래며 와이프가 시킨 대로 서서히 아이의 손을 빼고 있었다. 단지 유리문만 잡고 자동문을 역주행
시키는 와이프의 모습에서 나는 또다시 슈퍼 히어로의 모습을 발견했다. 그리고 손의 힘으로만 자동문을 거의 닫힌 상태로 만들었을 때
아이의 손은 무사히 빠졌고, 그 모습을 지켜보던 학부모들은 "다행이다!" 라는 말을 그리고 아이들은 와이프를 향해 박수를 치기 시작했다.
나는 그런 와이프를 향해 사람들에게 "제 와이프 입니다. 저기 삼삼이 엄마예요.." 라며 말했다. 뿌듯했다.
아이 어머니에게 감사 인사를 들은 슈퍼 히어로 아니 와이프는 "혹시 모르니까 아이 병원 데려가 보세요." 라는 말을 한 뒤 다시 평소의 삼삼이
엄마로 돌아가 "엄마 치고! 치고!" (최고! 최고!) 하는 삼삼이를 안고 아무 일 없는 듯 아직도 멍하니 자동문만 바라보고 있는 나를 빨리 가자면서
끌고 집으로 갔다. 집으로 가는 길 와이프에게 물었다.
"그런데 힘 안 들었어?"
"뭐.. 별로. 그나저나 그 아이 별일 없어야 할 텐데.. 아까 손이 뒤쪽으로 틀어지는 거 같아서 나도 모르게 문을 잡은 거였거든.."
"걱정 마, 바로 빼서 크게 다치지는 않았을 거야."
"그런데 오빠 자동문 고장 안 났겠지? 사실 너무 세게 힘을 주면 문이 고장 날까 봐 제대로 힘 안 썼거든."
"뭐.. 우리 나올 때 보니까 작동 제대로 되는 거 같던데. 그런데 만일 삼삼이 손이 아까 그 애처럼 자동문에 끼면 어떻게 할 거야?"
"그때는 문짝 떼 버릴 거야. 문 잡고 있을 시간이 어딨어.."
그녀는 충분히 그러고도 남을 괴력이 있다고 인정하며 집으로 갔다. 가끔 집의 생활용품을 공처럼 랜디 존슨 괴력투를 내게 던지고, 로저 페더러의
강서브를 내 등짝에 날리기는 하지만 그녀는 적어도 내게는 최고의 슈퍼 히어로다. 함께 살아 다행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