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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선 미안합니다. 한국의 기초과학이 이 모양인 것도, 여태 노벨 과학상 하나 없는 것도, 그래서 머지않은 미래에 <인터스텔라> 같은 영화를 만들 가능성이 없어 보이는 것도 따지고 보면 일차적으로는 저 같은 과학자들이 못난 탓입니다. 나이 마흔을 넘기고 보니 사회의 무관심이나 정부의 수수방관이나 정치인들의 어리석음을 탓하기 전에 먼저 내 주변을 돌아보게 되더군요. 보다 나은 생태계를 만들지 못한 책임이 적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과학에 관심이 많은 독자들의 욕구를 충족시키지 못한 책임은 일차적으로 과학자들이 져야 합니다. <인터스텔라>가 증명하듯 좋은 콘텐츠는 독자나 관객의 반응을 폭발적으로 이끌어낼 수 있습니다.
또한 과학자들이 과학의 사회적 중요성을 주장한 만큼의 책임도 져 왔는지 자문해 봐야 합니다. 황우석 사태, 광우병 파동, 천안함 사건, 그리고 4대강 논란에 이르기까지 과학자들이 제때 제 목소리를 냈다면 국가적인 혼란을 크게 줄일 수 있었을 겁니다. 그랬다면 사회가 과학을 바라보는 시선이 많이 달라졌겠지요. 과학에 대한 사회의 무관심을 말하기 전에, 사회에 대한 과학자의 책임도 돌아봐야 합니다.
그럼에도 염치 불고하고 한 가지 부탁드릴 것이 있습니다. 과학은 쉽지 않습니다. 특히나 현대 과학은 굉장히 어렵습니다. 그런데 대개는 어떤 과학 이슈가 터졌을 때 “초등학생도 이해할 수 있도록 쉽게” 설명해 달라는 요구를 많이 받습니다. 이 세상에는 초등학생이 이해할 수는 없으나, 꼭 알아야만 하는 중요한 가치들이 있습니다. 저는 아직도 경제기사나 법률 기사를 볼 때마다 모르는 단어가 튀어나와 별도로 검색을 해 보곤 합니다. 피케티가 한국에서 강연했을 때 그 누구도 “초등학생이 이해할 수 있는 수준으로” 설명해 달라고 요구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왜 유독 과학은 예외일까요? 올 초 남극의 한 전파망원경에서 중력파를 검출했다는 발표가 나왔을 때 어느 방송사에서는 제게 유치원생도 이해할 수 있게 설명해 달라고도 했습니다. 과연 태초의 중력파가 피케티보다 쉬울까요? 알기 위한 지적 고통을 감내할만한 가치가 없는 것일까요? 저는 이것이 한국에서 기초과학의 현실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한 단면이라고 생각합니다.
현대 과학은 초등학생이 이해할 수 있는 내용이 아닙니다. 스탠퍼드의 레너드 서스킨드는 20세기 초반의 위대한 과학자들이 현대 과학을 정초하기 위해 생각의 회로를 바꿔야만 했다고 얘기합니다. <인터스텔라>가 쉽게 이해되던가요? 아빠 쿠퍼보다 늙어버린 딸 머피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아마 여러분들도 생각의 회로를 바꿔야 할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부탁드립니다. 현대 과학이 원래 어렵다는 것을, 어려운 그대로 받아들여 주셨으면 합니다. 초등학생도 이해할 수 있는 현대 과학은 없습니다.
1. 노벨상의 계절이다. 기자들이 과학자를 많이 찾는 시기이기도 하다. 기자들의 질문은 대개 비슷한 요청으로 시작된다. "초등학생도 이해할 수 있게 설명 부탁드립니다." 과학기사의 주된 독자가 초등학생일 리는 없다. 이런 요청에는 독자들의 과학지식 수준이 초등학생 정도일거라는 가정이 깔려있다고 볼 수밖에 없다. 다른 분야에 대한 취재를 할 때에도 기자들이 이런 요청을 하는지 궁금하다.
2. "로미오와 줄리엣의 작가를 아시나요?" 로미오의 작가는 아는데 줄리엣의 경우는 모른다고 답하면, 회식 분위기가 좋아질 거다. 하지만, 정색을 하며 "처음 듣는 책인데요"라고 답했다가는 마음의 상처를 받게 될지 모른다. "열역학 제2법칙을 아시나요?"하는 질문에는 사뭇 다른 반응이 나온다. 사람들이 오히려 질문자를 이상한 눈으로 쳐다볼 것이기 때문이다. '셰익스피어'는 교양이지만, '열역학 제2법칙'은 교양이 아니라는 말이다. 물리학자가 보기에 이 두 질문의 중요도는 비슷하다. 열역학 제2법칙은 시간이 왜 한 방향으로만 흐르는지 설명해주는 법칙이기 때문이다. 우리 모두 죽는다는 것보다 중요한 사실이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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