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309281308081&code=940401
교학사 교과서 구하려 보수단체들 ‘바른역사국민연합’ 창립·“다른 교과서도 모두 오류” 피장파장론 내세우며 역공 나서 9월 27일 프레스센터. 청중들의 박수를 받으며 연단에 선 권희영 한국학중앙연구원 교수는 말했다.
“민주당·전교조·교학사 교과서를 죽이자고 달려드는 모든 사람들에게 공개적으로 질문합니다. 첫째, 여러분은 대한민국이 한반도의 유일한 합법정부로 태어났다는 것을 부인합니까. 둘째, 6·25전쟁의 책임이 소련이나 북한, 중국에 있다고 생각합니까, 아니면 대한민국도 똑같이 있다고 생각합니까. 셋째, 여러분은 대한민국 군인이 베트남에 가서 양민학살을 했다고 주장합니까.”
여기저기서 “옳소!” “주○○를 때려잡자!”와 같은 외침이 나왔다. 주○○ 교수는 한국사 교과서 기술을 주제로 한 TV토론에서 권 교수의 상대로 나왔던 다른 교과서 대표집필자다.
“공산주의 세력과의 투쟁사” 주장
이날 프레스센터에서 열린 바른역사국민연합 창립식에는 536개 단체가 참여한 것으로 되어 있다. 권 교수는 이날 기조강연자로 참석했다. 권 교수는 “한국의 역사는 공산주의를 따라 인민공화국을 세우자는 세력과 상해임시정부를 중심으로 대한민국을 건설하자는 세력 사이의 긴 투쟁 역사”라며 “좌편향 교과서 필자들은 대한민국 건설을 위한 역사의 정통성이 인민공화국에 있는 것처럼 서술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고등학교 역사교과서 논란의 중심에는 교학사 한국사 교과서가 있다. 권 교수와 이명희 공주대 역사교육학과 교수 등 전·현직 한국현대사학회 회장 등이 집필했다. 추석연휴 전인 9월 10일, 한국역사연구회·역사문제연구소·민족문제연구소·역사학연구소 등은 기자회견을 열어 교학사 교과서 검토 결과 298건의 역사적 사실관계 오류와 편파적 해석이 존재한다고 주장했다. 기본적인 사실관계 오류만 124건이었다. 이튿날, 서남수 교육부 장관은 교학사 교과서를 포함해 8종의 한국사 교과서 모두를 검토해 수정 보완하겠다고 기자회견에서 밝혔다. 교육부는 이 날짜로 낸 보도자료에서 ‘국사편찬위원회와 공동으로 교과서에 대한 심층분석을 실시하고 수정·보완의 필요성이 있는 사항은 향후 국사편찬위원회에 구성할 전문가협의회의 자문과 출판사와의 협의를 거쳐 10월 말까지 수정·보완을 완료할 방침’이라며 ‘한국사의 경우 11월 말까지 교과서 선정·주문을 연기해 학교 현장 공급에 지장이 없도록 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10월 말까지 한 달밖에 남지 않았는데, 전문가협의회 구성과 자문, 출판사 협의 등의 절차를 거쳐 수정·보완작업을 완료한다는 것은 가능한 일일까. 교육부 교과서기획과 정상명 연구사는 “일단은 최선의 노력을 다한다고 말할 수밖에 없다”고 답했다. 보다 근본적인 의문은 이것이다. 역사 관련 단체들이 100개가 넘는 교학사 교과서의 문제를 지적했는데, 어떻게 이런 오류가 사전에 걸러지지 않고 검정을 통과했을까. 정 연구사는 답변에 곤혹스러워 했다. “책임을 떠넘기자는 건 아니고, 검정 심사과정이 진행되는 데 우리들이 관여한 것은 없다. 물어보는 것처럼 어떻게라고 묻는다면 뭐라고 답변하기 어렵다.”
“원래 교과서는 6개월 전에 채택하게 되어 있다. 내년 3월부터 새 교과서로 시작해야 하니, 지금 채택해도 5개월 전이다. 원래는 10월 11일까지 채택해야 하는데, 교학사 교과서가 워낙 오류가 많아서 한 달을 늦춰주겠다니 이건 그쪽에 대한 특혜가 아닌가.” 비상교육 <한국사> 교과서를 대표집필한 도면회 대전대 역사문화학과 교수가 목소리를 높였다. 그는 한 달의 시간을 더 주더라도 교학사 교과서의 오류를 전부 잡아내는 것은 힘들 것이라고 전망했다. “교과서를 집필할 때는 한 문장을 쓰기 위해서 보통 논문 서너 편을 참고해야 한다. 교육부가 구성하겠다는 전문가협의체가 어떤 분들로 구성될지 모른다. 하지만 7종이나 되는 교과서를 고대부터 현대까지 다 검토할 수 있을까. 만약 내가 들여다본다면 하루에 15시간 동안 꼬박 보더라도 보름 이상은 걸릴 것이다. 물리적으로 불가능한 시간이다.”
한달 내 수정·보완 사실상 불가능교학사 교과서 파문이 커지자 현대사학회 측은 9월 17일 기자회견을 열어 다른 교과서의 오류도 지적했다. 사실관계 오류는 피장파장이라는 논리다. 도 교수는 “현대사학회 측 지적을 봤는데 통계의 출전이 명시되어 있지 않다든가 IMF가 시작된 해가 한 해 틀렸다(1997년을 1998년으로 표기) 등의 수정 요구는 얼마든지 수용할 수 있다”며 “하지만 우리가 지적하는 교학사 교과서의 오류는 그런 정도가 아니라, 소수학설이 있고 주류학설이 있다면 주를 달아 입장 차이를 밝혀주든지 해야 하는데, 아예 그런 것이 없다는 것이다”라고 덧붙였다. 이를테면 이영훈 서울대 경제학과 교수의 대한제국기의 토지제도나 동학농민운동과 관련한 유영익 한동대 석좌교수의 설은 현재 학계의 주류가 아니지만 교학사 교과서는 별다른 설명 없이 그 관점에 입각해 쓰여졌다는 것이다. “점입가경인 것은 교학사 교과서에서 이명희 교수는 일본의 식민통치를 언급하면서 동화주의·융합주의를 적용했다고 썼는데, 식민통치를 두고 융합주의라고 하는 것은 전 세계 어디에서도 언급된 적이 없는 개념이다.”
교육부가 교학사 교과서를 포함해 전체 8종의 교과서를 수정하겠다고 한 것과 관련, 교과서 집필에 참여한 교수들은 ‘교학사 교과서 구하기’로 규정했다. 미래엔의 <한국사> 교과서를 대표집필한 한철호 동국대 역사교육과 교수는 “검정 자체를 통과할 수 없는 교과서가 통과되었는데, 지적이 나올 때까지 무엇이 문제인지도 몰랐던 사람들 아닌가”라고 반문하며 “만약 그대로 진행되었다면 현장 채택률은 제로에 가까웠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다른 교과서들은 자체 수정도 가능한데, 사실상 교학사 교과서를 위해 한 달간의 유예기간을 주고 사실관계 오류만 고치면 된다는 것은 말이 안 된다”며 “게다가 법규에도 없는 전문가협의체를 만들어 검토하도록 하겠다는 것도 이중 특혜”라고 말했다. 수준 미달의 교과서를 통과시켜놓고 문제가 되자 나머지 정상적인 교과서들도 문제 있는 양 검토하겠다는 ‘물 타기’라는 것이다.
교학사 교과서를 옹호하기 위해 27일 발족한 ‘바른역사국민연합’의 참가자 면면을 보면 흥미로운 점이 있다. 참가단체 리스트에는 뉴라이트전국연합이나 시대정신 등 종전 ‘뉴라이트’로 분류되어온 단체들의 이름이 명기되어 있지만, 고문단이나 의장단·원로자문단·학계자문단 등의 명단에는 ‘뉴라이트 대안교과서’ 파문을 일으킨 교과서포럼이나 현대사학회 측 인사들이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교학사 교과서의 내용에서는 과거 뉴라이트 교과서 학자들의 학설이나 주장이 인용되고 있지만 당사자들은 뒤로 빠지는 모양새다. 도면회 교수는 “특히 이승만·박정희 독재정권에 대한 일방적 미화가 기존 교과서와 다른 두드러진 특징”이라며 “개인적으로 보기엔 교학사 교과서는 뉴라이트를 넘어서 올드라이트적 성격이 강하다고 본다”고 말했다.
갈수록 상황 불리, 뒤집기 안간힘
김정수 바른역사국민연합 운영위원장은 “이번 교학사 교과서는 종전의 뉴라이트라는 딱지가 붙은 대안교과서와 아무 관련이 없다”고 말했다. 그러나 교학사 교과서는 대안교과서의 책임편집을 맡은 이영훈 교수의 학설을 인용하고 있다. 또 뉴라이트 대안교과서를 만든 교과서포럼과 현대사학회의 임원은 중복되어 있다. 이 같은 지적에 대해 그는 “시민단체들이 학술적인 논쟁에 관여할 필요는 없는 것 아니냐”며 “종전 교과서에서 폄훼되고 있는 대한민국의 건국이나 산업화의 긍정점을 적극적으로 살펴봤다는 점에서 교학사 교과서를 지지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상황은 교학사 교과서 쪽에 불리하게 돌아가고 있다. 9월 27일, 교학사 측은 교과서 집필에 참여한 현직교사 3인이 필자에서 빠지겠다는 내용증명을 보내왔다고 밝혔다. 교육부 규정상 저자가 검정 때와 달라지는 경우 검정이 취소될 수 있다. 전날 교학사 측은 <한국사> 교과서의 광주 5·18, 제주 4·3 사건 서술과 관련, “오해가 있다면 해당 지역을 찾아 사과하겠다”고 밝혔다. 다른 교과서 집필에 참여한 한 교수는 “교학사가 발행한 검정교과서가 <한국사>만 있는 것이 아닌데, <한국사> 교과서로 만들어진 부정적인 이미지가 다른 과목 교과서 채택에도 영향을 주지 않을까 하는 우려에서 비롯된 것으로 본다”고 말했다.
하지만 9월 27일 행사에 연사로 나선 이들은 굽히지 않았다. 이날 이 단체의 대표의장으로 선출된 박세환 국가정체성회복협의회 회장은 “(교학사 교과서를 제외한 나머지) 7개 교과서들은 제주 4·3 사건을 남로당이 주도했다는 것을 은폐하고 이북을 합법정부로 묘사하고 있다”, “월남에서 양민학살을 했다는 날조를 하면서 제대로 된 교과서의 일부 내용을 트집잡아 저항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권 교수 등의 주장에 대해 다른 교과서를 집필한 교수들은 어떻게 반응할까. 한 집필 교수는 “대꾸할 가치도 없는 엉터리 질문”이라며 “그들의 대응방식은 이미 집필자나 학자로서의 태도에서 벗어났다고 본다”고 답했다. 한국 해병대 청룡부대 부대원들의 퐁니·퐁넛 마을, 빈호아, 하미마을 양민학살 등 사건은 관련 보도뿐 아니라 연구서에도 나와 있으며, 민간 차원에서 희생자 위령비도 세워져 있는 상황이다.
<유영익 국사편찬위원장 임명은 ‘국정교과서’로 돌아가자?>
“박근혜 정부가 유영익·이배용 교수를 왜 임명했는지 주목해야 한다.” 역사학계 교수들의 말이다.
9월 23일, 유영익 한동대 석좌교수가 국사편찬위원회 위원장에 임명됐다. 유영익 교수는 이승만 전 대통령의 업적을 옹호해온 대표적인 인사다. 교과서 독재 미화 논란이 불거진 가운데 노골적 편중인사다. 게다가 그는 논란이 된 이번 교학사 교과서를 펴낸 현대사학회의 고문이다. 그가 국사편찬위원회 위원장이 되었을 때 교학사 교과서를 일방적으로 옹호할 가능성이 높다는 우려가 나오는 것도 당연하다. 민주당 역사교과서 친일미화 왜곡대책위원회 소속 의원 19명도 9월 27일 오전 기자회견을 열고 청와대에 유영익 교수의 국사편찬위원회 위원장 내정 철회와 교학사 교과서 검정 취소를 촉구하는 의견서를 전달했다. 유 교수는 갑오경장 연구로 학계에 알려진 인물이다. 한 역사학 교수는 “근대로의 이행에서 상층 엘리트의 역할에 주목하다가 이승만만 본 것”이라며 “일제시대에 대한 연구도 이승만 위주로 보고 ‘우남(이승만 호) 만세’로 달려간 분 아니냐”고 말했다.
밖에서는 주목받지 못했지만 학계에서는 이화여대 총장을 역임한 이배용 전 교수가 유 교수가 국사편찬위원장에 내정된 23일 한국학 중앙연구원 원장에 취임한 것도 “같은 연장선에서의 기획”으로 보고 있다. 지난 대선 당시 이배용 교수는 새누리당 박근혜 후보의 중앙선거대책위원장을 역임했다. 도면회 교수는 “저쪽에서 역사교과서 문제와 관련해 계속 도발하고 있는 것은 ‘검정교과서 문제로 이렇게 혼란할 바에야 차라리 국정교과서로 가는 것이 낫다’는 분위기를 만들기 위한 것”이라고 말했다. 2017년도부터 한국사를 수능 필수화하겠다는 정부 방안에는 민주화 이전 시기처럼 ‘국정교과서 회귀’에 대한 계획이 숨겨져 있다는 주장이다.
우연의 일치일까. 9월 27일 바른역사국민연합 창립식에 참여해 축사를 한 안상수 전 한나라당 대표(현 경남대 석좌교수)는 “다른 학문과 달리 국사만은 가장 뛰어난 분, 공정한 분을 모셔서 국민들의 의사를 받아들여 국민들이 참여하는 가운데 국정교과서로 만들어 단일 교과서로 배우게 하는 것을 검토할 시점이 되었다”고 제안했다. 한철호 교수는 이렇게 덧붙였다.
“검정 시스템도 제도를 잘만 운영하면 나름대로 꽤 괜찮은 시스템이다. 하지만 자기들이 엉망으로 만들어놓고, 제도가 문제가 있으니 국정으로 돌아가자? 이런 어처구니 없는 일이 지금 벌어지고 있는 게 교과서 사태의 본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