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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 식혜
눈을 맞으며 그녀가 서있었다. 유난히 콧등이 시리던 1981년 11월의 어느 추운 겨울 밤.
해산이 멀지 않은 듯 만삭의 몸을 가진 20대 초반의 그녀는 우산도 쓰지 않은 채 인천의 한 허름한 골목가 전봇대 옆에 서서
누군가를 애타게 기다리고 있었다. 어느새 벌개진 두 손을 모아 연신 뺨에 부벼대며 골목 끝자락에서 눈을 떼지 못하다가
문득 전봇대의 주황색 불빛에 낯익은 실루엣이 비춰지자 금새 얼굴에 화색이 돌며 그 쪽을 향해 황급히 걸어가기 시작했다.
"여보!"
"아니, 당신 왜 나와있어?"
20대 중후반에 큰 키를 가진 그녀의 남편은 두 뺨이 붉게 물든 아내의 얼굴을 보자마자 반가운 마음이 들었지만
이내 얼굴을 찌푸리며 네 살 연하의 그녀를 나무랐다.
"눈이 많이 와서......."
"그래도 그렇지. 우산 이리내."
그는 축 처진 모습으로 우물쭈물대는 아내의 손을 낚아채듯 서둘러 자신의 주머니에 넣었다.
얼마나 오래 서있었는지 그녀의 작은 손은 꽁꽁 얼어있었다. 그럴 본 그는 쯧쯧 혀를 차며 서둘러 발길을 옮겼다.
"이 정도 눈은 군대때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니니 데리러 나오지마. 출발하기 전에 전화했잖아."
"네."
냉큼 대답하는 그녀지만 지키지 않을 거라는 건 그도 이미 알고 있었다. 내년 1월이 예정일인 아내는 이번이 첫 출산이었고
무엇보다 옆에 있어줘야 할 장모님은 그녀가 3살때 돌아가셨으며 장인어른과도 사이가 소원해진 상태라 출산을 코앞에 둔
그녀로써는 그가 조금만 늦는 날이면 불안한 마음에 어김없이 무거운 몸을 이끌고 마중나오곤 했던 것이다.
"밥은 좀 먹었어?"
"네."
"집에 가서 확인해볼꺼야."
남편의 가벼운 농담에 아내의 얼굴에 난감한 기색이 역력했다. 임신 초반에 그녀를 병원에 입원시킬 정도로 지독하게 괴롭혔던
입덧이란 녀석이 달수가 차면서 조금씩 덜한다 싶더니 요즘들어 다시 맹위를 떨치고 있었던 것이다. 덕분에 고기나 생선들은 물론,
곡기조차 입에 잘 대지 못하는 그녀가 유일하게 먹을 수 있는 것이 있다면 그건 바로
식혜였다.
"아!!"
"왜 그래?"
두 사람이 1년전 결혼 후 처음 신혼집으로 얻은 오래된 한옥집의 사랑채 단칸방.
아랫목에 이불을 깔아놓고 여유롭게 뉴스를 보던 남편은 방 옆에 있는 작은 부엌에서 들리는 아내의 탄식에 놀라 벌떡 일어났다.
출산일도 멀었는데 설마 몸에 무슨 일이 있는 것은 아닌지 걱정부터 앞서고 있었다. 그러나 그곳에는 멀쩡해보이는 아내가 당장이라도
눈물이 펑펑 쏟아질 것 같은 얼굴로 빈 플라스틱 병을 멍하니 쳐다보고 있었다.
"무슨 일이야?"
"식혜가 떨어졌어요."
"뭐?"
"오..... 오늘 사놓은다고 했는데 떡집 아줌마가 아프시다고 쉬시는 바람에 못사온 걸 깜박했지 뭐에요. 나 먹고 싶은데 어...... 어쩌면 좋죠?"
너무 놀라 말까지 더듬는 아내는 정말로 심각한 표정이었다. 신혼때까지만 해도 먹고 싶은 것, 가지고 싶은 것 하나 제대로 말하지 않던 그녀였지만
아이를 가진 후로는 180도 돌변하여 먹고 싶은 걸 먹지 않으면 당장이라도 죽을 것 같이 힘들어 했기에 그는 심각하게 고민에 빠질 수 밖에 없었다.
슬쩍 TV 위에 놓여진 시계를 보니 어느새 10시 40분을 가르키고 있었다.
이 시간이면 벌써 집 앞 시장은 물론, 역 앞 가게들도 문을 닫았을 시간이었다.
"흐음......"
"오늘은 그냥 자고 내일 새벽에 당신 출근할때 같이 나갔다 올께요."
한참 고민에 빠진 남편의 눈치를 보던 아내가 체념한 듯 빈 병을 버리려 밖으로 나가려 하자
그는 그녀를 저지한 후 벽에 걸린 겉옷을 다시 주섬주섬 챙겨입기 시작했다.
"누님 댁에 혹시 식혜 있는지 알아보고 올께."
걸어서 한 시간 거리에 있는 누나 집에 명절 때도 아닌 요즘 식혜가 있을 리 만무했지만 그는 태연하게 그녀를 진정시키고는 집밖을 나섰다.
그리곤 외투 사이로 스며오는 냉기에 몸을 부르르 떨며 주머니에 있는 담배를 꺼냈다. 얼마 안있어 흰 연기가 어둠 속을 파고들며 밤공기 사이로
퍼져나갔다. 이를 잠시 지켜보던 그는 한숨을 쉬었지만 이내 뭔가를 결심한 듯 외투를 단단히 여미고는 좁은 골목길을 지나 대로를 향해
발길을 돌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얼마의 시간이 흘렀을까. 남편을 기다리다가 깜박 잠이 든 아내의 등에 차가운 손길이 느껴졌다.
"여... 여보... 여보."
"으음...."
"잠깐 일어나봐. 어서."
그녀가 눈을 떠보니 어느새 눈 앞에 2리터짜리 플라스틱 소주 병에 가득 담긴 식혜 한 병이 놓여져 있었다.
그걸 본 그녀의 눈이 순식간에 휘둥그레졌다.
"어디서 구했어요?"
"......."
아내의 질문에 대답 대신 남편은 스테인레스 그릇에 식혜를 그득 담아 그녀에게 내밀었다. 방금 사온 듯 얼음이 살짝 끼어있는 식혜에서는
달큰한 냄새가 물씬 올라오고 있었고 참을 수 없는 갈증을 느낀 그녀는 서둘러 그릇을 받아 순식간에 꿀꺽 꿀꺽 들이켰다.
그런 그녀의 모습을 지켜보던 그의 얼굴에도 그녀 만큼이나 만족스러운 미소가 올라왔다.
옆 동네 전철역까지 걸어가며 밤새도록 가게들을 찾아봤지만 식혜를 파는 곳을 찾을 수 없어
결국 택시를 타고 인천에서 서울 종로까지 가서야 겨우 구할 수 있었던 식혜라는 것을 그녀가 알 리 없으니 말이다.
또한 그로 인해 그의 얄팍한 지갑에는 지폐 한장 남지 않았지만 그는 전혀 개의치 않았다.
"맛있어?"
"네!"
"다행이네. 아무래도 우리 애기도 식혜가 좋은가보다."
"그러게요. 정말 고마워요."
아내는 남은 식혜를 아주 소중한 보물 인양 품에 끌어 안더니 따뜻한 아랫목에 고이 모셔두고는 천천히 먹겠노라고 행복한 얼굴로 그에게 고마워했다.
하지만 그녀의 계획과 달리 더이상 그 식혜를 먹을 수는 없었다.
아껴먹기 위해 한 잔만 먹고 그대로 아랫목에 모셔놓은 식혜가 결국 밤 사이 온돌의 열기로 인해 몽땅 쉬어버렸던 말았던 것이다.
[ 으흑....... 식혜가 다 쉬어버렸어요. 으허엉엉.]
다음날 그가 일하는 회사로 황급히 걸려온 전화 속에서 이 이야기를 하는 아내의 목소리가 쉬어 있을 정도로 통곡을 하고 있었다.
얼마나 맛있었으면, 얼마나 먹고 싶었으면 저렇게 속상해 할까 싶어 아내를 달래고 있던 그였지만
아이만 아니었다면 쉰 식혜라도 먹고 싶었다는 아내의 말에는 당장이라도 터질 듯한 웃음을 참느라 혼나고 말았다.
결국 한참후에야 전화를 끊고 나서 그는 푸하하 웃음을 터트릴 수 있었다.
식혜의 힘이었을까. 결국 이듬해 1월, 아내는 3kg의 건강한 여자아이를 무사히 출산할 수 있었다.
에필로그.
"자, 여기 식혜."
"와~ 고마워. 오빠. 너무 먹고 싶어서 혼났어. 밖에 많이 춥지?"
"아니. 바로 앞에 편의점 갔다왔어. 그나저나 너 입덧 심하면서 이상하게 식혜는 잘 마시네?"
"그러게 말이야. 덕분에 살았지 뭐. 이유는 모르겠지만 식혜만 유일하게 몸에서 잘 받는단 말이지."
"애기가 어지간히 식혜를 좋아하려나 보다. 참, 이번 주말에 장인어른이랑 장모님 뵈러 가기로 한 거 괜찮겠어?"
"당연히 가야지. 엄마 아빠도 첫 손주 보고 싶어 하실 텐데....... 좀 있으면 두 분 제사도 멀지 않았으니까 그 전에 가봐야지."
"그래, 초음파 사진도 잊지 말고 챙기고."
"응."
끝.
-------------------- 후기
실화를 바탕으로 작성한 글인데도 저 당시 사회상을 많이 반영하지 못해 아쉬움이 남습니다.
집에 한글 프로그램이 없는 관계로 메모장에 기재하다보니 2페이지를 맞출 수 있을지 조금 걱정도 되구요,
입상 여부를 떠나서 그저 재미있게 읽어주셨다면 바랄 게 없을 것 같습니다. 감사합니다.
마지막으로 항상 저희를 지켜주시리라 믿어 의심치 않는 사랑하는 우리 부모님. 딸이라면 사족을 못쓰는 딸바보 남편.
그리고 저처럼 식혜를 무척 좋아하는 딸아이에게 이 글을 바칩니다.
이메일 주소: [email protec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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