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이 자박자박 내린 날. 은행에 볼일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지릿하니 주머니에서 진동이 울리기 시작했다. 좁은 바지 주머니에서 힘겹게 핸드폰을 꺼내보니 모르는 번호가 떠있었다. 화면을 보고 잠시 망설였다. 전형적인 피싱 전화번호는 아닌 것 같아 받아보니 고등학교 동창이었다. 유일하게 가끔 주고받은 친구였기에, 반갑기도 했지만 어쩐 일로 전화를 했는지 궁금했다.
요는 고등학교 동창회가 있으니 이번에는 꼭 나와 달라는 이야기였다.
그 자리에 서서 한참을 서있었다. 멍하니 핸드폰의 꺼진 액정을 바라보며 한참을 서있었다. 무엇을 기대하는 걸까. 알 수 없었다.
작은 옷장을 열어보니, 철지난 옷 그리고 여벌의 츄리닝 뿐, 모임에 입고 나가기엔 힘들어 보였다. 옷을 사러갈까 싶었지만 신통치 않은 통장과 옷 감각이 뛰어나지 않음을, 그런 자신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옷장 손잡이를 다시 열어 재낀 후 두 시간동안 고민 끝에 그나마 멀쩡해 보이는 옷을 겨우 고를 수 있었다. 냄새는... 조금 나는 것 같았지만, 그래도 양호해 보였다.
원고들을 검토하는 사이에 시계를 살짝 흘려다 보니, 어느새 약속시간이 가까워져갔다.
방의 불을 끄고 신발을 신었다. 구겨진 신발 뒷부분을 다듬고 나서야 문을 열었다.
약간 푸르스름한 오후의 하늘이었다. 슥슥 밑창이 긁어지는 소리를 내며 터벅터벅 정류장을 향했다. 버스정류장에 거의 다갈 때 즈음 나를 두고 떠나는 버스를 목격했다. 반드시 타야하는 목적지행의 버스였다. 미간이 찌푸려졌지만, 이내 핸드폰으로 정류장의 버스를 확인했다.
예정시간이 한참이 지나도 깜깜 무소식인 버스를 포기한 채 택시를 잡았다.
“명동이요.”
“네.”
시큼한 냄새, 시트에서 나는 코를 건너 뇌를 자극하는 냄새는 언제 맡아도 익숙하지 않고 더부룩했다. 라디오에선 시사보도가 이어지고 있었다.
시간이 지나기 시작하자 택시 아저씨는 빨갱이 어쩌고 하며 욕을 해대기 시작했고 마치 자기의 말에 동조를 해달라는 냥 점점 더 언행이 과격해지기 시작했다.
“저기요. 조금 조용히 해주시면 안 될까요?”
참다못해 운전석을 향해 나지막이 말하자, 운전사는 뭐라 중얼거리는 듯 했다. 더욱 심사가 뒤틀려 얼굴은 석상마냥 굳어져갈 때 즈음, 약속장소에 도착했다. 고개를 내밀어 미터기의 요금을 보니 어째 본래 나와야할 요금보다 더 나온 듯 했지만, 더 이상 이 공간에 남아있고 싶지 않았기에 카드를 건네주었다. 그러자 아저씨는 잠시 빤히 쳐다보더니.
“현찰 없어요?”
굳은 입을 겨우겨우 풀어 카드로 안 되냐 물어보니, 아저씨는 뭐라 말하고 싶은 표정을 짓더니 거칠게 카드를 긁었다. 택시 문을 세차게 닫는 소리사이로 ‘시벌놈’이라는 소리를 들은 것 같았지만 그저 무시했다. 십년이 지나도 사람들은 여전히 무례하고 거칠었다. 아니 더 그런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신호등의 번호가 바뀌기 전에 사람들은 건너고 있었고, 역시 조급함에 건너고 싶었지만 택시아저씨를 상대하고 난 후라 그런지 발걸음은 떨어지지 않았다.
도로 정 가운데를 가로질러 가는 전기 기차는 곧 다가올 크리스마스를 맞이하여 꽤나 화려한 장식을 달고 있었다. 멍하니 구경하다보니 신호등이 바뀌어 냉큼 건너야했다.
거리의 모퉁이를 세 번은 돌아야했다. 물론 아무리 내비게이션을 봐도 이 길이 저 길 같아 상당히 헤매어야 했기도 했다. 겨우겨우 약속장소에 도착했다. 시간을 보니 5분은 일찍 온 것 같아 구석에 자리 잡아 앉아있었다.
단순히 반 동창회가 아니라 고등학교 당시 동기들이 모이는 듯했다. 장소도 꽤나 널찍하니 그럴듯해보였고, 분위기는 조용하면서도 나지막한 음악이 깔리니 긴장된 마음이 좀 풀리는 듯했다.
시간이 지나니 속속히 동창들이 들어오기 시작했고, 낯익은 얼굴도 , 보고 싶지 않던 얼굴도, 모르는 얼굴들도 보였다. 연락을 주었던 친구가 이쪽을 보더니 조금 늦어 미안하다며 손을 덥석 잡고 말해주었다. 괜찮다고 요즘 어떠냐고 물어보기도 전에 다른 누군가가 친구를 불러 데려가 버렸지만 말이다. 어지러운 군중 속에서 어색하고 정신이 없어 일단 음식들이 있는 곳으로 향했다. 간단한 음료를 하나 들고 주전부리나 작은 요리들이 즐비한 코너를 구경하며 돌고 있었다.
“와, 잘 지냈냐.”
그 얼굴을 보자 순식간에 굳어가는 얼굴의 조직을 달래느라 애를 먹어야했다. 최대한 웃으며 답했다.
“어. 뭐 남들하고 다를 게 없지.”
“그래?”
“아, 친구가 부른다. 미안.”
뭐라 입을 떼기 전에 서둘러 접시를 들고 다른 곳으로 가버렸다. 그 자리에 있다간 역겨움에 토할 것 같은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다. 아직도 마음 한구석에 있는 쇳덩이를 내려놓지 못한 모양이었다. 그 얼굴을 보니 속이 답답해져 입맛마저 떨어지고 말았다. 노래를 들어도 그 분위기와 리듬은 귓구멍 속으로 들어오지 않았다. 이곳에 머무르기엔 감정이 버티지 못할 것 같아 초대해준 친구를 찾아 일어났다. 적어도 인사는 하고 가야할 것 같았다. 한참을 뒤져 공연을 준비하고 있는 친구를 발견해냈다.
“아, 뭐야 벌써 가게?”
“미안하다.”
“공연이라도 보고가지?”
“중요한 일이 하나 생겨서, 미안하다. 나중에 밥 한번 살게.”
“원, 빈말은... 그래 잘 가, 나중에 또 만나고.”
궁색한 변명을 한 것 같아 머리 뒤통수 쪽에서 화끈 화끈거림이 느껴졌다. 나오는 문 앞에서 잠시 하늘을 올려다보며 한숨을 쉬었다. 왜 이리 무거운 걸까, 자그마치 12년이 지났지만, 아직도 벗어나지 못한 울타리를 느꼈다. 끊어냈던 쇠사슬의 녹이 내 발목에서 사라지지 않고 있음을 어렴풋이 알 것 같았다.
발걸음을 떼려는 찰나 익숙한 얼굴이 보였다. 좋아했을지도 모를 학창시절 12년이나 알고있었던 친구였다. 그녀는 매우 성숙해보였고, 그 덕에 잠시 멈칫할 수밖에 없었다.
“어...안녕? 오랜만이다.”
그 애가 어색한 듯 인사했다.
“그래, 오랜만이다.”
그리곤 그녀는 어색한 미소를 한번 짓고는 서둘러 들어갔다. 그 자리에서 떠나간 쪽을 바라보며 잠시간 정적을 가졌다. 이내 집을 향한 방향으로 택시가 보였다. 이번 택시아저씨는 무척 중후한 목소리를 가진 듯 했다. 라디오에선 ‘서른 즈음에’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아저씨는 그 노래에 맞춰 콧노래를 흥얼거렸고, 뒤에서 턱을 괴고 두 멜로디를 흘리듯 들으며 빛과 자동차로 수를 놓은 도로를 바라보았다. 아직 시간은 12년 전에 미련을 두고 있는 것 같다. 그렇게 한동안 멍하니 쉴 새 없이 흐르는 차도를 바라보았다. 시트지의 시큼한 냄새가 생각을 마비시키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