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학 공부한 사람들이 볼 때는
다 아는 상식가지고 왜 이렇게 떠들지? 이런 생각이 들 수도 있겠으나
모르시는 분들이 있을 수도 있는거고
10년 전에 공부했던 책이랑 논문 최근에 다시 읽다보니 머리속이 소란스러워져서
혼자 생각 정리하는 겸 해서 잠시 끄적여보자면 일단 지금 글의 주제는
상대방을 간절히 원하는 것이 아니라 상대방이 전혀 필요가 없어야만 진정한 사랑이 시작 된다
인데, 얼핏 보면 모순적이라고 느끼는 분들도 있을 것이다
사랑이라는 것은 원래 질투를 동반하고 소유하고 싶은 감정 아닌가?
나도 맞다고 생각한다
그러니까 잠깐만 (내가 생각 정리 할 겸) 복잡한 이야기를 하자면 올라가자면
마르크스가 말한 인간 소외라는 개념이 있다
자본주의와 대량생산 이전에는 인간이란 쉽게 말해 수공업자들은
무언가를 계획해서 만들고 생산해내는 주체가 되었고
여기서 점차 기술이 늘어 장인이 되기도 하고 사람들과의 관계도 하며
자아실현도 궁극적으로 노동을 통해서 이루어진다고 보았다
그런데 지금은 내가 만드는 나사가 어디에 들어가는지조차 모른채로
노동의 주체가 아니라 부속품이 되었고 인간의 가치란 노동력 그러니까 돈으로 환원된다
여기에 나의 기술의 향상이라거나 자아실현 따위 끼어들 여지는 없다
따라서 필연적으로 발생하는 것이 인간소외다
프로이트와 맑스의 영향을 강하게 받은 에리히프롬은
그는 사랑의 기술에서 자본주의와 사랑은 양립하기 힘들다는 말도 했는데
더 직접적인 것이 존재냐 소유냐라는 책이다
이 책의 요점은 예전에는 "나는 결혼을 했다" 라고 표현되던 말이
"나는 아내를 소유하고(have) 있다"라는 표현 방식으로 변하고 있다는 말이다
여기에 대해서 조금만 언급하자면
전통적으로 기독교의 영향 아래 있던 서구사회에서는 돈을 모은다는 것은 죄악이었으나
이 가치를 정면으로 부순 것이 바로 대량생산 사회였다
대량생산을 하기 위해서는 노동자가 필요했고 노동을 위한 유혹은 돈이었다
이전의 삶의 방식을 고수하던 사람 그러니까
필요한만큼 벌고 자유롭게 살던 사람들을
게으름뱅이로 치부했고 이제는 돈을 모으지 않는 죄악이 된 것이다
그러니까 소유가 죄악이던 사회에서 소유하지 않으려는 태도가 죄악이 된 사회가 온 것이다
(오늘날처럼 하루8시간 일을 하는 형태가 대부분의 사람들이 당연하다고 생각하겠지만
사실 이런 삶의 양식이 정착 된 것은 산업혁명 이후이다 그러니까 불과 백년 이백년 밖에 지나지 않았다
자유롭던 사람들을 게으름뱅이로 치부하고 강제로 일을 시키기 위해 심지어 학살조차 있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들은 거의 없다)
그러니까 자본주의 사회에서 권하는 "소유"라는 개념이 사람들에게 강렬하게 주입되었고
에리히프롬이 지향하는 가치인 "존재"의 사랑이 양립하기 어렵다는 말이다
간단히 말하면 인간이 수단인가 목적인가로 정리 될 수 있을 것 같은데
그러니까
마르크스가 말한 인간소외라는 개념은
목적으로서의 인간(이 노동으로 인한 보람 자아실현 등)이 아니라
(노동력 제공의)수단으로서의 인간이 된 것을 말한 것이고
에리히 프롬이 말한 존재와 소유는
목적으으로서의 인간(존재 그 자체로 사랑하는)이 아니라
수단(내가 가질 수 있는)으로서의 인간이 된 것을 의미한 것이고
사랑의 기술도 내가 볼 때 맥락이 같은데
사랑을 받는 것 소유하는 것에 사람들은 대부분 관심 있어 하지만
본질적으로 사랑이라는 것은 주는 것에 있고 이 기술을 배워야 한다는 것이 책의 요점인데
전자의 사람이 하는 사랑은 내가 사랑이라는 것을 받기 위해서 그러니까 "소유"하기 위해서
저 사람이 나에게 얼마나 많은 사랑을 주는가를 통해서 사랑이 이루어지는 것이고
여기서 중요한 것은 "저 사람"이 아니라 저 사람이 나에게 주는 "사랑" 인 것이고
결국 목적은 사람이고 수단은 사랑이 되는 것이다
후자의 사람이 하는 사랑은 내가 누군가를 사랑하기 때문에 내가 능동적이고 자발적으로
내가 주체가 되어서 그 사람을 사랑함(사랑하는 행동을 하는) 것인 것이다
썸이라거나 어장 관리라거나 그린 라이트라는 신조어들도 다 곰곰히 생각해보면
(나는 사랑과 관련 된 대부분의 신조어들을 다 싫어한다)
애초에 사랑이라는 것이
주는 것보다 혹은 존재 자체가 아니라
받는 것 그리고 소유와 관련 된 것이라고 보는 시각에서 다 나온 말들이다
그러니까
내가 사랑을 지금 올바르게 받고 있나?에 관련 된 질문인 것이다
내가 지금 올바르게 사랑을 주고 있나?에 관련 된 신조어는 왜 없을까?
당연히, 거의 모든 여자들은 나와의 잠자리를 위해서 연애하자는 남자를 싫어하고
거의 모든 남자들은 오직 내 돈을 위해서 연애하자는 여자를 싫어한다
왜냐하면 나라는 대상이 목적(노동의 주체나 자아실현. 존재)가 아니라
잠자리나 돈을 위한 수단(노동력 제공. 소유)이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모든 사람들은 "목적"이 되고 싶어하지 "수단"이 되고 싶어하지 않는다
사랑의 3가지 요소에는 물론 열정도 포함 되고 이것 또한 사랑이고
심지어 귀족들의 열정적인 사랑처럼 오직 열정만이 사랑이라고 생각하던 시절도 있었다
그러나 심리학적으로나 정신건강의학적으로 볼 때
누군가를 보고 강렬하게 빠져드는 것은
그전까지 극도로 이 사람이 외로웠다거나
혹은 의존성 성격장애 혹은 경계선 인격장애 혹은 연극성인격장애
등의 성격 장애도 이런 강렬하게 빠져드는 양상을 보이기도 하고
그 외에도 관계 중독이라거나 불안정 애착을 가지고 있었다는 말이기도 하다
(반드시 그렇다는 말은 아니다 건강하게 정신건강한 사람도 누군가에게 강렬히 빠질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인간은 본능적으로 자신과 유사한 유전자를 가진 얼굴에 끌리고 호르몬의 영향도 무시 할 수 없다)
그리고 다시 말하지만 내가 쓴 제목을 보면 사랑을 하고 있을 때가 아니라
사랑을 시작 할 때라고 분명히 적었는데
내가 사랑을 시작하려고 할 때에 나는 저 사람이 없으면 도저히 못 살 것 같은 경우는
물론 정말로 첫눈에 반한 경우도 있겠지만(다시 말하지만 이런 상황이 반드시 나쁘다는 것이 아니다)
내 안의 구멍 그러니까 불안감 외로움 허무감 혹은 자립심이 낮다거나 자존감이 낮다거나
하는 구멍을 저 사람이 채워주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누군가가 없으면 도저히 못 살 것 같은 사람은 바꿔 말하면
나는 혼자서는 살아 갈 수 없는데, 저 사람이 있어야만 살아갈 수 있다는 말이고
그렇다면 저 사람은 내가 살아가기 위한 "수단"이 되는 것이다
에리히프롬은 좋은 사랑을 하기 위한 조건 중에 하나로
음악을 듣거나 TV를 틀지 않고 조용히 고요히 혼자서 있을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말을 했는데
혼자서도 불안해하지 않고 건강하게 있을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말이고
그리고 뭔가에 초조하게 쫓기지 않을 수 있는 건강한 정신상태
한번 더 꼬아서 생각하면 소유에 쫓기지 않는 상태
(보통은 바쁘게 살던 연예인이 힐링 프로그램에 가서 막상 할일이 없으면 못 견뎌하고 초조해한다
그러니까 일종의 일 중독 그러니까 소유에 대한 중독인 상태인 것이다)
그리고 사랑이라는 것은 고도의 집중력을 필요로 하는 작업이고 따라서 일종의 집중력 향상 훈련
이렇게 세 가지 맥락 정도로 "나는" 해석한다.
그러니까,
상대를 전혀 필요로 하지 않을 때, 라는 말은 상대방이 어떤 목적이 아닐 때, 로 바꿔 읽어도 좋을 것 같다
물론 나도 불안형 연애고 외로움을 많이 타는 사람이다
이런 외로움을 벗어나고 싶어서 심리학을 공부하게 되었다
에리히 프롬 말이 다 맞다고 생각 안하고 진리라고 생각 안하고
저렇게 살려고 나도 노력은 하지만 저렇게 살지 않았을 때도
그러니까 오히려 나의 공허감 때문에 아름다운 사랑을 했던 적도 있다
인간은 불완전하므로 완전함을 지향하는 것 자체가 아름다운 것이지
당신이 지금 불완전한 연애를 하고 있다고 해서 틀렸다거나 잘못되었다고 비판 할 생각은 없다
나는 대학생 시절 에리히 프롬의 책을 보고
진작 이 책을 읽었더라면 내 인생이 바뀌었을 것이란 생각을 했다
사랑을 하려는 젊은 분들에게 추천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