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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 살해는 김재규 명예 혁명이었다" |
<단독 인터뷰> 김재규를 끌까지 변호했던 강신옥 변호사 |
1980년 5월24일, 당시 박정희 대통령을 살해했던 김재규가 사형된 날이다. 김재규 사후 27년이 흘렀다. 그에 대한 재평가는 아직도 살인자냐, 독재의 사슬을 끊은 혁명가냐는, 엇갈린 논란이 계속되고 있다. 김재규의 변호를 담당했던 강신옥 변호사(72세. 전 국회의원)는 김재규의 재평가에서 "의기(義氣)가 있는 이 나라의 의인(義人)"라고 평하길 주저치 않는다. 기자는 4월26일 아침 7시부터 9시까지 서울 서초동 법원 뒤뜰의 벤치에서 강변호사와 야외 인터뷰를 가졌다. 강변호사는 "당시 한국의 민주화 운동에 관심을 기울이고 일면 투쟁해온 가톨릭 김수환 추기경은 박정희를 살해한 김재규를 좋게 보는 발언을 했다."고 전제하고 "성직자로서 사람을 죽인 것을 두둔하지는 않았지만, 의로운 일을 했음을 시사하는 말을 많이 했다. 김수환 추기경은 자신의 목숨을 바쳐가며 독재와 유신의 사슬을 끊어준 김재규의 행동을 높이평가 했다."고 털어놓았다. 다음은 강신옥 변호사와의 인터뷰 내용이다. -김재규의 변호를 어떤 경유로 맡게됐나? ▲1979년 10.26 사건으로 박정희가 사망했다. 민주화운동을 했던 나로서는 원하는 바 였다. 소원을 풀었다. 박정희를 살해한 김재규 당시 중앙정보부장은 시저를 살해한 부르터스와 같은 인물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던 차에 박선호 가족들이 나를 변호사로 선임했다. 그 뒤 가톨릭 김수환 추기경 쪽의 사람들이 나를 찾아와 "김재규를 도와달라"고 요청했다. 그래서 나를 비롯해 황인철, 홍성우, 이동명, 임광규 변호사 등이 김재규의 공동변호를 맡게 됐다. 그후 자원 변호사 20여명이 김재규 변호를 하겠다고 나섰다. 일부 변호사들은 자신의 인기관리를 위해 자원변호사를 자청한 이들도 있었다. 김재규가 이 점을 눈치채고 변호거부를 선언했다. 김재규는 "나 혼자서도 혁명의 정당성을 말할 수 있다"고 했다. 그러나 나는 박선호 변호인이었기 때문에 1심을 마칠 때까지 김재규의 재판에 참관할 수 있었다. 집권욕보다 애국심이 강해 -일반에게 잘 못 알려진 김재규의 면모는? ▲김재규의 1심 최후진술은 변호사가 작성한 것이 아닌, 김재규 스스로의 변론(웅변)이었다. 김재규가 30분간 말로 한 것을 내가 외부에 알렸다. 항소심에서 김재규는 나에게 변론해줄 것을 요구했다. 그래서 나는 황인철, 이돈명 변호사 등과 함께 대법원까지 김재규를 변호했다. 당시 군부는 김재규를 집권욕을 가진 이로 치부했다. 대통령을 하고 싶어 쿠데타를 한 것으로 몰아갔다. 물론 그렇게 볼 수도 있다. 그러나 김재규는 내가 볼 때 박정희를 죽이고 권력을 빼앗아야겠다는 생각을 가진 이는 아니었다. 집권욕 보다는 애국심이 강했다. 박정희가 살아 있는 동안 이승만과 다르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박정희는 부마사태 때도 직접 발포명령을 내리겠다는 입장을 고수하고 있었다. 이런 차제에 김재규는 유신철폐를 위해 박정희를 살해할 수밖에 없다는 결론을 내렸다. 그렇지 않으면 유신으로 인해 수많은 국민이 희생될 것을 예상했다. 김재규는 그렇게 내다보고 박정희를 제거했던 것이다. -김재규의 박정희 대통령 살해와 전두환 집권은 유관 관계는? ▲전두환은 김재규가 쏜 총탄 속에서 집권했다. 김재규가 박정희를 살해한 10.26 사건에 대한 정보를 가장 빨리 입수한 곳이 당시 보안사였다. 보안사가 김병수 국군통합병원장과의 통화로 코드 원(1=대통령)이 살해됐다는 정보를 입수, 선제공격을 취했다. 보안사는 김재규를 체포하고, 언론을 통제하면서 김재규의 행동이 선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국민들에게 주지시켰다. 차지철에 대한 질투의 결과물로 포장했다. 또는 내연의 여자가 있었다, 돈을 많이 먹었다는 등의 여론조작으로 김재규를 형편없는 놈으로 만들어 갔다. 추잡한 동기로 대통령을 살해했다는 것이었다. 욱! 하는 우발적인 사건이었다는 것도 부각시켰다. 당시 전두환 합동수사본부장이 이 내용을 발표했다, 결국 전두환은 김재규의 혁명을 깔아뭉개고 집권했다. 10.26 당시 민심을 보면 박정희가 죽을 때가 됐다는 분위기였다. 그 무렵 신문을 보라. 김재규는 역사적으로 재평가 될 것이다. 12.12, 5.17 사건 등이 일어나면서 전두환 신군부가 강권을 휘둘렀다. 국민은 말못하고, 지식인들도 고개를 숙였다. 지내놓고 보니 전두환이 대통령 감이냐, 돈을 해먹고, 의기(義氣)가 김재규와 비교가 되나? 오히려 전두환이 지저분한 사람이다. 김재규 혁명 동기 순수 -김재규의 혁명동기는 순수했는가? ▲김재규는 순수했다. 일본의 사무라이들처럼 국가를 위해 자기 생명을 바칠 의기(義氣) 있는 이였다. 김재규는 사육신을 존경했다. 특히 사육신에서 빠진 김문기를 정보부장 때 복권시켰다. 자신이 죽을 자리가 여기라고 인식한 것이다. 지저분한 사람이 결코 아니었다. 김재규는 "내가 박정희에게 신세졌다. 그러나 그를 죽이지 않으면 유신이 철폐되지 않는다. 소의(小義)를 버리고 야수의 심정으로 유신의 심장을 쏘았다"고 말했다. 보안사에서는 김재규의 이러한 말들을 내가 만들어줬다고 보고 있었으나 그건 사실이 아니었다. 나는 김재규를 접견하는 첫날부터 그로부터 이러한 말을 들었다. 조준희 변호사는 김재규의 이 같은 말들을 듣고 눈물을 글썽인 적도 있다. 김재규는 진실한 동기로 독재자 박정희를 살해, 제거했다. 5.16 쿠데타 같은 욕심이 있은 것도 아니었다. 김재규는 자신이 혁명의 주인공이었다. 김재규는 박정희 시체 위에 올라서서 대통령이 될 사람은 절대 아니라고 했다. 학생들의 피해, 미국과의 관계, 안보 등을 고려해 박정희를 제거했다는 것이었다. -당시 신군부의 실세는 김재규에게 "박정희를 살해하고 왜 자살하지 않았느냐?"고 추궁했는데... ▲당시 신군부 실세는 김재규를 향해 "왜 박대통령을 죽이고 자결하지 않았느냐"고 따지듯이 말했다. 김재규는 뒤처리할 수 있는 이는 자신뿐이라고 말했다. 김재규는 "설거지를 하고 자결"할 생각이라고 말했었다. 국회 5공청문회 때 장세동을 심문한 적이 있다. 텔레비전으로 생중계 됐다. 당시 나는 "전두환이 김재규를 자결하지 않았느냐"고 따지면서 "김재규와 전두환 가운데 누가 더 훌륭한가?"라고 물었다. 장세동은 한사람은 대통령을 죽이고 한 사람은 대통령을 지낸 분이라는 의도로 말했다. 그래서 "자결해야할 사람은 김재규가 아니라 전두환이요."라고 말한 적이 있다. 박정희 살해사건으로 규정 -김재규의 10.26을 재평가 해준다면? ▲사람 생명의 가치는 대통령이나 서민이나 다를 바 없다. 대통령을 죽였다고 해서 반드시 사형시켜야 하나? 전두환은 김재규보다 훨씬 많은 사람을 간접적으로 죽였다고 생각한다, 김재규의 혁명은 박정희와 경호원 5명 등 6명을 죽였을 뿐이다. 그러나 전두환은 12.12, 광주사태 등에서 많을 국민을 희생 시켰다. 김재규의 10.26은 12.12, 5.16, 5.17 보다 훨씬 명예스러운 혁명이다. 김재규의 박정희 살해는 가장 명예스러운 혁명이다. 그리고 '박정희 시해 사건'이라고 하는데, 시해는 왕을 죽였을 때 쓰는 말이다. 나는 '박정희 시해사건'이 아니라 '박정희 살해사건'이라고 늘 말해왔다. -김재규 평가에서 섭섭한 게 있다면? ▲10.26 직후 사회적 분위기는 지식인 언론인들 사이에서 김재규를 좋게 평가했다. 그러나 5.17 이후 폭압정치로 인해 그 분위기가 바뀌었다. 권력이 김재규를 좋게 보는 것을 막았다. 이 점이 지금도 섭섭하다. 김재규 가족들은 "김재규가 박정희도 살리고 나라도 살렸다"고 주장했다. 박정희가 죽고 난 뒤 영웅처럼 됐다는 것이다. 김재규의 총에 죽었기 때문에 박정희의 죽음에 대해 국민이 애도도 하고, 국립묘지에 안장됐다는 것이다. -대법원 사형확정 판결 당시의 비화가 있으면 소개해달라. ▲김재규의 혁명은 성공했다. 유신이 철폐됐기 때문이다. 김재규 재판 당시 유태흥 주심은 절반은 성공했다고 말했다. 그러나 그는 "패장은 원래 사형 아니냐, 김재규는 패장이잖느냐?"고 했다. 그는 김재규에게 사형을 선고한 덕분인지 그후 대법원장이 됐다가 자살했다. 변호하며 신변위협 느껴 -당시 신군부는 김재규를 몹쓸 사람으로 몰아갔다. ▲김재규는 1980년 5월에 사형됐다. 그가 죽인 이후, 지난 28년간 김재규와 관련된 이렇다할 부정적인(네거티브) 정보는 없었다. 깨끗했다. 내연여로 알려진 A여인이 있었다. 그는 아들이 둘 있었다. 김재규의 아들이라고 우겨, 유전자 검사까지 했다. 김재규의 아들이 아닌 것으로 판명됐다. 사형되기 전 김재규는 동생인 김항규의 아들을 양자로 지목했다. 만약 A여인의 아들이 김재규의 아들이었다면 왜 입적시키지 않았겠나? 동생인 김항규도 "형님 아들이었으면 왜 안 데려오겠나?"라고 말했다. -김재규를 변호해온 것 때문에 신변은 위협도 있었을텐데 ▲항상 위협을 느끼며 지냈다. 나는 김재규가 대법원으로부터 사형선고가 되는 날 보안사 지하실에 끌려갔다. 그래서 김재규가 사형되는 것을 보지 못했다. 5월 24일 보안사 지하실 텔레비전에서 김재규가 사형됐다는 뉴스를 들었다. 김재규의 변호사로서 5월15일 마지막 면회했다. -김재규가 살아 있다는 설도 있었는데... ▲미국 CIA개입설도 있었다. 그래서 김재규 사형 이후 미국에서 김재규를 보았다는 설도 나돌았다. 그러나 가족들이 김재규의 시신을 확인했다. 김재규가 살아 있다는 말, 그런 말은 말도 안 되는 말이다. -김재규의 재평가는 시간이 흐르면서 계속되리라 생각한다. 민주화 유공자로 신청했었는데 어찌됐나? ▲조준희 변호사(민주화보상심의위 위원장)에게 "김재규도 민주화 운동을 한 사람으로 해달라"고 부탁한 적이 있었다. 김재규는 의사이거나 민주화유공자라는 게 나의 생각이다. 가족들이 민주화보상심의위원회에 민주인사로 심의해달라고 신청했다.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은 왜장 이등박문을 살해한 안중근 의사와 같은 의사라는 관점에서이다, 통과되지 않자 가족들은 민주화 유공자 신청을 취하했다. 박정희 딸 근혜와의 악연 -김재규가 박정희를 살해한 이후 3김에 대하여 말해달라. ▲1979년 10.26이 일어난 이후 1980년 봄의 일이다. 김대중이 복권됐다. 복권된 이후 인권 변호사들을 집으로 초청했다. 신당 창당, 정치재개, 신민당 입당 여부 등을 묻기 위해서 였다. 나는 김대중에게 "정치를 할 때가 아니라 국민운동을 할 때다. 신민당에 입당하라. 그리고 김재규 구명운동을 해달라"고 요망했다. 김대중은 구체적으로 대답을 하지 않았다. 그들은 5.17 사태가 올지도 모르고, 집권야욕에 눈이 어두워 있었다. 당시 김대중, 김영삼, 김종필 등은 한결같이 허점을 보였다. -박근혜와 악연이 있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2002년 대선전 때 나는 정몽준의 대선 기획단장이었다. 당시 정몽준은 박근혜를 영입하려고 노력했다. 그래서 나와 정몽준, 박근혜가 테니스를 친 적도 있다. 당시 A라는 유명 여자 연예인이 이혼을 했다. 한 여성지 여기자가 나를 찾아와 "A연예인이 이혼을 했는데 박정희와 연관이 있느냐?"고 물었다. 그래서 김재규와 가진 면회노트를 꺼내 김재규가 말한 박정희와 관계한 여성 명단 가운데 A라는 여성이 끼어 있는지를 살펴봤다. 없었다. 이 여기자에게 김재규 면담 노트를 보여줬더니 돌아가서 "강신옥 변호사 입열다"는 제목 하에 박정희의 여자 리스트에 대한 기사를 썼다. 이 기사를 본 정몽준은 나에게 "박근혜에게 사과를 하라"고 수차에 걸쳐 요구했다. 나는 "뭘, 사과하느냐?"고 말했다. 결국 나는 스스로 정몽준 캠프를 떠나는 결정을 내렸다. 그때 명예롭게 나온 것이다. 나와 박근혜 간의 악연이기도 했다. 김재규는 수감 중에 가졌던 나와의 면회에서 박정희의 여자관계도 상세하게 공개했다. 수백명이었다. 김재규는 박정희의 도덕적 타락을 지적했다. 애국심 보다 집권욕이 강했다. 이것이 박정희가 비극으로 끝난 이유이다. -한국의 민주화 운동에 크게 기여한 가톨릭의 김수환 추기경은 김재규를 어떻게 평가했나? ▲당시 한국의 민주화 운동에 관심을 기울이고 일면 투쟁해온 가톨릭 김수환 추기경은 박정희를 살해한 김재규를 좋게 보는 발언을 했다. 물론 성직자로서 사람을 죽인 것을 두둔하지는 않았지만, 의로운 일을 했음을 시사하는 말을 많이 했다. 가톨릭 계통에서 김재규의 구명을 적극적으로 도왔다. 김재규는 죽기 전에 부인 김영희에게 "내가 죽으면 승려가 되라"는 유언을 했는데 김재규의 부인은 가톨릭 영세를 받았다. 아마 가톨릭에서 구명운동을 해준 영향 때문이라고 본다. 김수환 추기경은 자신의 목숨을 바쳐가며 독재와 유신의 사슬을 끊어준 김재규의 행동을 높이평가 했다. 그리고 김재규가 사형될 때까지 끝까지 도움의 손길을 주었다. 가족들이 추기경을 만나 구명을 요청할 때도 "할말이 없습니다"라는 짧은 말로 응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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