엊그제 모르는 번호로 전화가 한 통 오네요.
'나 xx인데, 너 내일 나와?'
아? 한달가량 사귀고 날 차버린 첫사랑님이 그런 걸 왜 묻지? 하는 순간 내일이 동창회 날이라는게 떠오르더군요..
능력도 재미도 없다고 차인지라서, 8개월가량을 열등감을 가지고 살다가 몇 주 전부터 정신차리고 열심히 살던 저지만, 막상 문자를 보니 상당히 기분을 주체 못하겠더군요. 그래도 참아야 하는 마음으로 보냈습니다.
저: '응, 나야 당연히 가지 ㅋㅋ 넌?'
xx: '너가서 안올거야 ㅋㅋㅋㅋㅋㅋㅋㅋ'
저: '별로 신경안쓰니까 그냥 와~'
xx: 'ㅋㅋ 알았어'
이렇게 문자를 주고받고, 마침 친구랑 마시던 술도 다 먹었기에 집에 갔습니다.
근데 집에 가는 길이 왜 이리 멀던지..
차인이후, 1년가량 연락한번없었고 길거리가다 제가 인사했음에도 아는척도 안하고 그냥 가던 년이 이제 와서 이런 문자를 보낸다는게 너무 괘씸한겁니다. 그래서 오지말라고 할 생각으로 몇통 더 주고 받았습니다.
저: '아니다, 솔직히 말하면 너 오는거 불편해.'
저: '그리고 무슨 염치로 지금 이시점에 바뀐 문자로 그런 내용을 보내냐 ㅡㅡ'
걔: '하면안돼? 나한테도 넌 추억이야. 그리고 친구한테 연락도하면안되냐? 그리고 나 내일 완전 친한척할꺼임!'
... 이년이 나를 가지고 장난하나 ㅡㅡ 남의 소중한 첫사랑을 망쳐놓고 그딴소리를 지껄이다니.. 아니 중간중간 연락이라도 했으면 말도안하겠는데, 번호 바꼈다고 문자한통보낸적없고 안부물어본적도 없는년이 ㅡㅡ
저: '그런소리지껄이는것조차 이젠 놀랍지도않다 ㅡㅡ 난 내일 완전 깔거니까 그렇게 오던가'
걔: '알았어ㅋ완전무장하고갈께ㅋ'
저: '응♥내일봐~'
술기운이 거나해서 그런지, 그날 밤은 잠이 잘 안오더군요..
다음 날 일어나서 하루종일 걔 생각만 했습니다. 어떻게 하면 통쾌히 복수할수있을까 고민했죠.
'오랜만이다? 그때 나 버리고 만난 남잔 잘 지내?
'니가 어케아냐고? 너 남자친구없는적이 없었잖아'
'그 남자는 돈 잘버나봐? 얼마 벌어?
'정말? 나한텐 나중에 월 500만원 벌라고했잖아. 그것도 사귄지 이틀만에'
'나랑 만난 한달. 실질적으로 본 2주일. 그중에서 열흘은 돈 얘기만 하더니 요즘도 그래?'
'나 몸매 안좋다고 말하기전에 너부터 몸매 좋아야 하는거 아냐?'
복수의 말을을 생각하니 시간이 금새 흐르더군요.
드디어 시간은 저녁 6시. 약속 시간입니다.
동창회 사람들이 하나둘씩 모이고 이런저런 이야기를 꽃 피울 무렵 그녀가 오네요.
1년을 정말 증오속에서 살았지만, 4년을 좋아했던 기억이 있어서 그런지 여전히 제 눈엔 예뻐보이더군요.
하지만 예쁘면 뭐합니까. 돈밖에 모르는 여자애인데. 남의 소중한 첫사랑을 망친 나쁜년인데..
처음엔 아무말도 안했습니다. 일부러 멀리 앉아서 눈도 안마주치고 다른사람들과 신나게 놀았습니다.
워낙 말을 잘하는 애라서 잘 갈굴 수 있을까 걱정이 많이 되더군요. 하지만 상관없습니다. 제가 개 찌질이로 보이더라도, 동창회에 다신 못나올 정도로 보이더라도, 어떻게 해서든 그년의 기분을 상하게 만들고 싶었습니다. 그게 제가 유일하게 할 수 있는 복수라고 생각했거든요.
1차는 그렇게 끝내고 2차로 자리를 옮겼습니다. 제 옆옆 자리에 있더군요.
이런저런 얘기를 하고 이제 슬슬 말해야겠다고 하는 순간 그녀가 제 옆의 선생님께 큰 소리로 말합니다.
'선생님~ 저 내년에 결혼해요 ㅎㅎㅎ'
.......??
??
????????
뭐? 결혼이라고? 그 남자랑?
순간 전 아무말도 할수 없었습니다.
주위 아무것도 보이지 않더군요.
결혼을 준비하는 여자애에게 과거의 일들을 들이키며 동창회에서 망신을 주는 일을 할수 없었어요.
아.. 결혼이라니.. ....
준비해갔던 말들은 생각나지도 않았습니다.
그러고 결국엔 둘이서 술 잔 부딪히며 결혼축하한다고 말했습니다.
그녀가 웃네요. 왠지 모르지만 저도 따라 행복해집니다.
나중에 저보고 '넌 꼭와'라고 문자를 보내네요.
'남의 소중한 추억 망쳐놓고 꼭 오라고? 안갈거야 ㅋㅋ 축하하고 행복해'
그러고는 술을 왕창먹어서 필름이 끊겼습니다.
아니, 사실 술을 많이 먹지는 않았지만 우울해진 생각들 때문에 더 안들어가더군요.
필름이 끊겨도 집에 돌아가는 성격이기에, 비틀비틀 집에 가는 길에 내내 웃었습니다.
허망해서 웃는건지, 행복해서 웃는건지 그건 저도 모르겠습니다. 술 때문에 정신이 없거든요..
그렇게 제 2010년 동창회는 끝났습니다.
그와 동시에 1년간의 증오도, 4년간의 짝사랑도, 그녀를 생각했던 많은 나날도 끝났습니다.
약간의 해방감과 함께 기분이 묘하네요. 하지만 이런 일들이 있기에 인생이 재밌는 것 같습니다.
재미없는 끝까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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