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타깝게도 나는 술버릇이 없다.
라고 말하고 싶지만, 술버릇이 있는 편이다.
나의 술버릇은 말이 많아지는 데, 총으로 비유하자면 평소에는 나의 주둥이 조준간은 단발 상태인데, 술이 조금 들어가 적당히 취하면
반자동, 그리고 취하면 조준간이 자동으로 바뀌어 쉴 새 없이 말을 한다고 한다.
단발 상태_'술', '안가', '무서' 등 말을 처음 시작한 2세 아기 수준의 언어 구사
반자동 상태_'술 줘', '집에 안 갈래', '와이프 무서워' 등 5~6세 정도 어린이 수준의 언어 구사
자동 상태_'하이트 진로에서 생산 및 판매하는 소주의 상품명인 참이슬을 한 잔 더 주지 않을래?', '오늘은 국가가 내게 허락한 유일한 마약인
술을 마시라고 허락받은 날이야 벌써 이런 이른 시간에 집에 갈 수는 없지,' '너 테니스 했던 와이프한테 맞아본 적 있어? 포핸드로 맞을 때보다 백핸드가 더 아파. 손등뼈에 힘이 실려서 예상하지 못한 방향에서 날아오거든, 게다가 민첩해서 내가 도망갈 수도 없어, 도망가려 하면 한 손으로 내 손목을
잡고 때리곤 하지. 무서워 덜덜덜.' 등 찌질하고 겁 많은 수다쟁이의 언어 구사
나의 술버릇을 아는 친구들은 반자동 상태가 되면 알아서 나를 집에 보내거나, 술집에서 끌고 나와 술 깨라고 견디셔를 강제로 마시게 하곤 한다.
한 번은 친구가 술을 마시다 제대로 취한 나의 상태를 녹음한 적이 있는데, 나중에 술에서 깬 뒤 들었을 때 중저음의 목소리가 은근히 감미롭기는
커녕 무슨 쓸데없는 말을 그렇게 많이 하는지 민망했다. 그리고 그 날 녹음된 술 취한 내가 친구에게 이야기했던 것은 고라니, 노루, 사슴의 차이점
이었다. 제정신에는 기억나지 않는데 술 취하니 나는 소목 사슴과의 동물들에 대한 전문가가 되어 있었다. 친구에게 왜 우리가 소목 사슴과의 동물들
이야기를 하게 되었냐고 물어보니....
"요즘 셀프 인테리어가 유행이잖아. 그래서 이번에 우리 딸 방 페인트칠 새로 해주려고.." 라고 친구가 말을 시작했을 때 갑자기 내가
"페인트는 노루 페인트지! 상표도 친환경적으로 동물이야. 그런데 너희 노루하고 사슴, 고라니 차이를 알아?"
그 뒤 주절주절 '고라니 썩을 놈' 등이 섞은 소목 사슴과 동물들에 대해 친구들에게 나열했다. 부끄러웠지만 해박한 동물상식을 가지고 있는 내가
은근 뿌듯했다. 하지만 문제는 멀쩡할 때는 전혀 기억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술을 마시고 큰 실수는 하지 않는 편인데, 내 인생에서 잊지 못할 실수는 한 번 있다.
지금처럼 더운 여름의 어느 날 갓 제대하고 몸 상태만은 인생의 절정이던 그 시절, 한 친구가 제대한 날 친구들과 모여 술을 마셨다.
하지만 몸 상태는 절정기였지만, 경제 상태는 빈손으로 태어났던 그 시절과 비슷했던 시기여서 우리는 부족한 술을 마시기 위해 한 친구의
집으로 향했다.
친구의 말로는 부모님께서 강원도로 여행을 가셔서 우리끼리 마음대로 술을 마실 수 있고, 친구 아버지께서 약 5년 전에 담그신 인삼주를 몰래
맛보자고 했다. (친구에게 인삼주 마시다 걸리면 어떻게 하느냐 물었을 때 녀석은 마신만큼 소주 부어놓으면 표시도 안 난다면서 우리를 안심시켰다.)
친구 넷이 가진 돈을 합쳐 소주 20병과 컵라면 2개 그리고 새우깡 한 봉지를 샀다. 하지만 녀석의 집에는 몸에 좋을 것 같은 인삼주와 냉장고라는
든든한 안주 창고가 있었다.
밤새 술 마시며 우정을 확인하자며 현관문을 연 순간 근엄한 표정의 아니 뭔가 분노에 찬 시선의 친구 아버지께서 TV를 뚫어져라 보고 계셨다.
"야.. 부모님 여행 가셨다면서?"
"아침에 두 분이 출발하신 거 보고 나왔어. 근데 왜 여기 아버지가..."
녀석은 당황했지만, 바로 아버지와 대화를 통해 상황 파악에 나섰다.
"아버지, 오늘 계원들하고 강원도 여행가신 거 아니에요? 2박 3일이라면서요?"
"...." 아버지께서는 아무 말씀도 없었다. 그리고 바로
"술 마시려면 친구들 네 방으로 데려가서 조용히 마셔라."
우리는 조용히 친구 방으로 들어갔고, 정확한 진상 조사를 위해 친구는 아버지와 잠시 대화를 한 뒤 들어왔다.
"두 분이 관광버스 안에서 엄청나게 싸우셨데. 그래서 어머니께서 도중에 집에 간다고 하셨는데, 아버지께서 그러면 가라고 했더니 어머니께서
진짜 집으로 오시고, 아버지도 집으로 오셨나 봐. 어머니는 화나서 지금 방에 계시고, 아버지는 거실에 계시고.."
"야.. 우리 그냥 갈까? 분위기도 그런데..."
"그냥 조용히 마시자. 아버지께서 친구들 왔는데 치킨 시켜먹으라고 돈도 주셨어."
절대 치킨 때문에 남은 게 아니었다. 친구 아버님의 호의를 거절하면 그것이 바로 불효라고 생각했다.
우리는 조용히 소주 20병을 마시며 서로의 군 생활에 대해 이야기했다. 이 자식들.. 군대에서 간첩 잡은 거 빼고는 다 해본 것 같다.
역시 남자는 군대에서 뻥만 늘어서 온다는 것을 느끼며 나도 군대에서 고든 램지와 요리 대결을 펼쳤다는 이야기를 하려는 찰나 나는
나도 모르게 술에 취해 잠이 들었다.
그리고 다음 날 아침 지끈거리는 머리를 잡고 눈을 떴는데, 내 눈앞에 친구 아버지께서 주무시고 계셨다. 심지어 하나 밖에 없는 베개도 내가
베고 있었다. 내가 왜 거실에 있지? 하는 생각과 빨리 친구 방으로 복귀해야겠다는 생각밖에 없었다. 그리고 베개를 뺏은 죄송한 마음에
아버지의 머리를 살짝 들고 베개를 놓아드리려는데, 아버지께서 눈을 감은 상태로 "그냥 너 베고 자라.." 라고 말씀하셨다.
"저.. 아버지 들어갈게요." 나는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그냥 여기서 자라. 방에 애들도 많은 데' 아버지의 목소리는 부드러웠지만 완고하셨다.
"네. 주무세요. 아버님"
잠이 올 리가 없었다. 가뜩이나 부부싸움을 하셔서 심기가 불편하신데, 아들 친구놈에게 잠자리까지 빼앗기고 아무튼 난 아버지에게 등을 돌리고
식은땀을 흘리고 있었다.
곧 친구 어머니께서 주방에서 아침을 준비하시는 소리를 듣고, 친구들이 한둘 씩 기어 나오면서 나의 불편한 아버지와의 동침은 끝나게 되었다.
친구들 말로는 새벽에 자고 있던 내가 벌떡 일어나더니 옷을 입고 집에 간다고 하고 나갔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다들 술에 취해서
'가거나 말거나...' 이런 식의 반응이었고, 거실에 계셨던 아버지의 말씀으로는 주무시고 계시는데, 갑자기 한 놈이 문을 열고 기어 나오더니 싱크대로
가서 수돗물을 벌컥벌컥 마시고 자연스럽게 소파에 앉아 에어컨을 켠 뒤 잠시 앉아 있다가 자연스럽게 아버지 옆에 와서 누웠다고 하셨다.
그때까지 아버지는 어둠 속에서 너무 자연스럽게 행동하는 내가 아들인 줄 알았다고 하셨다. 내가 옆에 누웠을 때 그제야 '내 아들놈이 아니구나.
내 아들치고는 키가 너무 컸어..'라고 생각하신 순간 베개를 빼앗기셨고, 잠꼬대하면서 잠든 내게 얇은 이불까지 덮어주셨다고 한다.
"죄.. 죄송합니다. 제가 어제 술을 너무 마셨나 봐요...."
"괜찮다. 뭐 잘 잤으면 됐지."
주무시는 데 친구 아들놈에게 봉변을 당하셨지만 웃으면서 '이놈 참 웃긴 놈일세..' 라고 하시는 친구 아버님이 대인배로 느껴졌다.
그 뒤 몇 번 녀석의 집에 놀러 갈 일이 있었는데, 그때마다 아버지는 내게 '다른 놈은 몰라도 너는 꼭 자고 가.' 라고 하신다.
그리고 친히 자신의 영역인 거실을 내게 내주신다.
그 날 술에 취한 나와 아버지 사이에 무슨 다른 일이 있었던 건 아닌지 걱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