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우리 외할머니는 올해 일흔 여덟이다. 해같이 맑은 열 여덟 살로부터 60년의 세월이 더 지난 나이. 더 이상 아침 드라마의 날렵한 김치 싸대기에도 눈도 하나 꿈쩍하지 않는 나이.
그녀의 취미는 담배피우기이다. 이것은 돌아가신 외할아버지가 그녀에게 가르쳐 준 이 세상의 흥미로운 일 중 하나이다. 피우는 담배의 이름은 「라일락」. 그래서인지 그녀는 말린 라일락처럼 늙었다.
라일락이라는 꽃 이름이 나와서 말인데, 그것의 꽃말은 ‘첫사랑의 추억’이다. 나는 이 사실을 한 소설을 통해서 알게 되었는데, 대충 이런 구절이었다.
남자주인공은 나무 밑에서 하염없이 자신을 기다리게 한 여자친구에게 “이게 뭔지 알아? 씹으면 첫사랑의 쓰라림을 느낄 수 있다는 라일락꽃이야. 어디 한번 맛 볼 테야?”라며 귀여운 투정을 부린다.
하지만 우리 할머니는 이제 투정을 부리고 싶어도 그것을 받아줄 할아버지가 없다. 그래서 그녀는 매일 앉은 자리에서 세 개비 정도의 라일락을 태운다.
2.
내가 그녀와 본격적으로 친해진 것은 스무 살 무렵쯤이었다. 계기는 이러하다.
하루는 외할머니 앞에서 엄마랑 대판 싸운 적이 있었다. 그러니까 3대가 모인 자리에서 2대와 3대가 싸우고 1대는 관전을 하는 난리도 아닌 상황이었던 것이다. 엄마는 나와 같은 집에 못 있겠다며 짐을 싸서 찜질방으로 나가버렸고, 나는 울분을 못 참고 씩씩대며 방에 틀어박혀있었다. 펑펑 울다가 세수나 하자는 생각에 거실로 나갔는데 할머니가 말을 걸어왔다.
“그래도 엄마한테 그러면 못 써. 대드는 거 아니야.”
나는 다시 억울해져서 할머니에게 하소연을 콸콸 늘어놓았다. ‘아니 그래도 엄마가 그렇게 말을 하면 안됐지. 막말로 이건 엄마가 잘못했어! 아빠한테도 다 이를 거야. 엄마가 나를 속상하게 했다고!’ 하지만 할머니는 귓등으로도 듣지 않은 채 계속“엄마한테 전화해봐. 걔가 이 추운 날 어디로 갔겠어.”라는 말만 했다. 그 말이 지겨워진 나는 그녀를 내 편으로 만들기 위해 최후의 한방을 날렸다.
“어휴, 딸이라고 편들어주지마요 할머니. 지금 내가 더 속상해. 게다가 엄마가 할머니 없을 때, 할머니 무식하다고 은근히 흉을 얼마나 봤는지 모르지? 맨날 '통닭'이라고 가르쳐줘도 '통닦'이라고 쓴다고 얼마나 놀렸는데!”
나의 이간질 작전은 성공했다. 그녀는 정확히 3초 뒤에 이렇게 이야기했다.
“그 년 미친년이네?”
갑자기 그 모든 분이 훅, 하고 풀렸다. 우리 엄마 욕을 해도 밉지 않은 사람은 그녀뿐이었다. 파삭파삭하게 늙어버린 할머니는 그 순간 엄청나게 사랑스러웠다. 그리고 할머니는 그 날 저녁, 더 이상 엄마에게 전화해보라는 말을 하지 않았다. 정말.... 내 스타일이었다.
3.
나는 지금 외할머니와 함께 산다. 아빠와 엄마는 고향에 있어서 우리는 가끔 단 둘이 탕수육이나 치킨을 시켜먹는다. 때로는 서로에게 새로 산 옷을 보여주며 품평회를 연다. (둘 다 서로에게 박한 점수를 주긴 하지만.)
하지만 바빠진 요즘에는 그마저도 하기가 힘들다. 그래도 나는 어쩌다 생기는 그녀와의 이야기 시간이 정말 즐겁다.
거의 대부분의 시간을 집에서 홀로 보내지만, 외할머니는 늘 끊임없는 화제 거리를 가지고 있다. 하지만 내가 제일 좋아하는 에피소드는 그녀가 지금은 돌아가신 외할아버지를 처음 만난 이야기를 할 때이다.
그 이야기를 할 때면 그녀의 눈동자는 돌아가신 외할아버지를 처음 만났던 열 여덟 살로 돌아간다. 태양처럼 빛나는 소녀의 얼굴로 돌아간다. 언젠가 스물 네 살에 찍은 할머니의 사진을 본 적이 있는데, 그때보다 지금의 그 모습이 훨씬 예쁘다.
그래서 나는 ‘사랑받은 사람의 얼굴은 저런 거구나’라고 혼자 생각한다.
4.
외할머니가 외할아버지를 처음 만난 건, 겨울의 개울가에서였다고 한다. 말이 개울가지 강원도 산골 마을의 한 빨래터였다. 할머니는 그날도 손을 호호 불어가며 빨래를 하고 있었는데, 직업군인이었던 할아버지는 휴가를 나와 그 모습을 보고는 그녀에게 첫눈에 반했다고 한다. 그래서 그때부터 할머니를 그렇게 쫓아다녔다.
“아 진짜? 할머니도 그렇게 싫지는 않았나보네? 난 너무 그러면 부담스럽던데... 그럼 할머니는 외할아버지한테 언제 반했어?”라고 물었더니, 그녀는 눈동자를 반짝이며 이야기했다.
“하-얀 겨울에 눈이 펑펑 오던 날 나를 보겠다고 그 눈길을 헤치고 운전을 하고 온 거야! 군복을 딱 갖춰 입고! 그리고 내게 와서 이렇게 멋지게 경례를 탁! 하는데, 어우 세상에! 그게 너무너무 멋진 거 있지!” (그리고 이 구절이 끝나면 그녀는 꼭 박수를 친다.)
사실 아름다운 이야기는 여기까지인 줄도 모른다. 그 뒤로는 흔한 말로 산전수전공중전의 결혼생활이었다. 할아버지가 친구들과 놀다가 한 달 월급을 탕진해버렸는데, 알고 보니 그 돈을 할머니 모르게 시댁에 주었던 것이었단 이야기. 막내 삼촌이 워낙 억세서 밥 먹을 때는 공중에 묶어두고 밥을 먹어야 했다는 이야기. 엄마가 고대국가의 마한,진한,변한을 못 외워서 할아버지한테 꿀밤을 무지 맞았는데 그걸 보고 할머니의 마음이 아팠던 이야기.
하지만 과거의 이야기를 하는 그녀의 눈은 늘 아름답다. 그 시간만큼은 수줍은 아가씨가 된다.
5.
“나는 다시 태어나도 조용기랑 결혼할거야”
어제 그녀는 내게 뜬금없이 저런 이야기를했다. 다시 태어나도 외할아버지와 결혼할 거라고. 나는 박장대소하며 “할아버지도 그걸 원할까? 과연?”하고 그녀를 놀린다.
그러자 외할머니는 웃으며 “그거야 모르지. 근데 나는 그럴 거야. 그 양반이 싫다면 어쩔 수 없지만, 뭐.”라고 말한다.
할머니는 할아버지가 돌아가신 이후로 스물 네 해를 홀로 지냈다. 언젠가 내가 “재혼 왜 안했어?”라고 물으니, 쿨 하게 “귀찮아서”라고 대답하셨다.
“할머니 쿨 하네”
“쿨이 뭐야?”
“시원시원 하다는 거야”
“그래? 좋은 거냐?”
“응. 좋은 거야.”
그러나 나는 안다. 할머니는 할아버지로써 충분했다는 걸.
평생 한 사람만을 위한 마음으로 살아가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하지만 그녀는 그 추억으로도 충분하다고 말한다. 그거면 됐다고. 그리고 다음 생에서도 그와 결혼하고 싶다고.
한 사람만을 마음에 품은 여자의 눈은 아름답다. 순정을 아는 남자의 눈도 그럴 것이다. 추억을 회고하는 일흔 여덟은 여전히 독야청청한 청춘이다.
그리고, 나는 오늘도 그녀에게서 사랑을 배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