때는 고등학교 3학년.
학교에 교생실습을 하시러 교생선생님들이 오셨다.
예전에는 교생선생님께서 담임 선생님 역할도 하셨는데
인문계 고3은 수험생이라 괜히 마음 들뜨지 말라고
담임을 맡으시진 않으셨다.
국영수사과 주요 과목 교생 선생님들도 오신 거 같은데
수능 과목인 국영수사 (나는 문과였으니) 수업은 교생선생님이 들어오시지 않았던 모양이다.
19살 한창일 나이. 교생선생님이었다고는 하지만 선생님보다는 이쁜 누나로 밖에 안 느껴졌던 그 때
그러나 고3 이었던 탓에 교생 선생님과의 교류는 전혀 없었다.
햇볕이 쩅쨍 내리쬐던 등교시간과는 달리 비가 주룩주룩 내리기 시작하던 3교시.
마음도 신숭생숭. 책도 눈에 안 들어고 왠지 아픈 듯한 배.
이미 마음은 하굣길
조퇴를 맞고 학교 밖을 나섰던 4교시 끝자락.
학교 문 앞에 서자 그제야 들었던 생각
'아 맞다, 우산'
반에 친구들 우산이 있지 않을까 하는 마음에 되돌아가려는 찰나
'우산 없어요? 비 많이 오는데...'
이뻤다. 진짜로 이뻤다.
우산을 빌려준다던 그녀를 따라 교무실로 향하는 길
'몇 학년이에요? '
'3학년입니다'
'아이고~ 힘들겠다. 그치?'
'네'
'그래도 조금만 고생해요~ 조퇴하는 거 보니 아픈가 보다. 몸 관리 잘하고'
'네'
반말과 존댓말을 섞어 쓰던 그녀
나의 짧은 대답과 유난히 저음이었던 내 목소리
내 모습은 밖의 날씨처럼 우중충했을지 몰라도
내 마음은 화창한 4월의 봄날
'이거 쓰고 가요! 글고 내일 꼭 좀 전해주고! 내 자리 여기에요~ 기억해요? '
'네'
감사하다는 말 조차 제대로 하지 못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참 긴장했었나 보다.
중학교, 고등학교 모두 공학을 나왔지만
중학교 때 까진 운동선수를 하느라 여자 뿐만 아니라
반 친구들과도 교류가 거의 없었고
고등학교 때는 남녀 교실이 건물 자체가 달라서
등하교와 식사시간이 아니면 마주칠 기회가 없어
원래 아는 여자애가 없으면 더 이상 알아갈 기회도 없었다.
다음 날, 조금 일찍 집에서 나와 집 앞 편의점에서 초콜렛 하나와
매점에서 파는 조그만 카드를 샀다.
고맙습니다와 심심한 멘트,
그리고 나의 학번을 적고 초콜렛을 함께 들고 교무실로 찾아갔다.
자리에 없다
사실 뭐 교생선생님 전용 자리도 아니고 임시로 만들어 놓은
큰 책상에 개인 짐들 올려놓고 쉬는 시간에 잠시 앉을 수 있는 그런 자리.
한 5분 서성이다 책상에 올려두고 나가려는 차
'어? 안녕하세요'
'아...그 우산.. 어제'
'아 진짜? 고마워요 좀 웃고다녀요 아파서 그래?'
'아...네'
'수업 잘 들어요~ 화이팅!'
문득 눈에 들어온 손에 들고 있는 영어 교과서
그녀의 담당 과목은 영어인가 보다.
그 후로 한동안 교류가 없었다.
그럴 수 밖에 없는 이유가 그녀의 교무실은 2층 내 교실은 5층
매 시간 마다 가던 매점과 운동장도
고3이 된 후 쉬는 시간에 친구들은 부족한 잠을 채우기 바빴다.
물론 나는 아니었다. 공부에 관심이 없던 탓에 그냥 이리저리...그랬다.
수업시간에도 도서관에서 빌린 책들을 읽는 게 전부였다.
공부에 관심이 없던 학생이 책은 왜 잘 읽냐고?
어릴 적 유난히 운동을 하는 걸 반대하던 부모님
운동을 시켜주시는 조건으로 일주일 2권 씩 독서하기 약속을 했다.
어릴 적엔 꾸역꾸역 2권 씩 읽고 독후감 쓰던 것이 익숙해져
독서는 내게 낯설지 않은 존재가 되었다.
공부는 하지 않아도 책 읽느라 남아있던 야자시간
친구들 꼬셔 담배 한 대 태우러 나가자고 했다.
안 간댄다.
학교 앞 공용주차장.
어찌어찌 하여 선생님 몰래 담배 두 개피와 라이터와 억지로 친구를 들고 나왔다.
하얀 마티즈 뒤에 숨어 한 대 태우고 두 대 째 다 태워갈 때 쯤
또 그녀를 보았다.
이뻤다. 진짜로 이뻤다.
아무리 교생이라하지만 선생님께 흡연하는 모습을 걸렸는데 당황하지 않았을까
그 만큼 그녀가 이뻤던 걸까
아니면 교생일 뿐이라 생각했던 내 건방진 생각때문일까
둘 중 한 가지 이유일 수도 있겠지만
인문계학교였지만 흡연하는 학생이 많다는 사실은 선생님들도 잘 알고 있었고
3학년이 된 후로 3학년은 흡연을 걸려도 압수와 훈계 정도 차원에서 끝난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
더군다나 교생 선생님인데 잘 말하면 선생님께 일러바치진 않겠다... 그렇게 생각했다.
현실은 시궁창
핸드백을 목에 걸고 오른손엔 내 볼 왼손엔 내 친구 볼따구를 꼬집고 50m 쯤 되는 주차장 ~ 학교 거리를
가녀린 여대생이 혈기왕성한 고등학생 둘을 끌고 갔다.
둘은 아무런 저항도 안 했다.
둘 다 교생이지만 선생님한테 대들 깡따구도 없을 뿐더러 너무도 당황하여 아무 것도 할 수 없었다.
평소완 다르게 엉덩이를 3대씩 맞았다.
교생선생님께 원망스런 마음보다 멋있다 생각했다.
그 때부터 그녀를 좋아했던 거 같다.
다음 날, 저번처럼 조금 일찍 집에서 나와 초콜렛과 카드 한장을 샀다.
'선생님, 죄송합니다. 30631 OOO'
그래, 마음 잡고 열심히 공부해 라는 말 보다 먼저 나왔던 그녀의 말
'미안해,,, 어제 안 아팠어? 엄청 쎄게 때리시던데...'
그녀는 천사가 분명했다.
그 날 이후 난 시도 때도 없이 2층을 서성이다가 그녀를 만나면 인사를 하곤 했다.
그게 다였다. 딱히 그녀에게 말을 건다거나 찾아갈 변명거리가 없었다.
그녀를 만난 4월, 그 끝자락 즈음에 고등학교 입학 이후로 진지하게 풀어봤던 모의고사
학교 시험은 성적에 들어가는 탓에 적어도 시험에 대한 예의는 지켰지만
성적에 들어가지 않는 모의고사를 치는 날은 그냥 평소보다 좀 더 자는 날이었다.
모의고사 성적이 아직 나오지 않았던 4월 말,
그녀는 교생실습을 마무리 했다.
그래도 일부러 할 일 없이 2층을 내려가서 우연히 마주친 척
매점에서 사다온 초코렛과 젤리, 사탕을 주고 받은 정이 있었던지
교생 실습이 끝나는 하루 전 정규 수업이 마친 쉬는 시간
애들이 대부분 교실 밖을 빠져나갔을 때 명언과 짧은 인사말이 적힌 카드와
그녀가 주고 간 초콜릿.
슬펐다, 꽤나
그 후로 공부를 시작했다.
4월에 쳤던 모의고사 성적이 나왔다.
1 7 6 7 7
매 번 반에서 언어영역 뿐만 아니라 전과목 1등을 하던 녀석이 언어영역 2등을 했다고 난리가 났다.
애들도 더 불어 누구냐고 한 명 한 명 찾아다녔다.
내심 기대하며 내 성적표를 보여주려고 준비하고 있었다.
나한텐 물어보지도 않았다.
씨발
그녀는 교대가 아니라 사범대를 다니고 있다는 사실을 6월 쯤에 알게되었다.
부끄럽지만 교대는 초등학교 교사, 사범대는 중고등학교 교사를 양성하는 학교라는 걸
그제서야 알았다.
'담임샘님요, 저번에 그 교생실습 온 선생님들, OO대학교 맞습니까? '
'그럼 그 말고 더 있나? 와 OO대 가고 싶나'
'아닙니다'
'에라이 새끼야 니가 그 갈 수 있으면 내가 교사를 그만둔다 임마'
'아입니다'
교무실을 나서면서 선생님께서 하시던 말
'쌤 내년에 정년퇴직인 거 알고잇제'
영어가 시급했다.
운동을 좋아했던 나는 체육교육과를 지망했고
당시 그 학교는 수능성적에 수학을 반영하지 않았다.
실기는 자신있었다. 무슨 자신감이었는지는 모르겠지만
꽤 오랜 시간 운동을 했던 탓에
체육선생님도 체대로 진학하길 권하셨을 정도였으니
보충 수업시간에는 체육관에서 학교 체육선생님이 따로 실시하던
체대 입시생 교육반에서 운동을 했고 야자시간엔 독서 대신 수능 공부를 했다.
바쁘게 살았던 고3
OO대학교 체육교육과 면접과 실기를 보게 되었다.
혹시나 마주칠 수 있을까 하는 마음.
이리저리 캠퍼스를 서너 시간 서성였지만 그녀를 볼 수 있을 리는 없었다.
수능 후 입학 전
20살들이 가장 고삐 풀린 망아지 마냥 망나니처럼 놀 때
나도 친구들과 놀고 여자 소개도 받아보고 즐겁게 살아가던 그 때
그녀도 서서히 잊혀지는 듯 했다.
입학 후 동아리 가입을 한 뒤 동아리 신구대면식 술자리.
거의 다 나의 또래 쯤 되보이고 앳되어 보였지만
드문드문 끼리끼리 모여서 노는 선배들도 보였다.
동아리 회장형이 졸업했지만 아직 연락하고 친하게 지내고 종종 학교에 놀러오시는
졸업생 선배들도 있으니 나중에 시간나면 인사 한 번씩 하라고 하셨다.
그래 그렇구나
그 새 친해진 친구 한 명과 담배 한 대 태우러 나갈 때
약속시간에 늦어 서둘러 오는 듯 한
급하게 꾸미고 나온 듯 한
너무도 이쁜
거의 1년이 지났지만 한 눈에 알아볼 수 있었던
그녀를 나는 그 곳에서 다시 만났다.